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37화 (310/558)

제337화

주황색 선은 왕의 집무실이라 여겨지는 방을 거쳐, 지하 연구실을 지나 더 깊숙한 곳으로 이어졌다.

선을 따라 일직선으로 땅을 뚫어버리고 싶었으나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정원 쪽에서 시작해 비스듬히 파고 내려가기로 했다.

왕성 깊숙한 곳에 줄리어스의 실험실이 있을지, 아직은 미지수였다.

다른 게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도전할 가치는 있었다.

옛 성도에는 수많은 싱크탱크가 존재했으며, 그중 중요한 몇몇 곳은 왕성 지하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위험한 것일수록 가까이 두어야 한다, 핀들론 할아버지의 말이었다.

위대한 천재는 절대적인 위험 요소이기도 했다.

왕은 그녀를 가까이 뒀을 것이다.

-정면에 보강판이 있습니다.

작업을 이어 나가며 주황색 선에 가까워졌을 때였다. 거병이 말했다. 자신을 C2-121이라 소개한 거병에게 따로 이름이 있냐고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없다’였다.

그래서 ‘C’라고 부르고 있었다.

“C. 보강판이라면…….”

-지하 시설 착공 때 외벽에 덧대는 합판입니다.

“이 앞에 벽이 있다는 거네.”

조심스럽게 흙을 파낸 후 지지대를 설치했다. 사람의 몸뚱이로는 수행 불가한 작업도 거병의 힘을 빌리면 수월했다.

-응축봉을 교환해 주셔야 합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거병의 한쪽 무릎을 굽힌 다음 체임버 덮개를 열었다. 조정석 바닥에 놓아둔 내열 장갑을 낀 채 체임버 아래쪽 외장갑 뜯어냈다.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가하란은 얼굴을 찌푸린 채 손을 뻗었다. 덮개를 돌려서 연 후 안에 든 마나응축봉을 꺼냈다.

“연료가 모자랐다면 막막했을 거야.”

거병을 기동시킬 수 있는 마나응축봉은 귀중한 전략물자였다. 그라운드 제로를 겪으며 배터리 형태로 바뀌었으나, 여전히 응축봉은 귀한 물건이었다.

만들기는 어렵고 필요한 곳은 많은 에너지원.

가하란이 C를 찾아낸 도시 북부 거병 집결지에는 마나응측봉만 모아둔 창고가 있었다.

옛 제국조차 응축봉을 쌓아두진 못했으리라. 성도에 직접 가본 건 아니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넘쳐나는 자원. 그러니 거병으로 밭을 갈았겠지.”

나타 왕국의 시민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풍요를 만끽하며 평화롭게 지내지 않았을까?

모든 문제는 결핍에서 온다고 하니 방대한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국가라면 분명 평온했으리라.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

“그런 곳도 지진과 화산 폭발은 이겨낼 수 없었던 건가.”

엔엔이 말해준 나타 왕조의 멸망 이유를 상기하며 덮개를 닫았다.

체임버에 올라타 C를 불렀다.

-예상 기동시간은 5시간입니다.

“그 안에 끝내보자. 거의 다 온 것 같으니까.”

거대한 곡괭이로 흙벽을 찍었다.

단순한 작업을 반복하면서 입을 열었다.

“C. 여전히 기억나는 건 없어?”

-죄송합니다. 기억소자에 남은 데이터가 없습니다.

“미안해하지 마. 나도 아는 게 없어서 물어보는 거니까.”

사람들이 왜 없어졌는지 C를 통해 알아보려 했으나, C 역시 아는 게 없었다.

정비공의 이름이나 정비소 풍경, 기동 시범에 나섰던 기억들은 남아있으나 어느 순간 단절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래도 대답해 주는 상대가 있어서 다행이야.”

-왜 다행입니까?

“덜 외로우니까.”

-외로움은 해로운 것입니까?

“마냥 나쁜 건 아니지만 과하면 마음이 아파. 지금 나처럼.”

-가하란은 외로운 상태입니까?

“응. 아주 많이.”

까앙!

곡괭이 끝에서 불꽃이 튀었다. 돌을 찍은 것 같지는 않았다. 돌이었으면 곡괭이가 파고들었을 테니까.

-보강판입니다.

“제대로 찾아왔네.”

체임버를 열고 정보의 세계로 진입했다. 강렬한 색채의 주황색 선이 벽 너머에 있었다.

신비로운 선이었다. 주변 사물이 선으로 변한다고 하더라도 투시가 가능한 건 아닌데, 주황색 선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뚫을 수 있겠어?”

-현 장비로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뚫는 것보다는 뜯어내는 걸 추천합니다.

체임버를 닫고 거병을 움직였다.

흙을 치우고 나니 탁한 회색빛 벽이 나타났다. 검은색 점이 하나 보였는데, 곡괭이로 찍은 부분이었다.

“네 말대로 뚫는 건 어렵겠네.”

이음새를 찾았다. 보강판 연결부위에 곡괭이를 찍은 후 강하게 당겼다.

콰드득, 요란한 소리와 함께 보강판이 뜯어졌다. 떨어진 보강판 사이로 내부 시설이 보였다.

가하란은 거병에서 내렸다.

“루루.”

체임버 안에 있는 루루를 불러봤지만 따라오지 않았다. 귀찮은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혼자 안으로 들어갔다.

은은한 빛이 감도는 실내. 천장을 바라보니 광원체가 박혀 있었다.

마법등인 걸까?

그때였다. 주변이 밝아졌다. 사물을 식별하기 편안한 정도의 밝기였다.

“여긴…….”

지름 1m의 반구형 쇳덩어리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저게 무엇인지, 가하란은 보자마자 눈치챘다.

오토마타.

유사정령을 담는 그릇.

다가가 매끄러운 쇠 위에 손을 올렸다.

카트시처럼 반응해주는 걸까?

“깨어 있어?”

말을 걸었지만 침묵만 돌아왔다. 감각기를 끼고 시그니처를 불러왔다.

오토마타라면 반응해야 할 마나 회로가 잠잠했다. 가하란은 감각기를 손에서 뺐다.

“껍데기구나.”

안에 들어 있어야 할 유사정령이 없었다. 아니, 있지만 차단된 상태인가?

늘어선 오토마타를 바라봤다.

당장 눈에 들어오는 것만 해도 스무 개가 넘었다.

띄엄띄엄 박혀 있는 굵은 철근을 따라 움직였다. 오토마타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생산시설은 아닌 것 같고.

둔에 있었던 강철의 무덤처럼 폐기품을 모아둔 걸까?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나나 너희나 비슷한 처지네.”

혹시나 해서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사람이 있다면 대답해 달라고.

메아리가 벽을 때리며 퍼져나가다가 사라졌다. 지독한 고요가 내려앉았다.

이게 끝인 걸까?

줄리어스의 연구시설인 줄 알았는데 사용할 수 없는 오토마타만 잔뜩 있었다.

고개를 돌려가며 벽을 살폈다. 출입구가 있을 텐데.

왕성 깊숙한 지하를 창고로 썼을 리 없다. 분명 다른 게 있을 것이다.

주황색 선을 찾기 위해 눈에 힘을 줄 때였다.

팅, 하고 맑은 쇳소리가 들려왔다.

적막 속에서 일어난 소리는 마치 천둥 같았다. 가하란은 흠칫하며 주변을 살폈다.

경계하는 것도 잠시.

“누구 있어요? 있으면 대답해 주세요.”

이 세상에서 스스로 움직이는 건 하늘석뿐이었다. 작디작은 벌레조차 안 보이는 기이한 세상.

소음을 만들어낸 게 설령 마수라고 해도 반가울 것이다.

다시금 팅, 팅. 맑은 쇳소리가 들려왔다. 가하란을 중심으로 소리가 왼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잠깐만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렸다.

움직일 때마다 조명기구의 밝기가 달라졌다. 동작을 인식하는 것 같았다.

저 멀리, 천장에 박힌 등이 빛을 뿌려댔다. 저곳에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다.

철근을 붙잡고 오른쪽으로 획 돌았을 때였다.

“……고양이?”

오토마타 위에서 나뒹굴고 있는 고양이가 있었다. 돋아난 발톱으로 오토마타를 긁을 때마다 팅, 팅 소리가 났다.

인기척을 내며 다가갔다.

고양이가 털을 잔뜩 세우며 등을 둥글게 말았다.

“저기, 사람 말 할 줄 아니?”

그럴 리 없다는 듯 하악질하며 뒤로 주춤 물러서는 고양이였다.

새까만 털, 그리고 새빨간 코.

고양이가 멈추자 천장에서 내려오던 빛도 약해졌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빨간 코만 둥둥 떠 있는 모습이 됐다.

살아 있는 동물.

두 달 만에 처음 만났다.

반가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무서워하지 마. 물론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너한테는 전해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웰턴네 고양이를 떠올리며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까칠한 고양이라면 절대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먹이로 유인하고 싶어도 마땅한 것이 없었다.

미묘한 대치 국면이 이어질 때였다.

툭툭, 발등을 때리는 촉감에 가하란은 움찔하며 시선을 내렸다.

고양이 한 마리가 더 있었다.

이쪽은 새하얀 털에 코만 새파랗게 물들었다.

붉은 코와 파란 코.

두 마리의 고양이.

그리고 줄리어스.

“크랜베리, 블루베리?”

오토마타에 남아 있던 음성녹음을 떠올렸다. 줄리어스가 기르던 고양이의 이름은 크랜베리와 블루베리였다.

냐아아, 발치에 있는 코가 파란 고양이가 몸을 비벼왔다. 하얀 털이 바지에 잔뜩 묻어났다.

손을 조심스럽게 뻗어 고양이를 들어 올렸다. 파란색 코.

“네가 블루베리야?”

고양이는 질문 따윈 관심 없다는 듯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발버둥 쳤다. 자세가 불편한 모양이다.

손으로 허리 밑을 받쳐주니 그제야 얌전해졌다.

자세히 보니 고양이 목에 얇은 줄이 감겨 있었다. 작은 이름표도 보였다.

‘블루베리’

“맞네, 블루베리.”

그렇다면 저쪽에 있는 고양이가…….

시선을 정면으로 던졌을 때였다. 검은색 고양이, 크랜베리가 오토마타에서 뛰어내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망치듯 서두르는 게 아니라 사뿐사뿐 걸으며 가끔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듯이.

블루베리를 든 채로 크랜베리를 따라갔다. 줄지어 늘어선 오토마타의 끝, 회색 벽 귀퉁이에 문이 있었다.

“중앙연구실 부속 인지 통합 연구팀.”

지독한 악필이라 알아보는 데 한참 걸렸다. 크랜베리가 앞발을 들어 문을 긁었다.

문고리를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큼직한 침대가 먼저 반겨줬다. 오른쪽 벽면에는 커피콩이 담긴 병들이 놓여 있었다. 쌉싸름한 커피 냄새가 진동하는 방이었다.

왼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철로 된 선반에 위에 익숙한 물체가 있었다. 가하란은 블루베리를 내려놓고 선반으로 다가갔다.

“……카트시.”

오토마타 안에 들어가는 유사정령이었다. 외형이 카트시와 똑같았다.

조심스럽게 만져봤다.

-권한이 없습니다.

반응했다.

가하란은 감각기를 손에 끼고 정보의 세계로 진입했다. 줄리어스가 만든 유사정령이라면 베이스는 마력선 짜맞춤일 것이다.

카트시와 처음 만났을 때를 되새김질하며 유사정령의 실체에 접근하려 했다.

공중에 새겨진 마력선이 입체적으로 변했다. 카트시와 달리 정육면체였다.

-누구시죠?

새침한 목소리였다. 권한이 없음을 알릴 때와는 전혀 다른 음성.

“일단 이름부터 말하는 게 낫겠지? 난 가하란이야.”

-등록되지 않은 이름이네요. 거부합니다.

정육면체를 이루던 마력선이 한순간 풀어졌다. 목소리 역시 사라졌다.

“잠깐만. 내 얘기 좀 들어줘.”

-거부합니다.

“줄리어스가 있던 곳 맞지? 넌 그 사람이 만든 거고.”

-거부합니다.

“카트시는? 카트시는 알고 있지? 카트시는 ‘우리’라는 표현을 썼어.”

-거부합니다.

감정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기계적인 음성만 되풀이했다.

몇 번 더 말을 걸었으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완벽한 정보 차단이었다.

“다음에 다시 말을 걸게.”

유사정령을 뒤로하고 방을 살폈다. 휴식 공간인지 업무와 관련된 자료는 없었다. 시집, 소설, 사진으로 가득 한 책만 여기저기 널려 있을 뿐.

“이쪽인가.”

왼쪽 벽 끝에 있는 문 앞에 섰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 특히 크랜베리는 안 돼.

역시나 알아보기 힘든 글씨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