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6화
엔엔이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유단은 사회적 지위가 높아요. 특임교수이면서 학회장 대행인 탄드라 교수와도 각별하죠. 둔 내에서 정치적으로 그를 압박할 수단은 없어요. 그렇다고 무력으로 제거하면 불씨를 남기게 되죠.”
“카트시의 동료.”
밀레나는 잠들어 있는 카트시를 바라봤다.
거짓말을 발견한 ‘로키’처럼 카트시 역시 원한다면 인간을 속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카트시는 우호적으로 인간을 대했고 기계에도 정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같은 사람이 만든 유사정령인데 성향이 극단적으로 다르다는 게 신기해요.”
“특별한 유사정령이니까요. 줄리어스가 만들어낸 아이들은 스스로 학습해요. 자아를 획득하고 개성을 깨우쳤죠. 살아 있는 지성체처럼 말이죠.”
“선인도 악인도 시작점은 같다, 이 말이 생각나네요.”
밀레나는 머리를 쓸어올렸다.
“어쩌면 유단은 꼭두각시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니 유단에게 펠트신 제조법을 넘긴 유사정령을 찾아내야 해요. 위치를 파악하기 전까지 유단을 건드릴 순 없어요.”
카트시와 동급 성능의 유사정령이 유단의 뒤를 봐주고 있다. 무슨 짓을 꾸미고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가족의 연조차 냉정하게 끊어버리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 움직인 인간. 벼랑 끝에 몰리면 지독한 짓을 저질러 버릴 것이다.
“그 펠트신이라는 독약을 살포하게 되면 둔은…….”
밀레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경에 타격을 준다는 건 알지만, 호흡만으로 독성을 발휘하는지는 파악하지 못했어요. 가하란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가하란은 이 모든 사실을 홀로 감당한 거네요. 학회장님 장례식에 찾아갔다고 들었어요. 그 애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짐작할 수조차 없죠. 가하란은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어요. 아픈 게 당연해서 자신이 병들고 있음을 모르는 상태였죠. 그래도 밀레나와 다시 만난 후 정말 좋아졌었는데…….”
말끝을 흐린 엔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분간 둔을 떠날 거예요.”
“어디로 가시게요?”
“서쪽.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상대한 그 마수, 살아 있는 거 같아요.”
“네?”
“밀레나도 봤죠? 군이 쫓아갔던 거대한 마수. 그건 껍데기였다고 해요. 주요 생체기관을 보호한 채 분리가 가능한 거예요.”
“그렇다면 그 폭발은…….”
“단순한 눈속임은 아니었어요. 마수 역시 막대한 피해를 받았겠죠. 하지만 살아 있다면 분명 회복할 테죠. 그 전에 찾아내 보려고요.”
“저도 같이 갈게요!”
밀레나도 일어서며 말했다. 엔엔이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버텨보려 했지만 누르는 힘을 이겨낼 수 없었다. 도로 의자에 앉고 엔엔을 올려다봤다.
“밀레나는 신체술을 잘 다루죠. 하지만 그뿐이에요. 극한으로 다룰 수 없다면 저한테 방해가 돼요.”
“하지만…….”
“밀레나는 밀레나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요. 그게 맞아요.”
억지를 부릴 수 없었다. 엔엔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프레나. 덴스 학회장의 딸. 그 애를 만나봐야겠어요.”
“친분이 있나요?”
“아니요. 전혀요. 하지만 가족이라면 분명 눈치챘을 거예요. 유단이 감쌀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대화해보는 건 좋지만, 너무 많은 걸 드러내진 마요. 저보다 밀레나가 더 잘 알겠지만, 인간들의 가족애는 종종 비이성적인 결과를 가져오니까요.”
“네, 조심할게요.”
당사자를 건드릴 수 없으니 주변인을 포섭해야 한다.
“언제 떠나실 건가요?”
밀레나의 물음에 엔엔은 커다란 배낭을 꺼내오며 답했다.
“지금요.”
* * *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유단은 낮에 본 밀레나를 떠올렸다. 한밤중에 봤던 것과 느낌부터가 달랐다.
얼굴형뿐만 아니라 체형마저 같았다. 풍기는 분위기야 전혀 달랐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어차피 필요한 건 육체뿐이니까.
유단은 쌓아놓은 서적에 손을 뻗었다.
“심상세계 이전은 확인했어. 방법은 있는 거야. 이제 영혼세계만 제대로 규명한다면…….”
쉼 없이 혼자 떠들며 펜을 움직였다. 인간의 뇌는 끝없이 잡념을 생산해낸다. 침묵한 채 손을 움직이면 제멋대로 뇌가 날뛰니 입을 움직여 머리를 다스려야 했다.
“정보가 부족한 만큼 밑 작업을 최대한 해둬야 한다. 어머니와 닮은 육체가 어느 정도 효용을 발휘할지 알 수 없으나, 사소한 요소가 성패를 가를 수도 있다.”
모든 장소, 모든 시간에 존재하는 기억.
영혼세계에 있을 줄리어스의 기억 전체를 밀레나의 육체에 집어넣을 수만 있다면…….
뚝, 종이에 피가 떨어졌다.
유단은 손등으로 코피를 훔쳤다. 나약한 신체였다. 고작 일주일이었다. 일주일 정도 잠을 걸렀다고 신체가 비명을 질렀다.
어쩔 수 없이 책상에서 떨어졌다.
몸이 망가지면 모든 계획이 멈춰버린다. 자고 일어나면 어느 정도 회복하겠지.
눈을 붙일 때였다. 발소리가 들려왔다. 닫아놓은 연구실 문을 바라봤다.
방해하지 말라고 일러뒀으니 연구소 소속은 아닐 텐데.
“오빠.”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온 목소리였다. 유단은 눈을 씰룩거렸다. 귀찮은 방해물이 왔다.
알아듣기 쉽게 일러뒀지만 프레나는 이해력이 부족한 모양이다.
무시한 채 눈을 감았다.
“오빠, 안에 있는 거 알아. 얘기 좀 해.”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어지럽다고 호소하는 머리를 달래며 일어섰다. 걸림돌이지만 내쳐버릴 수 없는 존재.
당장은 곁에 두지만 덴스의 모든 유산을 넘겨받는 날, 말귀가 어두운 인간 여자와 작별을 고할 것이다.
“무슨 일이야?”
문을 열며 말했다. 밖에 서 있는 프레나는 꼴이 엉망이었다. 며칠 밤을 지새운 나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계속 여기 있었어?”
프레나가 물었다.
“말했잖아. 여기 있겠다고.”
“언제까지 있을 건데?”
“해야 할 게 많아. 교수님께서 남기신 것들도 정리해야 하고. 그러니 당분간은 이렇게 지내야 해.”
유단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쪽잠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까운데, 인간 여자를 상대해야 하다니.
“전에도 말했지만 서로 떨어져 지내는 게 나을 거야. 그러니 앞으로는 찾아오지 마. 여긴 외부인이 함부로 올 곳이 아니야.”
정론으로 설득했다. 감정적인 동물이라 납득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상한 말 해서 그런 거야?”
“그런 거 아니야. 너도, 나도 둘 다 시간이 필요할 뿐이야.”
“……집이 너무 조용해. 오빠가 없으니까 더 쓸쓸해졌어.”
“익숙해질 거야.”
대화가 길어질 기미가 보였다. 유단은 문손잡이를 슬며시 붙잡았다.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다. 조심해서 가.”
“잠깐만!”
문 안쪽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온 프레나가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유단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오른쪽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프레나가 작게 말했다.
“오빠는 아무렇지도 않아? 나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었어?”
“감정이 왜 없어. 소중한 동생인데.”
“그거 말고.”
유단은 프레나를 떼어냈다.
“학회장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내가 변했다는 거 알아. 너도 그것 때문에 난처했을 거고. 하지만 사람은 변하는 법이야. 머물러서는 아무것도 안 돼.”
“……오빠가 무서웠어. 다른 사람 같았으니까. 하지만 오빠가 곁에 없는 게 나는 더 무서워.”
“감정은 오래가지 않아. 차츰 희석돼. 아니면 내가 괜찮은 남자를 소개해줄까? 머리도 뛰어나고 생긴 것도 말끔해. 성격도 너랑 어울리고. 결혼하게 되면 가정적인 남자가 될 거야.”
“오빠.”
유단은 문을 천천히 닫았다. 좁혀져 가는 문틈 사이로 프레나의 얼굴이 보였다.
“너는 학회장님의 딸이야. 소중한 동생이고. 하지만 그 이상을 내게 바란다면 나는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너나 나나 정리가 필요하다는 걸 이제 알겠지? 그러니 당분간은 만나지 말자.”
조용히 문을 닫았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유단은 무시하고 간이침대에 누웠다.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는 건 나중의 일이었다. 지금은 여지를 남겨둬야 했다. 모호한 관계. 이 정도가 적당했다.
혹여나 상황이 급변해 프레나가 필요해진다면 가까이 두면 되고.
“뿌리에 접근할 방법도 찾아야 해. 영혼세계에 간섭하려면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할 테고, 그걸 견디려면…….”
인간의 육신으로는 뿌리가 뿜어내는 방대한 마나를 버텨낼 수 없다.
가시화된 미량의 마나조차 이겨낼 수 없는 게 이 보잘 것 없는 살덩이였다.
보호막이 필요했다.
“거병.”
유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지럼이 가셨다. 몸이 한계를 호소할 때까지 다시 밀어붙여야 한다.
영혼세계에 관한 서적을 들췄다.
매정한 시침을 붙들어 둘 수 없으니 한없이 움직이고 노력해야 한다.
* * *
“두 달.”
가하란은 분수대 옆에 쌓아둔 돌탑을 바라봤다. 바닥에 깔린 블록을 뜯어내 하루에 하나씩 쌓아뒀는데, 벌써 두 개의 탑이 됐다.
“오늘은 성 지하를 마저 뚫어볼 거야.”
뒤따르는 루루에게 말했다.
고독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무슨 말이든 계속 내뱉는 것이었다.
루루가 대답해 준다면 좋겠지만, 언제나 끽끽거릴 뿐이었다.
이곳에 오고 한 달째 되는 날, 환청을 들었다. 사람 목소리였다. 어찌나 반가운지 눈물이 날 뻔했다.
다시 한 달이 지난 지금, 환청조차 사라졌다.
활짝 열린 성문을 지나쳐 드높게 솟은 성으로 향했다. 시들지 않는 정원 한쪽에 검은색으로 칠해진 거병이 있었다.
“오늘도 잘 부탁해.”
가하란은 거병에 올라탔다.
반지 형태인 시동키를 손가락에 끼고 거병을 일으켜 세웠다.
인지 통합이 끝난 거병의 눈이 깊은 굴을 잡아냈다. 지난 한 달간 해왔던 작업을 오늘도 이어 나갔다.
안에 들여다 놓은 레일을 바닥에 깔았다. 멀리 떨어져 있던 자동 수레가 천천히 움직여 뒤에 붙었다.
가하란은 거병의 손을 움직여 흙을 거둬냈다. 버팀목은 굳건했고 지반도 안정돼 있어 더 파고 들어가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흙을 실은 자동수레가 굴 밖으로 이동하는 동안, 가하란은 거병에서 내려 굴 안쪽을 살폈다.
안구에 열감이 차올랐다. 주변 사물이 선으로 된 정보로 변하기 시작했다.
가하란은 벽면을 따라 움직이는 굵은 주황색 선을 바라봤다.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주황색 선을 발견한 건, 한 달 전이었다. 왕성 내부를 살피다가 문건 하나를 발견했다.
-강철거인 세부 진행 상황.
내용을 살피고 다른 문건도 확인해 본 결과 강철거인이란 프로젝트 ‘거병 거대화 계획’임을 알게 됐다.
카트시는 말했다.
줄리어스가 총책임자로 있었던 연구가 거병 거대화였다고.
카트시란 걸작을 만들어낸 천재.
연결망의 창시자.
정보의 집약과 변화를 이해하고 마력선 짜맞춤을 고안해낸 그녀라면 이 상황에 대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물론 만날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전 인구가 증발해버린 이곳에 줄리어스가 남아있을 리 없으니까.
사람은 사라졌지만, 그녀의 연구 성과는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왕성 곳곳이 뒤적거리다가 지하 깊숙한 곳으로 이어지는 주황색 선을 발견한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