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5화
목표가 생기니 힘이 돋아났다. 무른 땅을 박차며 성벽을 향해 갔다.
어쩌면 성벽 너머에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본래 세계로 돌아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단서를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드높게 솟은 성벽만 바라보며 뛸 때였다.
가하란은 걸음을 멈추고 우측을 바라봤다. 경작지로 보이는 곳에 우뚝 솟은 물체가 있었다.
그것이 거병임을 알아보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전고 5m 정도의 거병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하나같이 쇠사슬을 어깨에 이고 있었는데, 쇠사슬의 끝은 쟁기에 연결돼 있었다.
이질감이 들었다. 땅을 가는 거병이라니. 소모 에너지를 생각하면 비효율의 극치였다.
가하란은 몸을 틀었다. 성벽 대신 거병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건…….”
낯선 외형이었다. 마법공학의 첨단을 달리는 둔에서도 이런 형태의 거병은 본 적이 없었다.
하부 모듈이 극단적으로 짧고 두 팔은 길었다. 무게중심을 낮춰 안정감을 높인 건 좋지만, 이러면 기동력이 처참할 텐데.
나란히 선 거병을 바라봤다.
외관이 똑같았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설마 밭 가는 용으로 제작한 건 아니겠지?
거병은 태생이 병기였다. 거대했던 시절에는 공성전에 맞게 제작됐고, 그라운드 제로 이후에는 기동성을 높여 마수 전용으로 설계 형식이 바뀌었다.
대적해야 할 상대만 변했을 뿐 전투를 위한 기계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안에 아무도 없나요?”
가하란은 거병 앞에서 손을 들어 올렸다. 전략 병기를 방치해 뒀을 리 없다. 분명 주변에 관리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몇 분 동안 거병 주변을 서성거렸다.
“아무도 없어.”
실망감과 함께 두려움이 밀려들었지만 가하란은 마음을 다잡았다.
거병을 뒤로한 채 성벽으로 향했다. 해자를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 성벽 안쪽으로 진입했다.
가하란은 정면에 깔린 도로를 보며 짧게 감탄했다. 마차로 양옆으로 인도가 설계돼 있었는데, 격자무늬의 돌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깔려 있었다.
도로 역시 마감이 좋았다. 도시 정비를 끝마친 둔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드넓은 도로 끝에 성이 보였다. 중앙도로를 중심으로 양옆에 배치된 건물들은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구성이며 크기가 똑같았다.
넓은 도로를 따라 걸었다. 주차된 마차 안에도, 가게 안에도, 골목 안쪽에도 사람은 없었다.
개, 고양이, 그 흔한 쥐조차 보이지 않았다.
정밀하게 설계된 도시 안에서 움직이는 생명체는 나 혼자였다.
“아니, 너도 있었지.”
가하란은 품 안에서 얼굴만 빠끔 내민 루루를 매만졌다.
“아무도 없나요!”
목이 따끔거릴 정도로 크게 외쳤다. 뻗어나간 소리가 허무하게 흩어졌다.
좌우를 살피며 걷다가 마법등에 걸린 깃발을 바라봤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에는 난생처음 보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가하란은 아, 하면서 바닥을 바라봤다.
왜 이제야 이걸 눈치챘을까.
‘균열’이 없었다.
숲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그라운드 제로가 전 국토에 남겼을 상흔이 이곳에는 왜 없을까?
다른 층, 계 혹은 틈이라서 그런 건가? 현실과 닮아 있지만 전혀 다른 곳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문명을 만든 자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반듯한 조형물이 자연의 산물일 리 없었다. 이건 누군가가 빚어낸 것이다.
마차의 규격과 가게 출입구 크기를 봐서는 이곳에 살았던 건 ‘인간’ 혹은 인간과 흡사한 생명체가 분명했다.
가하란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정보가 필요했다.
다행히 간판에 쓰인 글씨는 읽을 수 있었다. 문자가 달랐으면 애를 먹었을 것이다.
바로 앞 잡화점으로 들어갔다.
아기자기한 물품이 진열대 가득 쌓여 있었다. 카운터로 다가갔다. 역시나 주인은 없었다.
익숙한 물건과 사용법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물건들 사이에서 가하란은 포스터 한 장을 발견했다.
“안드레 축제.”
아는 단어가 나왔다. 성 안드레 축제. 옛 성도에서 6월쯤에 열리는 성대한 축제였다.
현실 세계와 공통점을 찾았다.
안원처럼 완전히 격리된 세계가 아니구나.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희망이 되새김질하며 포스터 내용을 읽을 때였다.
가하란은 입을 살짝 벌렸다.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포스터 가까이 다가갔다.
글씨가 잘못 쓰인 것도, 잘못 읽은 것도 아니었다.
“제 3회 안드레 축제. 라인헌스 17국, 나타 287년.”
나타 287년.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단숨에 이해됐지만, 가하란은 일단 부정했다.
아닐 것이다.
그럴 리가 없었다.
허둥지둥 잡화점을 벗어났다.
텅 빈 거리를 비틀거리며 걷다가 멈췄다. 바람에 날려온 포스터가 발목을 휘감았다. 잡화점에서 본 그 포스터였다.
가하란은 고개를 천천히 오른쪽으로 돌렸다.
유리창에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아닐 거야.”
창이 비친 자신에게 덧없는 말을 내뱉은 후 쭉 뻗은 도로를 미친 듯이 뛰었다.
“하아, 하아, 하아…….”
메말라 버린 분수대를 만났다. 분수대를 기점으로 방사형으로 도로가 뻗어나갔다.
도시의 중심지.
가하란은 분수대를 붙잡고 올라갔다.
“정말 아무도 없어요? 있으면 대답해 주세요!”
메마른 목소리가 도로를 타고 퍼져나갔지만, 화답해주는 이는 없었다.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분수대에 걸터앉아 맞은편에 있는 현수막을 바라봤다.
-즐거운 안드레 축제! 다 같이 준비하고 다 같이 즐깁시다!
* * *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었다.
밀레나는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엔엔 님?”
대답이 없었다. 잠깐 나간 걸까?
2층으로 올라갔다. 창가에 있는 카트시가 보였다. 여기에 가하란만 있으면 늘 봐오던 모습인데.
“카트시, 엔엔 님은?”
식탁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카트시?”
가하란이 사라져서 우울한 걸까. 항상 유쾌하게 목소리를 내던 카트시가 조용했다.
밀레나는 카트시 곁으로 갔다.
“걱정되는 거 알아. 솔직히 말하면 나도 불안해.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뜻대로 안 되잖아.”
카트시의 대답을 기다렸다.
“……내가 미울 수도 있겠네. 나 때문에 가하란이 위험해졌으니까.”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자신을 책망할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가슴 한구석에 미련 같은 것이 생겼다. 좀 더 매끄럽게 대응했다면, 마수의 공격을 피했다면, 차라리 깔끔하게 죽었다면 가하란은 무사하지 않았을까?
“카트시, 뭐든 좋으니까 얘기를 해줘.”
카트시의 감각 장치를 바라봤다. 발랄하게 움직여야 할 안구가 축 늘어진 채 미동조차 없었다.
“카트시?”
뭔가 이상했다. 카트시 본체에 손을 대고 가볍게 흔들었다. 카트시, 카트시. 수차례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가하란이 사라진 직후 정지해 버렸어요.”
뒤를 바라봤다. 계단 끝에 서 있는 엔엔이 보였다. 바구니를 들고 있는데 안에는 식자재가 들어 있었다.
“정지하다니요? 그게 무슨…….”
“밀레나. 카트시가 가하란을 부를 때 쓰던 호칭을 기억하나요? 이름 말고요.”
“이름 말고요?”
기억을 더듬자 명칭 하나가 떠올랐다.
“보안책임자.”
“맞아요.”
엔엔이 식탁에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카트시는 가하란을 만나기 전까지 기능이 정지된 상태였어요. 그걸 가하란이 깨우고 보안책임자가 됐죠.”
“그렇다는 건…….”
밀레나는 카트시를 바라봤다.
책임자가 사라졌다.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될 위험한 유사정령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택할까?
“완전한 차단.”
“카트시가 원해서 잠에 든 건 아닐 거예요. 카트시를 만든 사람이 그렇게 설계한 거겠죠. 이해해요. 카트시는 특별한 마법공학품이니까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거겠죠.”
카트시 안에는 위험한 정보가 쌓여 있다고 들었다. 주변 환경을 바꾸는 선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문화를 바꿀 만한 기술이.
“깨울 수 없는 건가요?”
밀레나가 물었다.
“현재로선 방법이 없어요. 카트시는 몇백 년을 강철의 무덤에서 보냈어요. 지식인들이 카트시를 조사했지만 성과가 없었죠. 카트시를 깨운 건 가하란이 유일해요.”
가하란이 사라졌다.
그리고 카트시마저 단절을 강요당했다.
밀레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영혼에 큰 구멍이 생긴 것 같았다.
“날 놀려도 좋아. 그러니 평소처럼 얘기해 주면 안 될까? 아니면 체스를 두는 건?”
본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금방이라도 들뜬 목소리를 낼 것 같았지만, 카트시는 침묵을 지켰다.
차가운 쇠의 질감이 유달리 낯설다.
“마셔요.”
엔엔이 잔을 내밀었다. 연분홍빛 차. 찬물에 우려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가하란이 돌아오면 카트시는 눈을 뜰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요. 그보다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유단이에요.”
밀레나는 낮의 일을 상기했다.
“왜 그 사람을 조심하라고 한 거죠?”
“얘기가 조금 길어요.”
“시간 많아요. 다 들려주세요.”
“좋아요. 대신, 하나만 약속해요.”
엔엔이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렸다.
“절대 흥분하지 말 것. 듣고 나서도 아무런 행동하지 말 것.”
“무슨 이야기길래 그렇게 겁을 줘요.”
“약속할 수 있죠?”
밀레나는 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그러니 말해줘요.”
엔엔이 차를 단숨에 마셨다. 먼 길을 떠나기 전에 최대한 수분을 보충하는 느낌이었다.
“일단 카트시의 동료들에 대해 말해야겠네요.”
밀레나는 귀를 연 채 이야기에 집중했다. 알고 있던 내용도 있었고, 처음 듣는 정보도 있었다.
새롭게 깨닫는 것이 하나하나 늘어갈 때마다 밀레나는 힐긋 창밖을 보았다.
엔엔이 왜 그렇게 경고했는지, 현장에서 말하지 않고 따로 시간을 빼 뒤늦게 말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엔엔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밀레나는 경련하듯 떨리는 무릎을 지그시 눌러야 했다.
안 그러면 당장 뛰쳐나갔을 테니까.
“사람이란 게 참 무섭네요.”
부모나 다름없는 학회장을 죽인 자. 추악한 내면을 간사하게 숨기고 가하란을 애도하는 척해?
“유단은 알고 있어요. 자신의 치부를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걸. 덴스의 보험이었죠. 자기 딸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험.”
“가하란을 의심하고 있었던 걸까요? 저한테 접근해서 가하란에 대해 물은 걸 보면…….”
“그럴 확률이 높아요.”
밀레나는 엔엔의 눈을 바라봤다.
“설마 이번 실종도…….”
“그건 아닐 거예요. 밀레나도 현장에 있어서 알겠지만, 이번 건은 마수로 인해 벌어졌어요.”
“그렇죠, 그게 맞겠죠. 하지만 찝찝해요.”
“카트시는 확신에 가깝게 말했어요. 줄리어스가 창조한 또 다른 유사 정령이 유단 곁에 있을 거라고.”
“실종과 관계가 없다고 해도 그 인간을 내버려 둬서는 안 돼요. 부모나 다름없는 사람을 죽였어요. 그런 인간이 학회장 딸과 같이 있고요. 위험해요.”
“알아요. 하지만 방법이 없어요. 피해자인 덴스가 입을 다물고 무덤에 들어갔어요. 증거를 모은 가하란은 실종됐고요. 지금 유단을 억제할 수단이 우리 손에 없어요.”
“대놓고 말하면요? 자백을 강요하면…….”
밀레나는 곧바로 자신의 말을 부정했다.
“살인하고도 태연하게 그 집에서 머무는 인간. 양심 같은 건 애초에 없고 증거가 없다는 걸 인지한 이상 죄를 고백하진 않겠죠.”
우울한 얼굴로 말을 걸어오던 유단을 떠올렸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던 슬픔 표현 방식. 이질적인 모습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그 인간, 아니, 그건 인간의 껍데기를 빌린 악마인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