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4화
시냇물 앞에 멈춰 섰다.
두 손을 물에 담그고 한참 동안 바라봤다.
“없는 건가.”
치어라도 하나 발견했다면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가하란은 배낭을 베개 삼아 누웠다. 회색 태양 곁으로 구름이 느리게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도 없나요!”
속에서 끓어오르는 답답함을 담아 소리쳤다. 가슴팍에 누워 있던 루루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쳐들었다.
“미안. 답답해서.”
가하란은 회중시계를 꺼냈다. 오후 8시. 밤이 찾아오지 않는 회색빛 세상에서 시계는 시간을 감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커다란 나뭇잎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둠이 찾아오지 않으니 만드는 수밖에.
옆에서 촐싹대는 루루를 끌어안았다.
“너도 자. 졸리지 않아도 잠은 자둬야 해.”
기묘한 세상에 떨어지고 나흘째.
가하란은 이 세상에 어느 정도 적응했다.
* * *
움푹 파인 대지 주변에 군인들이 몰려 있었다. 중간중간 학회 쪽 사람들도 보였다.
다들 분주하게 움직이며 무언가를 조사 중이었다.
“살펴보는 건 자유지만 현장에 남아 있는 그 어떤 물건에도 손대서는 안 됩니다.”
“알겠어요.”
안내한 군인이 앞을 가리켰다.
밀레나는 조심스럽게 현장으로 다가갔다. 마수가 헤집어 놓은 균열, 폭발 자국, 체액으로 얼룩진 땅.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당시 흔적들이 꽤 남아 있었다.
“엔엔 님.”
현장에 있는 엔엔 곁으로 다가갔다. 엔엔의 털이 푸석푸석했다. 비가 올 때도 윤기가 흐르던 털인데.
“며칠 밤낮을 찾아봤지만, 아무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어요. 말 그대로 사라져버린 거죠.”
지친 목소리였다. 밀레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엔엔의 어깨를 다독였다.
“기록 장치에 남은 영상을 봤어요. 분명 가하란은 이곳에 있었어요. 그런데 순식간에 사라졌죠.”
“대지의 기억을 읽어낼 수 있다는 정령술사에게 부탁해 봤는데, 소용없었어요. 강렬한 힘이 주변 일대를 쓸어버려서 무엇 하나 남은 게 없다고 해요.”
밀레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마수 안쪽으로 끌려들어 갔을 때 가하란은 그곳에 있었어요. 지금도 분명 어딘가에 있을 테죠. 어쩌면 며칠 내로 돌아올지도 몰라요. 태연한 얼굴로 말이죠.”
말하다가 목이 멨다. 부정적인 생각을 날려버리려 했는데, 자꾸만 안 좋은 쪽으로 사고가 움직였다.
치켜뜬 눈이 뜨거워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눈물을 참기가 어려웠다.
“살아 있겠죠? 아니, 살아 있어야 해요.”
밀레나는 스카프로 눈가를 거칠게 훔쳐냈다.
“울 일도 아닌데 자꾸 눈물이 나네요. 가하란이 돌아오면 분명 놀릴 거예요. 별것도 아닌 일로 울었다고.”
“밀레나…….”
“제가 도울 일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뭐든 할게요. 가하란을 찾을 수 있다면 뭐든.”
엔엔을 보며 말할 때였다. 곁으로 다가오는 남자가 있었다.
유단.
가하란과 꽤 가까운 사이였지. 유단 역시 며칠간 잠을 못 잤는지 피곤해 보였다.
유단도 가하란을 찾고 있는 걸까?
눈이 마주친 김에 인사말을 꺼내려 할 때였다.
“어지러우면 쉬는 게 좋아요.”
엔엔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갑자기 왜, 라는 생각은 엔엔의 눈빛을 보자마자 사라졌다.
경고하는 시선이었다. 일단 말을 맞췄다.
“그래야겠네요.”
엔엔이 대신 유단에게 눈인사를 했다. 부축을 받으며 걷다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유단이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나무 그늘에 도착하고 나서야 엔엔이 걸음을 멈췄다.
“설명해주실 거죠?”
들어야 했다. 왜 갑자기 막아섰는지, 눈빛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저 인간하고 엮이지 마요. 물론 티 내지는 말고.”
엔엔이 현장 쪽을 슬쩍 바라봤다.
“이유는 이따가 설명해 줄게요. 지금 내막을 알게 되면 밀레나가 어떻게 대처할지 예상할 수가 없거든요.”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엔엔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일단 거리를 둘게요. 대신 제대로 설명해 주셔야 해요.”
“저녁에 봐요. 가하란의 집에서.”
가하란의 집. 기다리고 있을 카트시가 떠오르고, 주인이 돌아오지 않아 쓸쓸해졌을 거실이 그려졌다.
“카트시는 어떤가요? 가하란이 사라진 걸 알고 있나요?”
“카트시에 대해서도 해줄 말이 있어요.”
“제가 병실에 있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나 보네요.”
다시 사건 현장으로 돌아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유단이 다가왔다.
밀레나는 경계심을 품은 채 옅은 미소를 지었다.
“유단 씨, 맞죠?”
“기억하고 계시네요.”
“제대로 인사한 적은 없지만 서로 얼굴은 몇 번 봤으니까요.”
유단이 적막감이 담긴 눈동자로 주변 일대를 쓸어봤다.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 계속 찾아왔어요. 작은 단서라도 찾아보려고요.”
“그랬군요.”
밀레나는 슬쩍 유단을 살폈다.
말끔한 인상의 남자. 젊은 나이에 학회 특임교수가 됐을 정도로 능력도 인정받았다.
작고한 덴스 학장이 친아들처럼 여겼고, 주변 평판 역시 좋았다.
흠잡을 곳 없는 인재.
엔엔은 왜 유단을 멀리하라고 경고한 걸까?
“동생하고 가까우셨나요?”
유단이 질문했다.
“네.”
“바로 대답하시네요.”
“고민할 필요가 없거든요.”
“그렇군요.”
유단이 균열 쪽을 바라봤다.
“전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그 녀석이 사라졌다는 게.”
“곧 돌아올 거예요. 전 믿고 있어요.”
“믿음. 저도 강하게 믿어야 하는데 자꾸만 안 좋은 생각이 나요. 불안해서 며칠째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있고요.”
슬픔이 얼굴에 번져갔다.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아려올 정도다.
“친형제나 다름없었어요. 그라운드 제로 이전부터 서로 많이 의지했죠. 마법 공학에 관해 밤낮을 지새우며 떠들었고, 그런 일상이 계속 이어질 줄 알았어요.”
입가를 가리며 고개를 숙이는 유단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유단의 어깨를 토닥여주려 했다.
눈물을 흘릴 것처럼 눈을 반쯤 감고 있던 유단과 시선이 마주쳤다.
밀레나는 내밀던 손을 거두었다.
눈꺼풀 사이로 보인 눈동자는 이상할 정도로 침착해 보였다. 슬픔을 표방하는 몸짓과 달리, 눈동자는 가라앉아 있었다.
인식하고 나니 유단의 행동들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무엇이 걸리는 걸까.
몇 차례 더 지켜보니 알게 됐다.
지나치게 깔끔하다.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마치 훈련받은 군인처럼, 슬픔이란 작전을 수행하는 것 같았다.
선입견 때문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멀리하라는 경고가 필터처럼 작용한 걸지도.
“힘내요.”
밀레나는 짧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전후 사정을 정확하게 모르니 예의는 지켜야 했다.
“혹시 그 녀석에게 들은 얘기 없나요? 사소한 거라도 좋아요. 뭐가 됐든 단서를 잡고 싶어요. 여러 방면으로 조사하다 보면 실종된 원인을 찾을 수 있겠죠.”
“글쎄요. 특별한 얘기는 없었어요. 실종과 연관된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까?”
고개를 주억이던 유단이 이어서 말을 꺼냈다.
“무언가 생각나는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그 녀석을 찾을 수만 있다면 저는 뭐든 할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유단이 눈인사와 함께 물러났다.
“무슨 얘길 하던가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엔엔이 다가왔다.
“별거 없었어요. 실종에 관한 단서를 찾고 있다,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뭐든 말해달라. 누구나 할법한 그런 얘기만 했어요.”
“떠보는 건지,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는 건지 아직은 알 수 없겠네요.”
밀레나는 저 멀리 있는 유단을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 사람을 경계하는 거예요? 이질적인 느낌이 있긴 하지만 그게 기피해야 할 이유는 아닐 테고.”
“밀레나를 오랫동안 봐온 건 아니지만, 성격은 어느 정도 파악했어요. 그러니 조금만 참아요. 이따가 다 말해줄게요.”
“그래요. 뭔가 사정이 있겠죠.”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 * *
“민 교수님이 갇혔다는 ‘틈’과 비슷해. 하지만 다른 점도 많아. 일단 민 교수님은 숲을 배회했다고 했어. 영원히 끝이 보이지 않는 숲을. 게다가 밤낮도 바뀌었고.”
가하란은 루루를 눈앞에 앉혀둔 채 말했다. 따분한지 계속 눈을 돌리는 루루였다.
“틈과 층. 그리고 계. 층은 규명된 게 많아. 안원과 영혼 세계, 그리고 현실. 여긴 또 다른 층일까, 아니면 민 교수님이 헤맸다는 틈일까? 그것도 아니면 계?”
끽끽, 루루가 나무 위로 도망쳐 버렸다.
시선이 하늘에 닿았다. 오늘도 하늘은 잿빛이었다.
“……다들 잘 있으려나.”
가하란은 사과를 입에 물었다. 곳곳에 열려 있는 사과가 유일한 식량이었다.
21일째.
사과만 먹고 버틴 것 치고는 몸 상태가 좋았다. 배앓이를 한 적도 없고 기력이 부족해 쓰러진 적도 없다.
영양분이 충분한 걸까.
같은 것만 한 달 가까이 먹고 있지만, 물리지는 않았다. 이 또한 다행인 점이었다.
가하란은 근처에 뒹구는 뾰족한 돌멩이를 쥐었다. 덩그러니 서 있는 나무로 다가가 껍질에 표시했다.
“일단 같은 자리를 배회하는 건 아닌듯한데.”
못해도 백여 개의 나무에 표시해놨다. 민 교수가 말한 ‘틈’이라면 일정한 공간을 반복해야 정상인데, 여긴 달랐다.
틈에도 종류가 있는 걸까?
“아니면 여기서 흔히 말하는 사후세계일지도.”
놀라울 정도로 일이 잘 풀렸다.
마수 안으로 침투했고 아슬아슬한 순간에 밀레나까지 구해냈다.
하지만 인생이란 게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것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구해 내는 데 성공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죽게 된 걸까?
“……누나는 괜찮겠지.”
이곳에 오기 전, 밀레나를 만났다. 나무 하나가 외롭게 서 있는 공간이었다.
바로 앞에 누나가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누나는 나를 보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쥐고 있던 돌멩이를 던졌다.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누나는 이곳에 없다. 현실로 돌아간 것이리라.
“루루! 가자.”
부정적인 생각을 걸음마다 털어냈다. 사고가 안 좋은 쪽으로 치우치면 체력에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웃자, 그리고 해결하자.
이 세계는 거대한 수수께끼였다.
그토록 바라던 모험의 욕구를, 탐험가가 되겠다는 열망을 풀어낼 수 있다.
나무를 타던 루루가 날렵하게 몸을 날려 어깨에 내려앉았다. 단짝과 함께 일직선으로 나아갈 때였다.
바닥에 희미한 그림자가 생겼다.
그림자?
가하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
낯선 세계에서 처음으로 스스로 움직이는 물체를 발견했다.
하늘석.
거대한 동체를 자랑하는 하늘석이 저공비행 하며 숲 저편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현실과의 접점을 찾았다.
가하란은 배낭끈을 움켜쥐며 뛰었다.
진로가 정해졌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하늘석의 궤도를 눈에 새기며 이동했다. 뛰는 걸로는 따라잡을 수 없으니 경로를 봐둬야 했다.
하늘석이 점점 멀어졌다.
가하란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토해내며 허리를 숙였다. 땀방울 뚝 떨어졌다. 이곳에 와서 얼마 만에 달려본 걸까.
어깨 위에서 폴짝거리던 루루가 나무로 올라갔다. 4층 건물보다 높아 보이는 나무.
잎에 가려져 한동안 루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루루가 잎을 헤치며 아래로 뚝 떨어졌다.
양팔을 벌려 루루를 받았다.
“뭐라도 봤어?”
물음에 답하듯 루루가 옷깃을 잡아챘다. 얼른 가자고 보채는 것 같았다.
숨을 고르고 걸음을 뗄 때였다.
빼곡한 나무 너머로 울창한 숲이 아닌 너른 평야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끝에.
“성벽.”
인간의 흔적을 발견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