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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333화 (306/558)

제333화

어지러웠다.

단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몽롱하기도 하고, 몸살을 심하게 앓은 것처럼 몸이 늘어졌다.

무슨 일이 있었지?

기억이 흐릿했다.

뭔가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눈꺼풀을 들어올려야 하는데 기운이 나질 않았다. 이대로 계속 자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누나.”

머리맡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밀레나는 눈을 번쩍 떴다.

“가하란!”

파편화된 기억들이 단숨에 밀려들었다.

마수의 촉수를 붙잡는 순간 블랙아웃.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온통 검은 세상이었다. 그 안에서 기괴한 형태의 ‘어떤 것’을 만났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징그러운 안구도 보았다.

그게 마수의 실체였던 걸까.

밀려드는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잠시, 밀레나는 뒤를 돌아봤다.

“가하란 너 대체…….”

없다.

분명 목소리를 들었는데 가하란이 없었다.

주변을 살폈다. 기이한 곳이었다. 바짝 마른 나무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고,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도 없고 땅도 없다.

어디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몸이 떠 있었다. 아니, 가라앉는 중인가?

“가하란!”

다시금 외쳤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분명 가하란의 목소리였다.

마수에게 붙들려 모든 걸 포기했을 때 그 아이가 나타나 줬다. 형태가 없는 빛덩어리였지만 밀레나는 보는 순간 알아챘다.

가하란이라는 걸.

수많은 가시가 공격해올 때 가하란이 붙잡아 당겼다. 강렬한 부유감과 함께 정신을 잃었고, 눈을 뜨니 이곳이었다.

“가하란?”

밀레나는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어디에 있는 거지?

정체불명의 공간에 있다는 것보다 가하란이 안 보인다는 게 더 걱정됐다.

“모습이 보이지 않아. 어디 있는 거야? 괜찮은 거야?”

허공을 보며 말할 때였다.

밀레나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보이지 않지만 온기가 느껴졌다. 누군가가 강하게 붙잡아주고 있었다.

“가하란, 너야?”

되묻는 순간 목뒤에 둔탁한 충격이 느껴졌다. 고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여긴.”

밀레나는 덮고 있는 얇은 이불을 치웠다. 살짝 열어둔 창틈 사이로 끈적한 여름 바람이 들어왔다.

답답했다. 상의를 벗으려고 팔을 들 때였다.

벌컥 문이 열렸다. 어울리지 않게 작은 진달래꽃을 들고 있는 얀스였다.

“언니?”

“밀레나!”

얀스가 다가왔다. 손에 든 꽃을 놓아버리며.

“너, 너…….”

다가온 얀스가 엉거주춤 두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밀레나는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안는 건 나중에 해줘. 지금 좀 아파.”

“그래, 그럴 것 같더라. 나도 꽉 안아주고 싶은데 참을게. 그보다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음, 괴팍한 언니?”

“아니야. 사랑스럽고 상냥하고 너한테 10금화, 그것도 옛 제국 금화를 빌려준…….”

밀레나는 삐걱거리는 손을 뻗어 얀스의 볼을 쿡 찔렀다.

“그런 적 없어.”

“……다행이다. 다 기억하고 있네. 정말 다행이야.”

얀스가 살며시 안아주었다. 여름날 후끈한 열기가 방안을 감싸고 있었지만, 전해져 오는 체온이 한없이 반갑기만 했다.

“나 얼마나 기절한 거야?”

“열흘.”

“뭐? 열흘?”

믿기지 않았다. 잠깐 정신을 놓았다가 일어난 거 같았는데.

하긴, 열흘이나 자빠져 있었으니 이런 몸 상태가 됐겠지. 밀레나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입을 열었다.

“마수는?”

“마지막 상황은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기억이 뜨문뜨문 떠올라. 어떻게 된 거야?”

“폭발했어.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고. 대장이 빨리 눈치채고 대피령을 내린 덕에…….”

얀스가 말끝을 흐렸다.

“자세한 애긴 나중에 하자. 지금은 쉬어. 푹 쉬고 훌훌 털고 일어나면 그때 얘기해.”

얀스가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다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아저씨들 유서, 몇몇 개는 내가 맡아두고 있었어.”

“그랬구나.”

“그거부터 정리해야 해.”

“그것도 나중에. 지금은 아무 생각 말고 회복하는 거에 집중해.”

다시금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기습을 막아내며 대피 진형을 꾸렸지만, 희생자가 나오고 말았다.

핫슨, 루엘, 디올스. 속마음을 전부 털어놓을 정도로 가깝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르완의 식구였다.

뒷정리는 정성을 다해야 한다.

“가하란은? 많이 안 다쳤지?”

눈을 감기 전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1초, 2초, 3초. 침묵이 길어졌다.

못 들은 걸까?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언니.”

“응?”

“가하란은 괜찮은 거지?”

“아, 어. 괜찮아.”

애매한 웃음, 흔들리는 시선, 애꿎은 무릎을 쓰다듬는 손. 얀스의 몸은 방금 한 말이 거짓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가하란, 정말 괜찮은 거 맞지?”

얀스가 입을 다물었다. 르완의 식구들이 대개 그렇듯, 얀스 역시 수다스러웠다.

하나를 물으면 열을 대답해주는 게 얀스였다.

“언니?”

어렵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냥 잘 있는지, 다쳤으면 어느 정도 다쳤는지 그것만 알려주면 된다.

하지만 얀스는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정적이 불안으로 변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밀레나는 이불을 치우고 지면에 발을 디뎠다.

“아직 움직이면 안 돼. 의술사가 곧 와서…….”

“가하란 어디 있어.”

“밀레나.”

“언니, 내가 이상한 질문하는 건 아니잖아. 그냥 말해줘. 가하란 지금 어디 있어?”

얀스의 입술이 달싹거리다가 나직이 말을 꺼냈다.

“찾지 못했어.”

찾지 못했다?

밀레나는 실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가하란은 분명 내 곁에 있었다.

“마수가 폭발하기 직전에 가하란이 그 옆에 있었어. 대장이 손을 써보려고 했는데…….”

“그만. 재미없어. 그런 농담 진짜 재미없어. 언니, 적당히 해줘.”

밀레나는 허벅지에 힘을 주며 일어섰다. 전신이 뻐근하고 허리는 비명을 질렀지만 걸을 수는 있었다.

“밀레나.”

손을 뻗어 붙잡으려고 하는 얀스를 바라봤다. 아니, 노려봤을지도 모른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병실을 벗어나자마자 복도에 서 있는 엄마와 마주했다. 뒤쪽에서 필렌 경, 하며 중년의 남자가 다가왔다.

복장을 보아하니 의술사 같았다.

“진찰은 이따가 하시죠. 딸애랑 할 얘기가 있어서.”

의술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다.

“가서 누워. 너 아직 돌아다닐 정도로 회복한 거 아니야.”

“가하란 어디 있어?”

“내 말 안 들려? 일단 누우라니까.”

엄마가 다가왔다. 피하려고 했지만 성치 않은 몸이라 꼼짝없이 붙들렸다.

들쳐 업힌 채로 침대로 돌아갔다.

“가하란이 곁에 있었어. 마수 옆에 있던 날 구해줬어.”

“……할 수 있는 걸 해보겠다더니 정말 해냈네.”

“엄마?”

설명을 요구했다. 필렌은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내가 본 것만 말해줄게. 더한 것도 뺀 것도 없는 사실만.”

밀레나는 부드러운 손길에 밀려 베개에 머리를 댔다. 일어서서 듣고 싶었으나 허락할 것 같지 않다.

누운 채로 엄마의 입만 바라봤다.

“어디까지 기억해?”

“마수한테 붙잡혀 있던 순간에 가하란이 나타나서 구해줬어. 내 기억은 거기까지야.”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하란은 마수와 접촉하기 위해 마수 근처로 갔어.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었지. 무얼 하려는지 나조차도 짐작할 수가 없었으니, 그저 기다릴 뿐이었어.”

“접근을 허락했다고? 엄마!”

“포기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어. 하지만 혹시 모를 희망마저 버리고 싶지는 않았어. 너는 내 딸이니까.”

“……말렸어야지. 싸우지도 못하는 그런 애를!”

화내며 소리치다가 입을 다물었다. 상황이 반대였다면 어땠을까?

아마 똑같이 했을 것이다.

“미안.”

밀레나는 자그맣게 말했다.

“……몇 분을 기다려도 변화가 없었어. 난 가하란을 떼어내고 마수를 죽이려고 했지. 그때였어. 마나 분포도가 급격하게 변하고 베타가 경고를 보내온 건.”

밀레나는 손을 움켜쥐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몸에 있는 모든 수분이 증발하는 기분이었다.

“가하란을 데리고 후퇴하려 했어. 대응할 시간은 충분했으니까. 그런데…… 가하란이 시야에서 사라졌어.”

“사라지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까도 말했지? 더하는 거, 빼는 거 없이 본 사실만 말하겠다고. 베타의 감각기관에도 걸리지 않았어. 말 그대로 그 짧은 순간에 증발해버린 거야.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

“폭발에 휘말린 건…….”

“폭발하던 순간 근처에 가하란은 없었어.”

* * *

밀레나는 베타를 올려다봤다. 팔다리 모듈이 모두 제거된 채 몸통만 남아 있었다. 여기저기 찢겨나간 외장갑이 그날의 치열함을 대변해줬다.

“오래된 친구라 부품 수급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얀스가 시동키를 던졌다.

“난 일 보고 있을게. 끝나면 와.”

시동키를 손목에 감고 체임버 안으로 들어갔다.

“베타, 안녕.”

-밀레나. 이제 괜찮은 거야?

“응. 많이 좋아졌어.”

-18일 만인가.

“그쯤 됐겠지.”

스툴에 엉덩이를 걸치면서 말했다.

“기록을 좀 확인하려고.”

-필렌에게 얘기는 들었어. 영상화 기술이 엉성해서 선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확인하겠어?

“응. 당시 상황을 봐야겠어.”

인지 통합을 마치고 감각 확장 7단계로 들어갔다. 정전기가 온몸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따가웠다.

-리와인드는 이제 막 적용된 기술이라 너한테도 충격이 갈 거야.

“상관없어.”

-그렇다면.

몸 전체가 수직 낙하했다. 아찔한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떴을 때, 눈앞에 펼쳐진 건 18일 전 참혹한 풍경이었다.

베타의 과거 시점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마수 곁에 앉아 있는 가하란의 모습이 보였다. 흐릿하지만 저기 있는 건 분명 가하란이었다.

소리가 밀려들었다.

마나 분포도가 변하고 경고가 어지럽게 일어난 뒤 엄마가 외쳤다.

피하라고.

베타의 시야가 살짝 흔들렸다. 찰나에 불과했다.

그리고 가하란이 사라졌다.

몸이 부상한다. 과거에 붙들려 있던 감각이 현실로 돌아왔다. 밀레나는 치밀어 오는 신물을 억지로 참아냈다.

-괜찮아?

“응, 버틸만 해.”

-원하는 건 찾았어?

“찾았어.”

체임버 밖으로 나왔다. 시동키를 풀고 몇 걸음 걷다가 이내 바닥에 엎어졌다.

“밀레나!”

얀스가 뛰어와 몸을 부축해줬다.

“봤어. 엄마 말대로 가하란이 사라져 버렸어. 폭발에 휘말린 것도 아니야. 그냥…… 없어져 버렸어.”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다정하게 말하는 얀스였지만, 눈빛은 탁했다. 덧없는 희망의 말.

밀레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현장에 가봐야겠어.”

* * *

끽, 끽!

가하란은 날뛰는 루루를 붙잡아 품에 넣었다.

“얌전히 있어.”

바싹 마른 나뭇가지를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며칠이 지났지?

아니, 시간이 가기는 한 걸까?

눈앞에 보이는 사과 한 알을 따서 입에 가져다 댔다. 과즙은 달콤하고 청량감이 가득했다.

몇 입 먹고 바닥에 툭 버렸다.

“루루, 여긴 대체 어딜까?”

가하란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회색빛으로 빛나는 태양이 멀거니 떠 있다.

밤이 찾아오지 않는 기묘한 세상.

“우리 말고 살아 있는 게 있긴 한 걸까?”

가하란은 지독하게 조용한 숲을 걸으며 혼잣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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