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2화
-작은 인간, 그래, 밀레나는 내 안에 살아 있다. 목소리까지 들려줬으니 믿을지 말지는 너희들의 몫이다.
널브러진 마수의 육체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가하란은 품에 안겨 있는 밀레나를 내려다보았다. 마수가 회복하고 있다, 누나가 마수의 입을 빌려 전한 말이었다.
내버려 두면 마수가 몸을 추스르고 반격해 올 것이다. 그렇다고 죽인다면?
가하란은 고개를 내저었다.
“필렌 님! 누나는 살아 있어요.”
-그래, 분명 그 애의 목소리였어. 살려달라고 애원했다면 속임수라 여겼겠지만, 아무래도 내 딸은 저 안에 있는 것 같아.
베타에서 흘러나온 필렌의 음성은 여전히 냉철했다. 멈춰선 검이 언제 다시 움직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구할 수 있는 거죠?”
-잘 생각해라. 네가 지금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극도로 위험한 선택이라는 걸.
하지만 품 안에 안겨 있는 누나는 아직 따뜻했다. 생명의 증거인 온기가 남아 있는 이상 포기할 수 없었다.
“말이 통하는 마수에요. 거래한다면…….”
-저게 회복하면 도시는 위협받게 될 거다.
베타의 검이 움직였다. 스멀스멀 본체 쪽으로 빨려 들어가던 촉수 다발이 잘게 끊어졌다.
“필렌 님!”
크게 외치며 상체를 내밀 때였다. 엔엔이 붙잡았다.
“밀레나가 살아 있다고 해도 다시 이 몸으로 돌아올 수 있나요?”
“그건…….”
“혼란스러울 때는 가장 명확한 것만 선택해야 해요. 힘들어도 그게 정답이고요. 필렌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죠.”
엔엔의 눈이 베타를 향했다.
강철 거인을 눈에 담았다. 전투로 인해 엉망이 된 외장갑. 차디찬 질감의 쇳덩어리가 왜 그렇게 슬퍼 보일까.
체임버 안에서 필렌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어떤 심정으로 딸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걸까.
어쭙잖게 참견하려던 자신이 한없이 비참해졌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너희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안다. 믿음. 구태의연한 말이라는 걸 너희를 통해서 배웠다. 나는 교섭을 원했으며 너희를 처음 만났을 때 대화로 끝내길 바랐다. 하지만 결과는 이 참상이지.
마수가 말했다.
이지적인 어투와 논리정연한 말.
마수는 이성을 갖춘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대화를 원한다. 교섭을 바란다.
베타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먼저 대화를 제안했다고?
-그렇다. 하지만 인간은 응하지 않았다. 내 영토를 침범하고 나의 친구들을 죽였으며 끝내 날 공격했다. 그러니 이 반격은 정당한 것이다.
-그 또한 네 주장이지만, 왠지 네 말을 믿고 싶어지네.
-그렇다면 교섭의 여지가 있는 건가?
베타가 손도끼를 왼손에 들었다. 컴컴한 대기 속에서 잠깐 빛나던 도끼가 마수의 몸체를 찍었다.
-아니. 우리도 선을 넘었고 너도 선을 넘은 거야. 신호탄을 띄웠는데 아직도 다른 용병단에서 소식이 없어. 모두 처리하고 여기가 마지막이었던 거지?
-그렇다. 너희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운이 좋았지. 아니, 운이 나쁜 건가?
-너는 증명해 버렸어. 네가 위험하다는 걸. 물론 여태 만나온 마수 중에 네가 가장 벅찬 상대는 아니야. 지금도 이렇게 잡아냈고.
퍼억, 마수의 살점이 갈리며 체액이 튀었다. 베타의 얼굴을 타고 마수의 누런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다음에 만나면 넌 전혀 다른 것이 되어 있겠지. 동물들이 몸으로 체득해서 반응하는 것과 달리, 넌 머리를 쓰니까. 상상하고 배우니까. 돌이킬 수 없는 참사가 네 손에서 시작될지도 모르지.
가하란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필렌은 도끼로 마수를 찍고 있지만, 저 안에 들어 있는 건 밀레나였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은 벌어져서 안 된다.
베타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제안하지. 내 딸을 먼저 돌려줘.
-차가운 갑옷 안에 가려져 있지만, 난 너라는 인간을 이해한 것 같다. 넌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날 지워버릴 작정이군.
-그건 모르는 일이야. 네가 먼저 선행을 베푼다면, 마음을 바꿀지도.
-아니. 너는 그 거병이란 강철 거인만큼이나 단단한 인간이다. 차라리 첫 대면에 널 만났더라면 좀 더 수월했겠어. 하지만…… 네 말대로 선을 넘은 이상 돌이킬 수 없겠군.
마수의 촉수가 뻗어져 나왔다.
베타의 얼굴 모듈이 꿰뚫기 직전, 왼손이 촉수를 낚아챘다. 거병 손아귀 안에서 꿈틀대던 촉수가 이내 콰득, 짓이겨졌다.
-후손을 남긴다는 게 어떤 것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알려고 하지 마.
-이 안에 있는 건 네 피를 이어받은 인간이다. 없어져도 괜찮은 건가?
-심리전을 벌이는 거라면 아주 훌륭해. 난 네 뜻대로 흥분했고, 화가 났으며, 당장에라도 울면서 빌고 싶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아. 그렇게 하기엔 내 결정으로 희생된 자들이 너무 많으니까. 딸은 소중하지만 올바른 판단을 뒤집을 만한 근거는 못 돼.
-잔인하군. 그래, 이 단어의 쓰임새를 이제는 알겠어.
대화가 끊겼다.
끝을 알리는 침묵이 도래했다.
가하란은 거병을, 마수를, 그리고 밀레나를 차례대로 바라봤다.
정말 이대로 끝인가?
손쓸 방법도 없이, 필렌이 말한 올바른 판단을 위해 누나를 희생해야 하는 건가?
가하란은 밀레나의 손을 붙잡았다. 오래전, 안원에서 물살에 휩쓸렸을 때 이 손이 구해줬다.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는 손이었다. 언제가 보답하고 싶었다.
그러니 이런 이별은 인정할 수 없었다.
“엔엔 님. 누나 좀 부탁드릴게요.”
“무슨 짓을 하려고요.”
손목부터 붙잡는 엔엔이었다.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전해졌다.
“잠깐이면 돼요. 잠깐이면.”
“뭘 할 작정이죠? 그 눈빛, 아주 위험해요.”
가하란은 엔엔을 바라봤다.
“전 엔엔 님이 좋아요. 하지만 지금 절 방해한다면, 전 평생 엔엔 님을 미워할지도 몰라요.”
“미움을 산 대가로 가하란의 목숨을 지킬 수 있다면 난 후회하지 않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목숨을 걸러 가는 게 아니에요.”
가하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목을 움켜쥐고 있는 엔엔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누나가 절 잡아줬어요. 그러니 이번에는 제 차례에요.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닿을 거예요.”
가하란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현실과 안원.
‘층’이라 구별되는 다른 세상을 몇 번이고 오갔다. 얼마 전에는 샬롯도 함께 갔었다.
모든 게 이 손과 연관이 있었다.
아니, 손이 아니라 눈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진위를 파악하지 못한 비밀스러운 눈. 눈에서 뻗어 나온 ‘직시의 가지’는 마나의 뿌리와 닮아 있었다.
뿌리는 모든 것의 요람이자 모든 것의 무덤. 시작과 끝. 어쩌면 층과 층을 오가는 열쇠가 눈일지도 모른다.
지금 누나는 마수 안에 있었다.
이곳과 다른 세계.
그렇다면 간섭해서 데려올 수 있지 않을까?
아니, 해야 한다. 해내야 한다. 만약이란 말은 지우고 성공이란 단어에 오롯이 집중해야 할 때였다.
브라인의 심상세계 안을 헤맸을 때도, 눈은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었다.
이번에도 도와줄 것이다.
천천히 걸음을 떼 마수 곁으로 걸어갔다. 누런 체액이 흩뿌려져 있어 역한 냄새가 날 줄 알았는데, 비릿한 향만 살짝 감돌 뿐이었다.
-가하란.
베타의 발이 앞을 막았다.
가하란은 고개를 들었다.
“해볼게요.”
-뭘?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요. 당장 죽일 건 아니잖아요. 시간이 있잖아요. 그 시간을 저한테 주세요.”
움찔대는 촉수 위로 도끼가 떨어졌다. 돌가루가 튀어 얼굴에 닿았다.
-5분. 그 이상은 안 돼. 아니, 그전에라도 이놈이 회복할 낌새가 보인다면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거다.
필렌의 목소리는 겨울날 계곡물보다 더 차가웠다. 하지만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애달팠다.
자식의 목숨을 직접 거두어야 하는 부모의 마음을 그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마수의 몸통이 눈앞에 있었다. 경련하는 살집 사이로 거미줄처럼 엉킨 핏줄이 보였다.
호흡을 고르고 무릎을 꿇었다.
-뭘 하려는 거지?
마수가 물었다.
“여행.”
-여행?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안원으로 떨어질 때마다 느꼈던 기이한 부유감을 상기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두 손을 뻗었다.
마수의 피부에 손이 닿았다.
그리고.
“누나.”
작게 목소리를 냈다.
* * *
“끝났네, 끝났어. 다 끝이야. 빌어먹을.”
유단은 입을 다문 채 서 있는 밀레나를 바라봤다.
“축하해. 엄마 손에 죽게 된 걸.”
“엄마는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야.”
“그래, 잘났어. 더럽게 고귀하네. 딸애 목숨보다 다수의 안전이야? 인류애 납셨네!”
뒤로 누워버렸다. 더는 손쓸 방도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박탈감에 멀거니 위만 바라볼 때였다.
“응?”
어둡기만 한 공간을 비집고 정체 모를 것이 들어오고 있었다.
거병의 검인가? 기어이 손을 쓴 건가?
낙담하고 있을 때였다. 빛무리가 일어났다. 희고 붉고 푸른빛이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보자마자 불쾌감이 들었다. 생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마수를 툭툭 건드렸지만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건지, 아니면 죽은 건지.
유단은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을 헤매던 빛무리가 밀레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움직였다.
다가오는 빛을 유심히 살필 때였다. 형태 없는 저 빛이 어쩐지 익숙했다.
유단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 이 새끼.”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왜 빛으로 변해 둥둥 떠다니는지 알 바 아니었다.
중요한 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 놈이 앞에 있다는 거였다.
“가하란!”
검은 공간이 출렁거렸다. 심상세계과 동화된 마수의 내면. 마수가 통제권을 놓아버린 지금 안쪽 세계는 내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대한 손을 만들어냈다.
손으로 빛무리를 짓이겼다.
발버둥 치는 밀레나는 어둠으로 묶어버렸다.
그 누구도 여기서 산 채로 못 나간다. 뒈질 때는 같이 뒈져야지!
손으로 빛덩이를 압박할 때였다.
바닥에 푸른 실선이 생겼다. 언제 생겨난 것일까? 눈치챘을 때는 푸른 실선이 밀레나 손목에 닿아 있었다.
“누나!”
이 갈리는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유단은 손아귀를 빠져나와 돌진하는 빛을 향해 몸을 날렸다.
“헛짓거리하지 말고 제발 얌전히 뒈져!”
팔이 늘어난다. 마수의 촉수처럼 길게, 길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전능감에 젖었다.
죽일 수 있다.
저 두 놈을 이 손으로!
사방으로 뻗은 가시가 빛과 밀레나를 향해 쏟아질 때였다.
끽, 괴이한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얼굴을 할퀴었다.
유단은 눈을 찌푸리며 정면을 보았다.
작은 원숭이 한 마리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찰나였지만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뻗어나가던 손이 멈칫했다. 조롱하듯 멀어져 가는 원숭이를 향해 분노를 터트릴 때였다.
빛이 터져 나왔다.
어둠을 지워버리는 밝은 빛이었다.
유단은 고개를 돌렸다가 앞을 바라봤다.
가시에 꿰뚫려 있어야 할 밀레나가 보이지 않았다. 원숭이도, 빌어먹을 가하란도!
“어디 있어!”
주변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였다. 엎어져 있던 눈알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준비가 끝났다.
“뭐?”
-많은 걸 잃겠지만 그래도 살아남을 순 있겠지. 유단, 난 너한테서 집념을 배웠다. 그래. 일단은 살고 볼 일이지.
그 순간 드넓게 퍼져 있던 검은 세계가 수축했다.
* * *
-피해!
엔엔은 필렌의 외침을 들으며 밀레나의 몸을 감쌌다.
널브러져 있던 마수의 몸이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안 좋은 징조였다.
“가하란?”
엔엔은 가하란이 있던 곳을 바라봤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분명 마수 곁에 있었다.
그런데 사라졌다.
어디로?
생각을 이어 나갈 때였다.
콰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부풀어 오른 마수가 터져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