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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331화 (304/558)

제331화

-행동을 저지당한다는 건 무척이나 답답하군.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마수였다.

“지금 그딴 소리 할 때가 아니라고! 빌어먹을! 몸뚱이를 뺏긴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저기서 저년이 왜 튀어나와!”

유단은 마수의 눈을 통해 바깥세상을 보며 소리쳤다.

거병 왼쪽 어깨에 박혀 있는 마크.

저건 르완 용병단의 마크였다.

그리고 신들린 듯한 거병 조종술.

은퇴해도 한참 전에 은퇴했어야 할 구식 거병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안 봐도 뻔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늑대의 하울링을 쏟아내며 시야 바깥쪽에서 짓쳐 들어오는 옛 공방주.

공방에 처박혀 있는 노인네인 줄 알았는데, 신체술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군인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나이를 먹어도 칼랑족이라는 건가.

필렌과 엔엔.

만나선 안 될 최악의 조합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유단은 고개를 들었다.

검은 하늘에 실금이 생겼다. 이곳은 마수의 내면이자, 자신의 심상세계였다.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고! 정신 차리고 뭐라도 해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단지 저들의 행동력이 예상을 웃돌고 있을 뿐이다.

“설마 지는 건 아니겠지? 어?”

-패배. 아직은 확실치 않다. 나 역시 학습 중이다. 당장은 불리하지만 대치가 길어지면…….

마수가 7미터에 달하는 신체를 공중으로 띄웠다.

-손을 이런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군.

마수가 수십 가닥의 촉수를 지면으로 뿌렸다. 강철도 꿰뚫는 공격이 비처럼 쏟아졌다.

밑에 있는 거병과 엔엔이 부리나케 뒤로 도망쳤다.

승기를 가져왔다.

유단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 넌 이런 데서 쓰러질 놈이 아니야. 저것들을 다 죽이고 얼른 자리를 뜨자. 신호탄이 올라갔으니 인간들이 몰려올 거야.”

-기분이 오락가락하는군. 좀 침착했으면 좋겠는데.

“저것들을 찢어발겨. 그러면 얌전히 입 다물어줄 테니까.”

거병의 검이 곧 부서질 것이다. 마수의 껍질을 짓이기고 들어올 저 검만 없애면 위험 요소는 사라지는 것이다.

엔엔의 발톱은 무섭긴 하지만, 살가죽을 가르고 들어와 치명상을 입히진 못할 테니까.

“앞에 있는 것들보다 뒤에 저 부상자들을 노려.”

-왜지?

“아까도 말했지만 그게 효과적이니까. 전장에서 못 벗어나게 해. 거병의 주의력을 빼앗아! 빈틈은 그렇게 만드는 거야.”

뻗어나간 촉수가 거병의 팔을 휘감았다. 그림자처럼 바닥으로 깔린 다른 촉수들은 부상자들을 노렸다.

심리적 우위를 점하는 파상공격.

응전하던 거병이 촉수를 끊어내고 뒤로 빠졌다.

-이런 게 전술이겠군.

“하나하나 배워둬.”

상황이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유단은 입꼬리가 찢어지도록 미소를 지었다. 거병의 배터리도 한계에 달했을 것이다. 엔엔도 마나를 무한정 끌어다 쓸 수 없을 것이다.

체력 싸움으로 끌고 간다면, 마수의 승리였다. 삐걱거리긴 했지만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뒤통수가 근질거렸다. 마수 역시 무언가를 느꼈는지 안구를 돌렸다.

거병이 뛰어오고 있었다.

분명 탑승하려던 놈을 죽였는데?

“온다!”

인간이었다면 후면에서 달려오는 거병을 대비할 수 없으나, 마수는 달랐다.

새로운 촉수를 뽑아내 놈에게 던졌다. 좌우 이동에 한계가 있는 거병은 그대로 촉수에 꿰뚫렸다.

체임버를 관통하면 좋겠지만, 격돌하는 순간 거병이 몸을 틀었다.

엉성한 움직임.

보면 알 수 있다.

안에 타고 있는 건 베테랑 기사가 아니었다.

“저건 신경 쓰지 말고 앞에 두 놈부터…….”

쿵, 소리와 함께 시야가 살짝 들렸다. 몸체가 기우뚱거린 것이다.

무식하게 달려오던 거병이 촉수를 끌어안은 채 기동을 멈췄다. 닻을 내린 배처럼 지면에 발을 박고 우뚝 서버린 것이다.

-곤란하군.

당했다.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거였나.

“손을 회수해!”

-아쉽게도 그럴 수 없다.

거병의 체임버가 열리고 있었다.

상판에 가득 박아놓은 촉수들이 엉키며 거병에 붙들려 버렸다.

미친놈이!

전장 한가운데서 체임버 덮개를 여는 건 자살보다 못한 짓이었다.

정신 나간 거병 기사의 상판대기를 확인한 순간, 유단은 괴성을 질렀다.

“저 개새끼가!”

찰나에 불과했다.

마수의 손이 엉키고 몸체가 잠시 주춤거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적 거병한테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끊어!”

외피를 떼어내듯 신체를 절단할 것을 요구했지만 늦은 감이 있었다.

-온다.

마수의 경고와 함께, 반토막 난 거병의 검이 몸체로 떨어졌다.

질긴 피부가 갈라졌다. 유단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상상 못할 격통이 밀려들었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심상세계가 가닥가닥 끊겨 사라진다.

이대로 끝인가?

이렇게 허무하게?

둥둥 떠다니던 안구가 풀썩 바닥에 떨어졌다. 정신을 잃은 건지, 아니면 죽어버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로키에게 몸을 빼앗기고 겨우 반격의 실마리를 찾았는데, 또다시 다 잃어야 한다고?

“누구 마음대로.”

거병의 검이 몸을 가르고 들어왔다. 해체되는 게 느껴진다.

방법은? 살아남을 방법은 없는 건가?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고 고통마저 희미해져 갈 때였다. 유단은 보았다. 저 멀리 거병에서 기어 나오는 가하란을, 가하란에게 뛰어가는 밀레나를.

유단은 마수의 손 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필렌이 눈치 못 채도록 체액 사이로 손을 빼냈다.

실뱀처럼 얇은 손이 재빠르게 밀레나를 향해 갔다.

가하란은 이용 가치가 없었다. 지금 노려야 할 건 밀레나였다.

밀레나를 바로 공격하는 건 위험했다. 신체술을 사용해 반응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벽을 이용해야 했다.

가하란을 먼저 공격했다. 등 뒤에서 찌르는 촉수. 가하란이라면 몰라도 밀레나는 분명 반응할 것이다.

바짝 붙어있으니 검을 꺼내기도 힘들 테지. 그렇다면!

예상대로였다.

밀레나가 가하란의 몸을 치워내고 촉수를 손바닥으로 내치려 했다.

유단은 온 힘을 쏟아 부었다. 내지른 촉수가 손바닥을 뚫고 나아갔다.

손목을 휘감고 팔을 타고 올라가 목에 닿았다.

“저년을 잡아와!”

유단은 널브러진 안구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인간의 심상세계를 끄집어내오는 건 마수만이 할 수 있었다.

조용하다.

대답이 없었다.

제기랄, 마지막까지 재수가 없네.

모든 걸 포기하려 할 때였다.

안구가 발작하듯 떨렸다.

-일단 가져오지.

주변의 어둠이 일그러졌다. 이물질이 몸 안으로 침투하는 게 느껴졌다.

유단은 밝은 미소를 짓고 앞을 바라봤다. 분노에 찬 밀레나가 눈앞에 있었다.

“잘 왔어, 지옥 밑바닥에.”

* * *

밀레나의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실이 잘린 마리오네트처럼 덧없이.

“누나!”

가하란은 손을 뻗어 밀레나의 머리를 받았다. 고개를 살며시 돌려 얼굴을 확인했다.

표정이 없었다. 살짝 벌어진 입 사이로 옅은 숨소리만 들렸다.

“……누나.”

떨리는 손으로 살며시 흔들었다. 하지만 밀레나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인질.

널브러진 촉수에서 소리가 났다.

인질?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누나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

-공격을 멈춰라. 네 딸을 데리고 있다.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가하란은 저 멀리 있는 거병을 바라봤다.

필렌이 동작을 멈췄다. 도축한 돼지처럼 갈라진 마수가 꿈틀대는 게 보였다.

죽은 게 아니었다. 저 상태로도 생명을 붙잡고 있었다. 지독하다는 생각도 잠시, 가하란은 쓰러진 밀레나를 업었다.

손에 힘이 안 들어가 밀레나의 몸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흘러내리는 밀레나의 몸을 루루가 붙잡았다.

루루도 이 상황을 이해한 것 같았다.

“가하란!”

엔엔이 외쳤다. 가하란은 바닥에 밀레나를 눕혀두고 베타를 올려다봤다.

-의식은?

필렌의 목소리는 무서우리만치 침착했다.

“없어요.”

마수 몸체에서 뻗어 나온 촉수 하나가 공격을 앞둔 뱀처럼 몸을 치들었다.

-어린 인간은 지금 내 안에 있다. 그러니 교섭을 신청한다.

“뭘 하면 돼? 뭘 하면 누나를 돌려줄 거지?”

가하란이 외쳤다. 마수가 대답하기 직전이었다.

베타가 팔을 움직였다.

반쪽뿐인 검이 마수 몸체에 닿았다.

-교섭은 없어.

가하란은 멍한 눈으로 베타를 올려다봤다.

“피, 필렌 님. 지금 뭐라고…….”

-인질의 생사가 명확한 상태. 조약 위반의 위험을 인지한 상태. 두 개가 보장돼야 인질 교환은 성립된다. 하지만 넌 그 무엇도 증명할 수 없어.

무섭다.

장난기 많은 필렌의 음성이 아니었다. 지독하게 차분한 목소리. 이게 전장에서 선 기사의 마음가짐인가?

침묵하던 마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안에 있는 인간이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설득하고 싶지만 어려울 것 같군.

* * *

유단은 밀레나의 목을 움켜쥐었다. 인간의 형태를 잃은 몸이라 손 모양이 괴상했지만, 목을 조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빨리 말해! 내가 안에 있으니 대화를 해야 한다고…….”

바깥에 소리를 전하면 된다. 한마디만 하면 교섭의 여지가 생긴다.

하지만 밀레나는 비릿한 미소만 지을 뿐이다.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 여자, 여기서 죽을 작정이다. 빌미를 남길 생각이 없는 것이다.

“지랄 맞은 년. 네 몸은 바깥에 있어! 살려달라고 한마디만 하면 돌려보내 줄 수도 있다고!”

밀레나의 눈이 꿈틀댔다. 눈빛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믿지?

유단은 움켜쥐던 목에서 손을 뗐다.

제대로 미쳤다. 눈앞에 있는 여자도, 이 여자의 엄마도.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아니, 이겨야 한다는 집념이 더 크다.

“스콜라의 개는 죽을 때 신음도 안 흘린다더니, 모녀가 쌍으로 미쳤어.”

깨달았다.

밀레나는 죽는 그 순간까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얕은 비명조차 안으로 삼킬 것이다.

유단은 발치에 엎어져 있는 안구를 툭 찼다.

“멍청아, 우린 끝났어. 교섭이고 뭐고 없어. 저년은 그냥 뒈질 작정이야.”

-아쉽군. 조금만 더 버티면 됐는데.

“뭐?”

-수복하고 있다. 외피를 떼어냈을 때처럼 본체의 주요 기관을 분리한 채 치료 중이다. 힘의 대부분을 잃겠지만 살아남을 순 있지.

“정말이야?”

-그래. 이대로 대치가 조금만 더 이어진다면.

그때였다.

망한 년이 입을 크게 벌렸다.

“지금 당장 마수를 죽여! 회복하고 있어! 시간을 줘서는 안 돼!”

빌어먹을!

유단이 달려들어 밀레나의 입을 막으려 할 때였다. 마수의 안구가 살며시 떠올랐다.

하얀 눈알이 어쩐지 웃는 것 같았다.

-말했군. 유단, 이게 네가 말한 전술, 그리고 심리전이라는 거겠지?

유단은 멍하니 마수를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크게 벌려 웃었다.

“그래! 이 똘똘한 새끼!”

그리고는 밀레나를 응시했다.

“진즉에 말할 것이지.”

* * *

가하란은 떨리는 눈으로 마수를 바라봤다.

조금 전 목소리.

그건 분명 누나의 음성이었다.

그리고.

마수의 몸체로 향하던 베타의 검이 잠시 멈췄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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