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0화
쇠 갈리는 소리가 뒤쪽에서 났다.
베타의 왼팔이 촉수를 빗겨 치고 있었다. 노란 불티가 맹렬하게 피어올랐다.
기우뚱거리는 베타 아래쪽에서 엔엔이 튀어 올랐다. 엔엔의 발톱이 촉수를 가르며 나아가 본체에 닿기 직전, 마수가 지면 아래로 몸을 숨겼다.
용병단을 집어삼킨 괴물.
그런 괴물을 상대로 필렌과 엔엔이 분투하고 있지만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했다.
가하란은 엎어진 거병 안쪽을 들여다봤다.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다른 용병단의 거병처럼 오토마타가 꿰뚫렸다면 손쓸 방법조차 없었을 것이다.
서둘러야 해.
가하란은 주변을 살폈다. 온기를 내뿜는 주검들이 눈에 밟혔다.
분명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시선을 옮길 때였다. 잘린 팔이 눈에 들어왔다. 피에 젖은 흙 위에 덩그러니 놓인 팔.
손목에 시동키가 감겨 있었다.
가하란은 팔 앞에 주저앉았다.
“죄송해요.”
손목에 감긴 시동키를 풀어냈다. 피에 젖은 시동키를 두르고 체임버에 올라탔다.
“탈로스는 카린. 오토매틱 매뉴얼은…….”
혼란한 머릿속을 다잡기 위해 정리된 것들을 말로 꺼냈다.
조종간을 붙잡고 정신을 집중했다.
-탑승자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비상 상황이야. 시동키의 주인은 사망했어.”
-절차에 따라 시각 정보를 가져오겠습니다.
위쪽에서 구동음이 들렸다. 거병 머리가 주변을 살피는 것 같았다.
-쿤스의 사망을 확인했습니다. 매번 먼저 죽을 일 없다고 했는데, 이렇게 끝났군요.
“제어권을 넘겨줄 수 있겠어?”
-상위권자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A1 필렌, A2 얀스, A3 하우스.
“그럴 상황이 아니야.”
-기동할 수 없습니다. 적에게 강탈당할 위험이 있으니 프로토콜에 따라…….
교전 규범에 관한 기본 설명이 이어졌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하란은 고개를 바깥으로 뺐다. 상처를 입은 밀레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주변에 모여든 용병들이 엄호하며 대피하려 했지만, 마수가 놓아주지 않았다.
베타와 엔엔이 막아서며 도주로를 확보할 때마다 마수가 길목을 막아섰다.
이 자리에서 모두 죽이겠다는 강력한 집념이 느껴졌다.
난전 속으로 뛰어 들어가 얀스나 하우스를 데리고 이곳으로 다시 올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가는 도중에 죽게 될 것이다.
마수가 눈치 못 챘을 때,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직접 해결해야 했다.
옷 안쪽에서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루루를 잊고 있었다. 피 냄새에 몸이 경직됐는지 옷가지를 붙든 채 꼼짝도 안 했다.
“내 옆에 있으면 위험해. 그러니 숲으로…….”
떼어내려 했지만 루루는 손가락으로 옷을 꽉 움켜쥔 채 떨어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내버려 두기로 했다.
“제어권을 넘겨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상위권자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미안하지만 규범에 따를 수 없어.”
가하란은 감각기를 꺼내 손에 꼈다. 시동키를 감싸 쥐고 시그니처를 불러냈다.
복잡하게 엉킨 선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제작자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해 빠르게 구조를 살폈다.
-양식 변환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프로토콜 락이 시행되면 유사정령은 물리적인 잠금 상태에 진입합니다. 해제 시…….
“알고 있어.”
구조 파악이 끝났다.
가하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시그니처를 불러낸 상태로 정보의 세계로 진입했다.
보다 명료해진 선들이 눈앞에 쌓여갔다. 손가락을 살며시 움직여 체임버 상단에 연결된 마력선을 붙잡았다.
“제어권 양도를 승인해줘.”
-불가능합니다.
붙잡고 있는 마력선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가하란은 또 다른 선을 쥐었다.
같은 질문의 반복.
그렇게 다섯 번을 되풀이했을 때였다.
손아귀에 들어온 선이 밝은색을 냈다. 가하란은 안구에 힘을 줬다.
선으로 구성된 정보가 한순간 확장하며 익숙한 마력선 회로로 변했다.
단자를 찾았으니 남은 건 변환뿐이다. 회로 안을 분주히 움직이는 신호들이 눈에 보였다.
순간 송곳이 망막을 뚫고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날카로운 고통이었다. 하지만 고통은 익숙했다. 태연하게 웃을 순 없지만 정신이 흐트러질 정도는 아니다.
“제어권 양도를 승인해줘.”
-불가합니다.
오토마타의 대답에 대응하는 회로층이 보였다.
가하란은 오른손을 활짝 폈다. 시그니처 다발을 손아귀 가득 움켜쥐고 단숨에 뜯어냈다.
동시에 눈을 감았다. 쓰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보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후 짧게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교차되는 선을 확인한 후 작게 되물었다.
“제어권 양도 승인해줘.”
-탑승자 인식을 시작합니다.
잠시 후.
-인지 통합 완료. 반가워요. 제가 당신을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가하란.”
-A1 가하란. 인식 완료했습니다.
손목이 따끔했다. 시동키에 잠금이 풀리며 은은한 마나 파장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체임버 덮개가 닫혔다.
“기체 상태는?”
-LA-D2 모듈의 결손이 확인됩니다.
“왼손은 파손되지 않았어. 회로 단절인가?”
-자체 검증이 불가합니다.
트레일러도, 서포터팀도 없다. 써전의 도움도 받을 수 없으니 당장 수리는 불가능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왼팔은 못 쓰지만 두 다리와 오른팔이 남았으니까.
“감각 확장 3단계. 마나 씰은 70. 웨이브겔은 사용한 범위 내에서 최대로.”
-모든 옵션을 수행할 시 예상 기동 시간은 23분입니다.
“그 정도면 괜찮아.”
현란한 조종 같은 건 꿈도 꾸지 않는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충격완화 장치에 모든 자원을 쏟아붓고 마수를 향해 돌진하는 것이다.
거병을 방패로 이용한다.
마수의 움직임을 한 번만 억제하면 된다.
그다음은 두 사람에게 맡길 것이다.
거병의 시야를 공유했다. 감각 장치에 이상이 있는지 소리가 뭉개져서 들어왔다.
거슬리지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똑바로 보이기만 한다면 들이박는 건 할 수 있으니까.
“서포터를 부탁할게. 저놈을 붙잡을 거야.”
-시각 정보로 판별해본바, 체임버가 훼손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가하란, 그래도 괜찮나요?
“마나 씰을 믿어볼게.”
-안전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무서운 경고였다.
가하란은 숨을 골랐다. 트레드밀에서 출력 점검할 때처럼 무식하게 뛰기만 해서는 안 된다.
지형을 확인한 후 중심을 잡고 방향을 설정한 뒤 달려야 한다.
천천히 거병을 일으켜 세웠다.
감각 확장 3단계라 촉각이 선명하게 전해져 왔다.
비대해진 몸이 감각을 어지럽혔다. 역시 거병 기사들은 대단했다. 감각확장 3단계만으로도 인지능력에 혼선이 생기는데, 5단계 이상에서 조종을 해내다니.
-수행 능력이 모자랍니다. 단계 조정을 권합니다.
“2단계 밑으로 내리면 대응하기 힘들어.”
-알겠습니다. 최대한 지원하겠습니다.
카가각!
베타의 반쪽뿐인 테브론 검이 불꽃을 토해내고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필렌은 부상자를 보호하며 전투 중이라 기동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숨을 들이켰다. 어깨가 들썩였다. 시점이 가시가 돋아난 마수에게 집중됐다.
후우, 후우, 후우.
“지금.”
-기동합니다.
실린더가 맹렬한 소리를 냈다. 액상 근육이 만들어낸 마나 고리가 탈로스를 움직이게 했다.
모듈이 맞물리며 생성해낸 구동력이 지면과 거병을 떼어냈다.
쿵, 쿵!
웨이브겔을 타고 충격이 전해졌다. 트레드밀을 달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진동이었다.
시야각이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하지만 가하란은 마수를 놓치지 않았다.
순간, 거병의 시야 안쪽으로 검은 촉수가 날아들었다.
가하란은 몸을 왼쪽으로 틀었다. 신경 회로에 반응한 거병도 같은 움직임을 수행해냈다.
하지만 촉수는 예상보다 빨랐다.
카가가강!
가하란은 힐긋 머리 위를 바라봤다. 체임버 안쪽으로 가느다란 촉수가 비집고 들어왔다.
-진로 변경을 추천합니다.
“아니! 이대로 달려!”
마수의 신경을 빼앗았다는 건, 필렌과 엔엔에게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다.
‘뛰어난 전사들은 결코 틈을 놓치지 않는다.’ 타챠의 말을 떠올리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것처럼 베타가 뛰어오르고 있었다. 엔엔 역시 측면으로 돌아가 몸을 날렸다.
그때였다.
거병 몸체에 틀어박혔던 촉수가 뽑히고 있었다. 촉수를 회수하고 회피에 전념하려는 것 같았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체임버 덮개 열어!”
-시행합니다.
콰드득!
덮개가 열리며 전면부에 꽂혔던 마수의 촉수가 외장갑에 붙들렸다.
시야 공유가 풀리며 10m 정도 떨어져 있는 마수가 육안에 들어왔다.
가하란은 몸을 뒤로 뉘며 다리에 제동을 걸었다. 날뛰는 촉수들은 오른팔로 휘감았다.
“최대한 버텨!”
이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세밀한 조정은 애초에 불가능하니, 마수의 팔을 붙잡고 늘어져야 했다.
길게 늘어진 촉수들이 파르르 떨었다. 체임버를 관통한 촉수 한 가닥이 방향을 꺾는 게 보였다.
머리로 다가온다.
가하란은 이를 악물고 눈앞 30cm 앞에서 멈춰선 촉수를 바라봤다.
마나 씰을 뚫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웨이브겔은 덮개를 열면서 흩어졌지만, 씰은 남아 있었다.
-배터리 소모가 예상치를 웃돕니다.
“모든 운동기관 작동 중지! 씰을 유지하는데 전력을 다해줘!”
실린더가 멈췄다. 배관을 따라 질주하던 액상 근육도 잠잠해졌다.
이대로만 가면!
매섭게 진동하던 촉수가 축 늘어졌다. 팽팽하게 유지되던 장력이 한순간 사라지며 거병이 쿵, 하고 넘어갔다.
등부터 전해진 둔중한 충격에 가하란은 격하게 기침해야 했다.
거병이 나자빠지기 직전, 가하란은 보았다. 마수가 내뽑은 촉수를 스스로 절단하는 걸.
도마뱀처럼 꼬리를 잘라낸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아주 잠깐, 그 잠깐의 시간을 버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가하란은 몸을 감싼 안전벨트를 풀었다. 손잡이를 붙잡고 체임버 밖으로 몸을 뺐다.
“역시.”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안도의 한숨이 나온 건 그다음이었다.
베타의 검이 마수의 몸체를 쪼갰다. 체액을 쏟아낸 마수가 지면에 쓰러졌다.
거병보다 더 큰 몸뚱이였으나 큰 소음이 일지는 않았다. 마치 깃털이 땅에 떨어진 것처럼 조용했다.
뒤늦게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감각 확장 3단계의 후유증이었다.
훈련도 제대로 안 받고 무리를 했으니 반작용이 오는 건 당연했다.
속이 뒤집혔다. 체임버를 기어 올라가 간신히 땅으로 내려왔다. 지면에 발을 딛는 순간 속에 든 걸 게워냈다.
한참을 땅을 보며 신물을 토해낼 때였다. 익숙한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누나였다.
“……너 죽을 뻔했어.”
밀레나의 말보다 다른 게 신경 쓰였다. 가하란은 밀레나의 다리를 바라봤다.
허벅지를 감싼 붕대에서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다리, 괜찮은 거야?”
“지금 이게 눈에 들어와? 너 미친 짓 한 거야. 그거 아냐고!”
“미친 것처럼 보이지만 나름 계산한 거야. 정말이야.”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인상을 잔뜩 쓰며 윽박지를 것 같던 누나가 얕은 한숨과 함께 몸을 낮췄다.
눈높이가 같아졌다.
붉은 눈동자 밑바닥에 얕은 물줄기가 생기고 있었다.
“몸은?”
“속만 좀 뒤집혔을 뿐이야. 다른 곳은 괜찮아.”
“거병은 어떻게 움직인 거야?”
“부탁하니까 들어주더라고.”
“퍽이나 그랬겠네.”
물끄러미 바라보던 누나가 손을 내밀 때였다.
누나의 표정이 바뀌었다.
왜, 라는 물음이 입 밖으로 나가기도 전이었다.
몸이 붕 떠올랐다. 누나가 잡아 던진 것이었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뒤집힌 시야에 단검을 뽑아 든 누나가 보였다.
그리고.
늘어진 촉수 한 가닥이 날아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