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9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어려운 개념도 아니다. 근데 왜 인간은 이해 못 하는 거지?
“이해 못 하는 게 아니라 너무나도 잘 알아서 뺏는 거라니까. 네 작은 친구들이 물어온 이야기를 듣고도 여전히 생각만 할 거야?”
-생각을 그만두면 남는 게 뭐지?
“행동.”
유단은 둥둥 떠다니는 눈을 바라봤다.
“지난 며칠간 우리가 준비해온 게 있잖아. 그걸 실행하면 돼.”
-합의점을 찾을지도 모른다. 인간들은 대화로써 답을 찾아내니까.
“네 눈앞에 있는 게 그 인간이야. 날 보고도 모르겠어? 우린 배타성의 결집체야. 나와 닮지 않은 것,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건 다 제거해 버린다고. 그게 우리의 방식이라는 걸 아직도 몰라?”
-네가 인간 전체를 대표하는 건 아니니까.
“그러면 네 작은 친구들이 들려준 얘기는? 널 짓뭉개고 이 땅을 빼앗을 거란 얘기는 왜 무시하는데?”
-그 또한 소수의 의견이니까. 네가 말하는 ‘도시’의 인간들은 내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 나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아.
“맞아. 그럴지도 모르지. 다수는 착해. 아니, 다수는 머저리야. 침묵하는 다수를 움직이는 건 네가 본 소수야.”
-수적으로 우세한 자들의 목소리가 공동체를 대표하는 게 아닌가? 집단이란 그런 걸 텐데.
유단은 고개를 저었다.
“넌 너무 이성적으로만 세상을 봐. 왜 그렇게 아름답게 세상을 보지? 인간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순해 빠진 생물이 아니야. 대체 넌 뭘 보고 인간을 신용하는 건데?”
-인간을 신용하는 게 아니라 논리를 믿는 거다.
“그렇다면 그 논리를 당장 버리는 게 좋을 거야. 곧 널 사냥하러 인간들이 올 테니까. 아니지, 이미 왔네.”
짜릿한 부유감이 몸을 휘감았다.
닫았던 눈을 뜨니 숲이 내려다보였다. 마수와 감각을 공유하고 난 후부터 마수가 보는 것들을 볼 수 있게 됐다.
저 멀리, 자리를 잡은 거병이 보였다. 더럽게 많았다. 싹을 제대로 밟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근처에는 어린 군인들이 있었다. 아니, 군인이 아니라 마법사들인가?
눈을 감았다 떴다. 숲의 풍경이 사라지고 눈알 하나만 둥둥 떠 있는 내부로 돌아왔다.
“거병이 왔어. 마법사들도 대동했고. 숫자가 장난이 아니야.”
-저 이질적인 물건이 거병인가?
“그래. 인류가 고안해 낸 전략 병기. 너란 존재를 잘게 다져서 지워버릴 군대지.”
-느껴진다. 저 단단한 것 내부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힘이.
“정면에서 상대할 수 있겠어?”
-힘들겠군. 연구가 필요해.
“여기서 맞닥뜨리면 연구고 뭐고 없어. 끝이야, 끝. 그러니 이번에는 내 말대로 해. 그걸 위해서 준비해온 거잖아?”
안구가 잠시 사라졌다.
어둠 속에 홀로 남은 유단은 손가락을 질겅질겅 씹었다. 그러다 문득 씹고 있는 게 손가락이 아니라 귀라는 걸 깨달았다.
“이젠 뭐 인간의 형태라고도 볼 수 없겠네.”
심상세계만 남은 존재.
육체를 잃은 인간.
웃음이 연이어 나왔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너는 왜 날 돕는 거지?
다시 나타난 안구가 말했다.
“네가 죽으면 나도 끝이니까. 그리고 널 도와주면 언젠가 내 부탁도 하나 들어주지 않겠어?”
-몸을 되찾고 싶은 건가?
“당연하지! 그 개새끼를 끌어내고 내 몸을 되찾아야 해. 이대론 억울해서 못 죽어. 만약 죽게 된다면, 그 새끼는 끌고 가야지.”
-격렬한 변화. 이런 게 악의라는 거겠지. 나는 인간의 악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군.
“밑바닥까지 떨어진 인간은 다 이렇게 되는 법이야. 그러니 잔말 말고 내가 알려준 대로 해.”
-좋다. 저들은 내 영토를 침범했고, 내 경고를 무시했다. 땅에서 사는 존재로서 저들에게 알려 줘야겠지.
“그래. 제대로 알려줘. 더불어 사는 세상이 좋았다는 걸 말이야.”
유단은 활짝 웃으며 눈알에 손을 박아 넣었다.
“내가 허락할 테니 내 심상세계를 마음껏 활용해. 이걸 마법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잖아?”
세계가 넓어져 간다.
마수의 껍데기가 커지고 있었다.
-내구성은 장담할 수 없다.
“괜찮아.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이점이 있어. 인간은 우리를 모른다는 것과 우리는 인간을 잘 안다는 것.”
몸집을 키우고 이동을 시작했다.
껍데기뿐이라 거병에게 공격당하면 확장낭이 터진 복어처럼 쭈글쭈글해질 것이다.
비대한 자아가 발현된 볼품없는 능력. 자조적인 웃음이 나오는 능력이지만, 경계심을 높이는데 이만한 것이 없었다.
“본진이 따라붙을 거야. 저들은 널 살려둘 생각이 없으니까.”
살점 뜯기는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안구가 부르르 떨다가 말했다.
-외피를 떼어냈다. 생각보다 소모가 적어.
“괜찮네.”
순조로웠다.
유단은 발밑을 내려다봤다. 갈라진 균열. 지면에 난 거대한 상처가 우리를 승리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경고를 날려. 널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줘.”
-그 과정에서 네 육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
“뭐, 그땐 다른 몸에 넣어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내가 들어주지 않으면?
“넌 들어줄 거야. 난 알아. 너는 우리보다 순해 빠졌거든. 정 싫으면 평생 같이 살던가. 나도 여기가 익숙해지기 시작했어. 괴물한테는 괴물의 몸이 어울릴지도 모르지.”
본체가 균열 사이로 뛰어들었다.
수백 개의 촉수가 벽면을 두드리자마자 길이 생겼다. 인간은 오갈 수 없는, 오직 마수를 위한 쾌적한 길이었다.
“외벽 바깥에 떨거지부터 처리하고, 그 다음 도시야.”
느껴진다.
위쪽에 인간들이 모여 있었다.
거대한 쭉정이가 도시에서 멀어지는 걸 보며 안심하고 있을 인간들이.
-말로 해서 안 된다면 다른 수단으로 경고해야겠지.
지면을 뚫고 나갔다.
눈앞에 보이는 건 느긋하게 쉬고 있는 인간들과 두 대의 거병.
“거병 주변에 인간들부터 쓸어버려! 그리고 신호탄을 든 놈을 처리하면 돼.”
* * *
가하란은 루루를 안은 채 뒤로 이동했다. 끔찍한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자, 잡아! 신호탄을……!”
“끄아아아!”
몸이 경직됐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려 했는데, 밀레나가 붙들었다.
“최대한 떨어져! 어서!”
등을 힘차게 민 누나가 뒤로 돌아섰다. 가하란은 잠깐만, 이라고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피가 뿌려지고 있었다.
검은 대기를 수놓은 붉은 물방울.
6m 정도의 검은 덩어리가 기다란 촉수를 휘두를 때마다 비명이 솟구쳐 올랐다.
“가하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엔엔이 어깨를 붙잡았다.
“다친 곳은요?”
“전 괜찮아요.”
“일단 물러나요. 길을 따라가면 외벽이 나올 테니, 경비대가 있는 곳까지 달려요.”
“엔엔 님은요?”
엔엔은 대답 대신 발톱을 세웠다.
평소에 보던 엔엔이 아니었다. 무구하기만 하던 눈동자가 세로로 갈렸다. 흘러나오는 기운은 사냥꾼의 그것이었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본능이 떨어지라고 속삭였다.
“어서 가요!”
엔엔이 마수를 향해 뛰어들었다. 가하란은 뒷걸음질 치다가 우뚝 멈춰 섰다.
망막 가득 검은 꼬챙이가 맺혔다.
꼬챙이 끝자락에 걸린 건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음식이 맛있다며 칭찬해주던 칼 씨, 카드는 도박이 아니라며 부추기던 할렌 씨, 다른 도시 얘기를 재미나게 풀어주던 울겐 씨.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초점을 잃은 눈과 마주쳤다.
그 눈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물러날 수가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다가 한순간 조용해졌다. 가하란은 숲 왼쪽을 바라봤다.
피가 흩뿌려진 거병 한 기가 바닥에 나자빠져 있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숨을 거뒀다.
-대열을 갖춰! 침착하게 촉수를 쳐내!
베타가 촉수를 거둬내고 있었다. 날 선 필렌의 목소리가 전장을 뒤흔들었다.
가하란은 정신을 차렸다. 쓰러진 거병을 눈여겨보다가 이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외벽이 아닌 다른 용병단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따가운 숨을 들이켜며 쉼 없이 달렸다.
그리고 본 것은.
“……아.”
흉하게 뚫려 있는 바닥과 피로 물든 대지였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없었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지만 의외로 금방 가라앉았다. 슬퍼할 시간도 비탄에 빠질 시간도 없었다.
주변을 살폈다.
쓰러져 있는 거병이 보였다.
거병으로 다가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체임버 덮개가 뜯겨 나갔다. 체임버 상단에 있을 오토마타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 있었다.
완전한 기능 정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거병은 하부 모듈의 연결부위가 파손돼 있었다.
기동성을 제약하는 가장 효과적인 공격이었다. 취약한 곳을 알고 있는 건가?
어떻게?
가하란은 발밑을 바라봤다. 뿌연 지방을 밟고 있었다. 누군가의 살점이다.
손가락 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가팔라지는 숨을 다잡고 몸을 돌렸다.
당했다.
전부 당했다.
마수는 주변 일대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신호탄을 쏘지 못하도록 신속한 공격이 이루어졌다.
놈은 밀집한 인간을 상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완벽하게 이해한 것 같았다.
다른 곳은?
가하란은 왼쪽을 바라봤다.
그곳에 있을 용병단은 무사한 걸까?
불길함이 더해져 갔다.
차근차근 하나씩 정리 중이라면 왼편에 위치한 용병단은 전멸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군부대가 따라간 거대한 마수는 뭐였지?
“눈속임?”
지독하게 단순한 전략.
하지만 실로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압도적인 크기를 선보였기에 본대가 따라붙어야 했다. 상대가 인간이었다면 후방 타격을 대비했겠지만, 마수인 만큼 대비가 부실했다.
아니, 부실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베테랑 용병단을 배치해 뒀으니까. 거기에 거병까지 대동했고.
할 만큼 한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마수의 전투 능력이 예상을 아득히 넘었다는 것.
가하란은 몸을 돌렸다.
원군을 부르러 가는 건 쓸데없는 짓이었다. 다른 용병단은 전멸했다고 봐야 하니까.
외벽까지 달려가서 도시에 알리는 건?
이 또한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외벽 경비대를 제외한 둔의 군사력은 마수를 토벌하기 위해 도시 바깥으로 나온 상태니까.
본대를 쫓아가는 것도 힘들다.
몇 시간 동안 이동했을 본대를 지금부터 따라가는 건 무리가 있다.
제대로 찔렸다.
땅 밑으로 이동하는 마수라니.
그때였다.
신호탄이 하늘로 솟구쳤다.
노란빛이 강렬한 쏟아지다가 사라졌다.
본대가 저걸 봤을까?
도시에서는 관측됐을 것이다.
가하란은 밀레나가 있는 곳으로 다시 뛰었다. 도망치라는 말이 귀에 맴돌았지만, 그 말을 따를 순 없었다.
-부상자 뒤로 빼고 멀쩡한 놈들은 최대한 버텨!
베타가 마수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엔엔은 측면에서 발톱을 세우며 달려들었다.
마수가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며 몸을 말았다.
가시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던 거병의 검이 반으로 부러지고, 엔엔도 상처를 입고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불리했다.
개인의 기예로 버티고 있지만, 사태는 최악을 향해 치닫는 중이었다.
가하란은 상상했다.
반으로 쪼개지는 거병을.
온몸이 꿰뚫리는 엔엔을.
분주히 뛰며 부상자를 엄호하는 밀레나가 눈에 들어왔다.
누나의 몸은 재빨랐지만, 촉수는 그보다 더 신속했다.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게 전부.
기절한 용병을 끌고 가던 밀레나가 바닥을 굴렀다.
가하란은 보았다. 얇은 촉수가 누나의 허벅지를 벤 걸. 얕은 상처지만 그것만으로도 위험했다.
주변 소음이 한순간 멎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자빠진 거병 앞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