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28화 (301/558)

제328화

“그래?”

얀스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난 모르겠는데.”

“아주 약한 진동이었어요. 아마도 저거 때문이겠죠.”

가하란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균열을 가리켰다. 폭이 2m 정도 되는 균열이었다.

“어딜 가나 말썽이네. 전에 있던 도시에서는 균열이 갑자기 닫혀서 인근에 있던 건물 축이 기울어졌어.”

“2년 전쯤만 해도 둔도 난리가 아니었어요. 지금은 잠잠해졌지만요.”

가하란은 균열로 걸어갔다. 지하를 향해 끝없이 파고 들어간 구멍. 균열 밑바닥에 자리를 잡았을 마나의 뿌리를 보고 싶었지만, 육안으로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떠올리기 싫은 과거지만…… 한때는 이 균열이 무덤을 대신했지.”

얀스가 말했다.

가하란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리에 넘쳐나는 시체. 살아남은 사람들은 썩어가는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균열을 택했다.

도시 정비가 어느 정도 진척을 보이고 난 후에는 공동묘지를 설립해 제대로 안치했지만, 그라운드 제로 직후에는 구멍 안으로 밀어 넣기 바빴다.

“내가 괜한 얘길 했네.”

얀스가 가하란의 어깨를 붙들고 균열 곁을 떠났다.

“그러고 보니 너 우리가 머무는 여관에 몇 번 왔었다더라?”

“네.”

“내가 정비고에 처박혀 있어서 한 번을 못 봤네.”

얀스가 어깨에 팔을 둘렀다. 텁텁한 기름 냄새가 풍겨왔는데, 향수처럼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둘이 사귀는 거야?”

얀스가 멀리 있는 밀레나를 힐긋 보았다.

“네?”

“모른 척하기는. 빨리 말해봐.”

“……말로 꺼낸 적은 없어요.”

“간 보는 거야? 응? 응?”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가하란은 귀 뒤쪽을 매만졌다.

“그런 건 아니에요.”

“밀레나도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던데. 살짝 아리송하긴 하지만 널 제외하면 가까이 두는 남자가 없어. 아! 우리 아저씨들은 제외. 저 사람들은 남자가 아니니까.”

얀스가 둥글게 모여 카드를 돌리는 용병들을 가리켰다. 몇몇 용병들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신경 쓰지 말고 놀 거 노세요. 우린 젊음을 불태우는 중이니까요.”

“얀스, 너도 이쪽이 어울려.”

“무슨 말씀이세요. 굳이 구분하자면 전 아직 풋풋하다고요.”

“풋풋은 무슨. 익을 대로 익어서 쉰내가…….”

얀스가 머리핀 대신 꽂고 있던 드라이버를 뽑아 들었다. 용병들이 히죽 웃으면서 카드에 집중했다.

“밀레나하고는 언제부터 친해진 거야?”

“오래전에요. 그라운드 제로 이전에 둔에서 만났어요.”

“그때라면…… 스콜라 생도로 둔에 갔을 때겠네. 잠깐만, 너 혹시 비일을 아니?”

비일?

기억을 더듬으니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알아요, 비일 형. 덴스 교수님 연구실에서 봤어요. 거병 써전, 맞죠?”

“맞아. 이제야 민 교수님하고 친분이 있는 것도 이해가 되네. 당시에 다 만난 거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얀스였다.

“재미있는 형이었어요. 비일 형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모르겠어. 아주 위험한 사람들한테 끌려간 것까지는 아는데…… 뭐, 잘 살고 있겠지. 쉽게 죽을 애는 아니니까.”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으나 눈빛이 슬퍼 보였다.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나도 그렇게 믿어. 지금도 어딘가에서 사고를 치고 있을 거야. 걔는 고쳐지지 않는 문제아거든. 나이를 먹어도 철들지 않았을 테고.”

익살스러운 말에 웃음이 나왔다.

“체임버에 들어가 볼래?”

얀스가 베타를 올려다봤다.

“그래도 돼요?”

“물론이지. 내가 정비 담당이니까.”

올라가 보라며 손짓하는 얀스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거병의 무릎을 붙잡고 올라가 활짝 열린 체임버 덮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균형을 잡고 발을 굴러 체임버 안쪽으로 들어갔다.

“잘 타네.”

“제법 익숙하거든요.”

가하란은 의자부터 살폈다. 스툴 형태에 높이도 낮았다. 앉아서 조종하려면 불편해 보였다.

“의자가 낮지? 대장은 조종할 때 반쯤 서서 해. 그래서 체임버 천장도 좀 높고.”

듣고 보니 위쪽으로 공간이 남았다.

“서서 조종하면 위험하지 않나요? 몸을 고정시켜 놓아야 웨이브겔의 효과를 제대로 받을 텐데요.”

“내 말이.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안전벨트도 없이 거병을 조종한다? 미친 거지. 근데 대장은 그래도 돼. 아니, 그래야만 해.”

뒤따라 올라온 얀스가 시동키를 왼손에 찼다.

“이건 정비 때 쓰는 서브용. 베타, 일어나봐.”

-눈은 아까 전부터 뜨고 있었어.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잠이 뭔지도 모르면서. 아무튼 잠깐 기동할 거야. 얘한테 대장이 모는 기체가 어떤 느낌인지, 알려주고 싶거든.”

-내부가 더러워지는 건 싫은데. 저번에도 토하고 난리였단 말이야.

토?

가하란은 살짝 불안한 눈으로 얀스를 바라봤다. 얀스는 의도적으로 시선을 무시하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참을성 좋은 애니까.”

-네 말은 믿지 않아. 필렌은?

“허락받았으니까 걱정하지 마.”

얀스가 체임버 안쪽으로 몸을 집어넣고 왼쪽에 회로판을 만지작거렸다.

희미하게 흘러나온 마나 파장에 가하란은 눈을 깜빡였다.

“좌우 운동을 반복할 거야. 격하지는 않지만 베타가 어떤 애인지 체험하기엔 모자람이 없지.”

“근데 멋대로 움직여도 괜찮은 건가요?”

“베타에 관한 건 일임받았어. 그리고 대장도 너한테 이것저것 알려주라고 했고. 엔엔 님한테도 말해뒀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

시원시원한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꼼꼼하게 챙기는 성격이었다.

“겔 농도가 상대적으로 낮아. 감싸는 게 겨우 느껴질 정도지.”

얀스가 체임버 밖으로 몸을 뺐다.

“조종사의 역량이 기체 밸런싱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직접 느껴봐. 공부가 될 거야.”

체임버가 천천히 닫혔다.

-감각 확장은 하지 않을 거야. 네가 받아들일 수 없을 테니까.

“아, 네.”

-내부 충격 테스트한다 생각하고 진행할게. 힘들면 바로 말해. 토하지 말고.

어색한 미소를 지은 후 이를 꽉 물었다.

신경 연결 없이 웨이브겔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형태 변환된 마나가 체임버 안을 꽉 채웠다.

“정말 농도가 낮네요.”

-몸을 자유롭게 움직여도 저항감이 없을 정도지.

“탑승자를 보호할 수 있을까요?”

-외부에서 전해지는 충격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지만, 맞으면 아플 거야. 그럼 자세 잡아.

자세 잡으란 말에 양쪽에 놓인 손잡이를 붙잡았다.

-머리 조심하고, 어깨 조심하고. 몸이 튀어 오를 수도 있으니까 아래 있는 고정틀에 발 끼워.

“이, 이게 안전벨트 대신인가요?”

-그렇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온몸을 감싸는 벨트를 해도 흔들리는 거병 안에서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데, 고작 발에 끼우는 밴드 하나에 전신을 맡겨야 한다니.

-심박수가 올라가는 것 같네. 긴장하지 마. 조금 아플 뿐이니까.

“네?”

질문의 여운이 체임버 안으로 퍼져나갈 때였다.

-움직일게. 진짜로 토하지 마.

겔이 쏠리는 느낌이 났다.

왼쪽으로 기울던 기체가 천천히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얀스가 말한 좌우 운동을 시작한 것 같았다.

기이한 감각이었다. 거병과 신경 연결이 안 된 채로 캄캄한 체임버 안에 있다니.

쿵, 동작이 살짝 격해졌다. 몸이 기우뚱했으나 금방 균형을 잡았다.

버틸 만한데,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칠 때였다.

-시작할게.

몸이 급격하게 오른쪽으로 쓸렸다. 겔도 함께 쏠리며 몸을 누르는 느낌이 났다.

컥, 소리가 입 밖으로 절로 나왔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쿵!

관성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몸이 왼쪽으로 밀쳐졌다. 무릎, 허리, 목. 굵직한 관절들이 제각각 따로 움직였다.

“우웁!”

내장이 배 안에서 춤추고 있었다.

* * *

“타란다고 탄 너도 대단하다. 나도 베타는 그냥 쳐다만 보는데.”

밀레나는 반듯하게 누워 있는 가하란을 바라봤다. 가슴만 겨우 움직여 숨을 내뿜고 있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소감이 어때?”

“필렌 님은 말이 안 되는 분이야.”

가하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 어지러운지 머리를 짚은 채 길게 숨을 내뿜는다.

“살살 뛴 거야. 베타가 제대로 날뛰면 무릎이 뽑혀 나가는 느낌이니까.”

“정말로?”

“그렇다니까. 야생의 준마를 길들이지도 않은 채 탔다고 생각해봐. 끔찍하지?”

밀레나는 멀리 있는 베타를 바라봤다. 거병 앞에 얀스와 엄마가 서 있었다.

“저 애를 다룰 수 있는 건 엄마뿐이야.”

“얀스 누나가 타보면 공부가 될 거라고 했는데, 깨달은 게 하나 있긴 해.”

“뭔데?”

“안전벨트는 단단하게 매는 게 여러모로 좋다.”

가하란이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누웠다. 밀레나는 머리맡에 앉았다.

“속 아직도 울렁거려?”

“속은 괜찮아. 근데 뇌가 계속 흔들리는 거 같아. 이명도 들리고.”

“좀 더 누워 있어. 나아질 테니까.”

가하란의 어깨를 토닥인 후 서쪽을 바라봤다. 볼록 솟아 있던 마수가 자취를 감쳤다.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 것이다.

“아무래도 계속 도망치는 거 같아. 똑똑한 마수라고 하더니, 진짜인가 보네.”

“우린 몇 시까지 여기에 있는 거야?”

“따로 지시가 내려질 때까지. 군부에서 사람이 올 거야.”

사방이 조용했다.

매들의 울음도 멀어졌고, 다수의 거병들이 내는 육중한 소음도 사라졌다.

전선이 아득히 멀어진 것이다.

지금쯤 전황은 어떻게 됐을까?

마수를 에워싸고 공격 중일까?

아니면 여전히 추격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을까?

아저씨들은 순번을 정해 잠들기 시작했다. 불까지 지펴놓은 걸 보면 엄마는 전투가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모양이다.

기지개를 켜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새벽 1시. 달이 좀 더 밝아진 느낌이었다.

끽.

멀거니 하늘을 보다가 급히 시선을 내렸다. 익숙한 소리였다. 가하란도 들었는지 몸을 일으키고 컴컴한 숲길을 바라봤다.

야트막한 초목을 뚫고 작은 원숭이가 튀어나왔다. 얼굴에 있는 푸른 점. 루루였다.

루루는 단숨에 가하란 품으로 뛰어들었다. 털 이곳저곳에 젖은 풀이 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꼬리 쪽에 상처도 있었다.

“너 어떻게…….”

가하란이 얼떨떨한 눈으로 루루를 바라봤다. 루루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가하란을 보며 낮게 울 뿐이었다.

“널 찾아온 것 같은데?”

밀레나는 원숭이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창문 걸쇠에 포크를 꽂아놨는데, 그걸 뽑고 탈출했나 봐.”

“영리하네. 근데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지? 원숭이도 후각이 발달했나?”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가하란의 상의 안쪽으로 파고 들어간 루루는 고개만 빠끔 내민 채 주변을 둘러봤다.

“일단 데리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려나?”

“상관없을 거야. 다들 쉬고 있고.”

그때였다.

발밑에서 진동이 일어났다.

“오늘 자주 이러네. 균열에 무슨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겠지?”

“엔엔 님이 말하길 안정화 단계에 이르러서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했어.”

“그래?”

그렇다면 안심. 걱정을 접고 루루와 눈동자를 마주칠 때였다.

파사삭, 균열 쪽 지대가 잘게 부서지는 게 보였다.

밀레나는 눈을 얇게 떴다. 또다시 진동과 함께 균열 일대의 지면이 깎여져 나갔다.

사람들도 하나둘씩 일어서고 있었다. 손에 무기를 쥔 채.

밀레나도 검집에 손을 댔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전원 기상!”

엄마의 외침이 귀를 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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