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27화 (300/558)

제327화

필렌은 뒤떨어져 걷고 있는 밀레나와 가하란을 바라봤다. 딸이 진지한 얼굴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데, 주의사항을 설명하는 것 같았다.

“애들은 참 신기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코흘리개였는데, 잠깐 눈 뗐다가 보면 부쩍 커 있고.”

“인간은 금방금방 크니까요.”

옆에 선 엔엔이 대답해줬다.

옛 공방주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회백색 털이며 순둥해 보이는 얼굴 하며.

필렌은 손을 뻗어 엔엔의 볼살을 만지작거렸다.

“촉감이 똑같네요. 음, 기분이 좋아져.”

“이래서 당신이 둔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도 찾아가지 않았어요.”

엔엔이 손을 떼어냈다. 신경질 부리는 귀여운 늑대를 보고 있으니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들었어요. 블루아이를 잃어버렸다죠?”

엔엔의 눈매가 얇아졌다. 필렌은 코끝을 매만지며 시선을 피했다.

“자기 발로 걸어서 가출했어요. 잃어버린 게 아니라.”

“그게 가능하다고 봐요?”

“불가능하죠. 마나응측봉은 제거된 상태였고, 오토마타 역시 몇 겹의 제어 장치로 기동이 불가능한 상태였으니까요. 하지만 움직였어요.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믿어야죠.”

“블루아이는 병기 이전에 하나의 작품이었어요. 다시 볼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네요.”

필렌은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소리 마세요. 지금도 어디선가 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거병의 묵직한 걸음 소리와 함께 ‘베타’가 옆에 멈춰 섰다. 체임버 덮개가 열리고 얀스가 고개를 내밀었다.

“대장, 정비 끝냈어요. 타보실래요?”

“됐어. 네가 마무리했다면 내가 타보지 않아도 괜찮겠지. 가서 확인해 볼게.”

“네. 그럼 현장까지 제가 옮길게요. 아, 무장은 2번으로 해놨어요. 테브론 검 하나에 투척용 도끼 세 개.”

거병 허벅지에 달린 무기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덮개를 닫은 베타가 왼쪽으로 빠져 도열한 거병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

“그쪽 기술공인가요?”

엔엔이 물었다.

“네. 성도에 있던 애인데 제가 잡아 왔어요. 빼앗기기 싫을 정도로 손재주가 좋거든요.”

“외장갑 때문에 확실치는 않지만, 로커의 ‘파인2’ 같네요.”

“제대로 보셨어요. 소형화 초기에 나온 물건이라 거친 감이 있지만, 다루는 재미가 좋아요.”

“기동성은 좋지만 균형성이 엉망이라 혹평을 받고 사장된 라인인데, 그걸 재밌게 다루려면 대체 무슨 짓을 해야 할까요?”

“다들 엄살이 심해요. 제대로 만져보면 못 써먹을 정도는 아닌데.”

엔엔이 고개를 내저었다.

“부품 수급은요? 탈로스에 피로가 쌓이면 부분적으로 교체해야 할 텐데, 제작소가 손을 뗐잖아요.”

“아는 클랜에 청사진을 맡기고 필요할 때마다 요청하고 있어요. 그 대가로 양품의 마수 뼈를 대주고 있죠.”

“용케도 청사진을 받아왔네요. 폐기된 기체라고 한들 제작도는 가치가 있을 텐데.”

“달라고 하니까 주던데요? 사람들이 워낙 착해요.”

약간의 협박과 회유가 섞여 있었지만 어쨌든 합법적으로 받아낸 것이었다.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다!

문제 삼는다면 다시 면담하면 될 일이고.

눈이 점점 더 가늘어지는 엔엔을 바라보다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볼살을 매만졌다.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엔엔도 포기했는지 얼굴을 가만히 내주었다.

“아이들은 안전하겠죠?”

“제 딸이야 몸 쓰는데 재능이 있으니 상관없고, 가하란은 지켜봐야겠죠.”

“인간족의 풍습에 따라 가하란을 성인 취급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제 눈에는 아직도 어린아이 같아요.”

“다들 그렇죠. 그래도 언제까지 감싸고 있을 수는 없어요. 그럴 수 있는 세상도 아니고.”

외벽을 벗어났다.

숲으로 진입하니 매들이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빛무리가 서쪽 먼 곳에서 일어나 대기 중으로 흩어졌다.

희미한 마나 파장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마법인 거 같네요.”

“신식 마법인 걸 보니 학회에서 지원을 나왔나 보네요.”

필렌은 깍지 낀 손을 위로 쭉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런 것도 구분 가능해요? 전 파장만 느껴져서.”

“미묘하게 달라요. 필렌도 집중하면 구별할 수 있을 거예요. 마나에 민감한 쪽이니.”

신식 마법. 어린 마법사들이 기묘한 행동과 이상한 외침으로 마법을 쓰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발동에 시간이 걸리는 구식 마법과는 다르게 신속하고 정확했다.

“마법이 주류가 되면 거병을 쓰는 것도 힘들어지겠어요.”

“무거운 기체의 한계죠. 만약 지면을 무르게 만드는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면, 마법사 한 명이 거병 부대를 막아낼 수 있을 거예요.”

“이야,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네요. 근데 신식 마법은 위력이 별로라 부대를 막는 건 힘들지 않을까요?”

“그것도 연구 중이라고 들었어요. 마나 파형을 공유해 둘 이상의 마법사가 하나의 마법을 쓴다고 하네요.”

엔엔은 찝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법은 심상세계의 발현인데, 그걸 억지로 동기화하면 무슨 문제가 발생할지.”

“마법을 잘 모르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위험해 보이네요.”

이야기하던 도중 필렌의 눈에 기이한 것이 걸려들었다.

처음에는 밤하늘인 줄 알았으나, 흩뿌려진 백색 섬광이 그것의 실체를 드러나게 했다.

필렌은 거병의 발을 밟고 올라가 기체 위에 섰다. 체임버가 열리며 얀스가 목소리를 냈다.

“대장, 무슨 일이에요?”

“저기. 우리가 상대해야 할지도 모르는 게 보이네.”

“……무지막지하게 큰데요?”

야트막한 동산 같은 마수가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었다.

“도시에서 멀어지는 거 같지?”

“네. 도망치는 걸까요?”

“모르지. 열세인 걸 깨닫고 물러나는 건지, 아니면 끌어들이는 건지.”

필렌은 신체술을 끌어올렸다. 확장된 감각에 온갖 정보들이 걸려들었다.

귀를 어지럽히는 소리를 걸러내고, 안력을 높였다. 우거진 수풀 사이로 이동 중인 거병이 보였다.

백여 대가 넘는 거병이 사방으로 흩어져 마수를 압박하고 있었다.

“노친네는 끝까지 싸울 생각인가 봐. 하긴, 여기서 놓아주면 뒤가 찜찜하긴 해.”

“노친네요?”

“디온 사령관.”

거병에서 내려왔다. 대기 중인 용병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자! 우리도 할 일 합시다.”

용병단들이 지정된 위치로 이동했다.

“얘기 좀 합시다.”

용병단 단장들이 몰려왔다. 필렌은 자리를 이동했다.

“일단 오긴 왔는데, 영 찜찜하네.”

단장 중 하나가 말했다.

그라운드 제로 이후 중앙 군부는 해체, 소속됐던 군인들은 도시방위군로 편입되거나 용병 생활을 시작했다.

여기 모인 단장들도 전장에서 깨나 구른 노병들. 전장의 냄새만 맡아도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으리라.

“다들 확인했겠지만 예상한 것보다 커.”

필렌은 마수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저런 게 밀고 들어오면 골치 아플 거야.”

“하지만 확인해 본 결과 도시에서 멀어지고 있던데요?”

꽤 젊은 단장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멀어지고 있긴 해. 그걸 둔 군부가 포위 중이고.”

“우리는 뒷짐 지고 구경하다가 돈이나 받아 가면 될 일인가?”

작전회의실에서 마주했던 절벽늑대 단장, 킹우단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기왕 나온 김에 뭐라도 하나 잡아가면 좋겠는데.”

“배터리값은 지원해 주겠지?”

“내용에 없었으니 각자 분담해야겠지.”

“뭐야! 그러면 손해잖아. 기사님,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끼리 숲에 들어가는 건 어때? 작은 뼈라도 건져야 비용 충당하지.”

필렌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나 지켜. 알 만한 사람이 더 그러네.”

필렌은 각 단장을 바라봤다.

“사전에 얘기한 대로 지정된 위치만 사수해. 이벤트가 생기면 바로 신호 주고. 인근 용병단이 곧바로 커버, 인원이 부족하면 바로 지원 갈 테니까.”

“예예, 기사님이 말하시는데 말 잘 들어야죠.”

절벽늑대 단장이 슬쩍 다가왔다.

“그나저나 저번에 했던 얘기 기억해? 내 사랑 말이야.”

“거름으로 만들기 전에 얼굴 치워. 전에도 말했지만 내 남편보다 못난 남자는 만나지 않아.”

“……남자의 순정에 포기란 없지.”

다른 단장들이 크게 웃었다.

필렌도 따라 웃은 후 말했다.

“마수가 물러나는 걸 보면 오늘 전투는 없을 거야. 각자 시간 잘 때워. 정 심심하면 나랑 놀아주든가.”

“침대에서?”

“거병으로.”

“그건 사양하지. 일찍 죽고 싶지는 않으니까.”

정중히 인사한 후 물러서는 킹우단이었다. 필렌은 박수를 한 번 쳤다.

“무사히 밤을 보낸 후 둔으로부터 돈을 받아 가자고.”

* * *

가하란은 저 멀리서 용병단 단장들과 웃고 떠드는 필렌을 바라봤다.

“다들 필렌 님을 좋아하나 봐.”

“우리 엄마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옆에 있으면 재미있긴 해. 난 엄마가 과거에 말도 못 꺼낼 정도로 소심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

“그래? 필렌 님께서?”

“그렇다니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한 번쯤 보고 싶어. 소심한 엄마라니. 무척 재미있을 거야.”

진형을 갖춰 모여 있던 용병들이 한순간 갈라져 숲 너머로 사라졌다.

“자리를 잡는 모양이네.”

조용히 말하는 밀레나였다.

가하란은 저 멀리 볼록 솟은 마수를 바라봤다. 느릿느릿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전투를 보고 싶었는데.”

“오늘은 포기해.”

“저 앞으로 가면 안 되겠지?”

“그건 진짜 안 돼. 설마 너…… 몰래 갈 생각은 아니지?”

입을 떼기도 전에 뒷목을 잡아채는 손이 있었다. 까끌까끌한 털의 감촉.

뒤를 돌아보니 엔엔이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허튼 생각 마요. 아시겠죠?”

“……네.”

말을 마친 엔엔이 ‘얀스’라는 기술공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죽이 잘 맞는지 둘은 몇십 분째 떠들고 있었다.

“얌전히 있어야겠지?”

작게 되물으니 밀레나가 눈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하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 중인 거병으로 걸어갔다.

베타.

필렌이 모는 거병이었다.

외장갑 두께가 상당히 얇았는데 기동성에 중점은 둔 것 같았다.

하긴, 맞지 않으면 얇은 강판이라도 상관없지. 필렌의 실력이라면 숲 한가운데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거병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네가 만든 의수를 몇 개 봤어. 신경회로 연결이 말도 안 되게 간편하던데?”

얀스였다. 찌그러진 철제 잔을 내밀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잔을 받으며 말했다.

“거병에 관심이 많다며?”

“네. 이것저것 배우고 있어요.”

“배우고 있는 수준이 아니던데. 네가 만진 거병을 봤어. 테리 대표가 몰던 그거, 네가 손댄 거 맞지?”

“맞아요.”

얀스가 흠, 하며 턱을 매만졌다.

“시야각까지 포기하며 머리를 떼버리고, 무장을 달 공간까지 줄여가며 배터리 효율을 올린 모델. 너무 극단적이라 처음 봤을 때는 충격이었어. 도망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거병이라니.”

“형 혼자서 도시 간 이동을 해야 하는데, 아무리 궁리해도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더라고요.”

“무모한 친구들이네. 한 명은 홀로 도시를 이동하고, 한 명은 그걸 위해서 괴상한 거병으로 개조하고.”

“많이 이상했나요?”

얀스가 방긋 웃었다.

“이상하지! 하지만 난 마음에 들었어.”

가하란은 베타 외장갑에 손을 올렸다.

“언젠가는 탈로스부터 제작해 보고 싶어요. 각 모듈도 직접 설계해서 통일성을 갖추고 싶고.”

“모든 기술공의 꿈이지. 하지만 마공장의 도움 없이 뼈대를 만드는 건 힘들어. 쇠를 다루는 건 재능의 산물이니까.”

“얀스 씨는 마공장처럼 쇠를 다룰 수 있나요?”

“어느 정도. 하지만 유능한 클랜에 몸담은 사람들처럼 실력이 좋지는 않아. 죽어라 연습하긴 하는데, 언제쯤이면 늘지 나도 모르겠어.”

얀스가 베타를 올려보며 물을 마실 때였다.

가하란은 땅을 내려다봤다.

아주 약하게 진동이 느껴진 것 같았다. 사람들이 있는 쪽을 살폈다.

몇몇 사람들이 발밑을 보고 있었다.

“왜 그래?”

“땅이 조금 흔들린 거 같아서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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