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6화
프레나는 책을 덮었다. 왼쪽에 쌓아둔 정신학 관련 책들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자마자, 늙은 사서가 다가왔다.
“그대로 두시면 됩니다, 아가씨.”
“저도 도울게요.”
“놔두시는 게 돕는 겁니다. 제자리에 도로 꽂아놓아야 저희가 덜 혼나거든요.”
책 수레에 책을 실은 사서가 고개를 숙이며 사라졌다.
“시간이…….”
오후 10시가 넘어 있었다. 학회 도서관은 마감 시간이 없다는 걸 알지만, 이렇게 늦게까지 있을 생각은 없었는데.
짐을 챙겨 서둘러 바깥으로 나왔다.
마법등이 길목을 비추고 있었다. 거리 치안이 좋은 둔이지만, 10시 이후에 혼자 돌아다니는 건 위험했다.
쭉 뻗은 인도를 살피다가 아침과 달라진 풍경에 “어?”하고 소리를 냈다.
거병들이 사라졌다. 도서관에 올 때만 해도 중앙 도로를 거병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거리를 가득 채웠던 거병이 어디로 사라진 걸까?
“프레나.”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목을 움츠렸다. 뒤를 천천히 돌아봤다.
“왜 그렇게 놀래.”
유단이었다.
프레나는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오빠였구나.”
안도감 대신 경계심이 심장을 싸고돌았다. 어둠이 깔린 도로에 혼자 있는 것보다 긴장된다.
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여긴 어떻게…….”
“네가 도서관에 있다고 아는 후배가 말해주더라. 그래서 와봤지.”
“그랬구나.”
유단이 걸음을 뗐다. 프레나도 보폭을 맞췄다.
“필요한 책이 있으면 대출하지 그랬어. 너도 등록돼 있어서 복잡한 절차 없이 집으로 가져올 수 있었을 텐데.”
알고 있었다. 대출 불가한 특수한 서적 외에는 전부 빌릴 수 있다는 걸.
“그랬던가? 잊고 있었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뭘 보고 있었던 거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볼 정도라니, 나도 한번 읽고 싶은데.”
“별거 아니야. 자수 놓는 패턴이 궁금해서 찾아봤어. 간단한 건 손에 익어서 재미가 없어졌거든.”
유단이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어릴 땐 앉아서 뭐 하는 걸 그렇게 싫어하더니, 이제는 찾아서 하네?”
“취향은 바뀌기 마련이야.”
“왈가닥 취향이 그리 쉽게 바뀔 리가.”
“누구 보고 왈가닥이래.”
가볍디가벼운 대화.
프레나는 오랜만에 오빠의 얼굴을 바라봤다. 무언가 결여된 듯한, 사람 자체가 바뀐 듯했던 오빠가 오늘은 예전처럼 살가웠다.
“미안.”
유단이 말했다.
“갑자기?”
“요즘 너한테 신경 못 쓴 거 같아서.”
“……아니야.”
“누구보다 네가 힘들었을 텐데, 그런 널 어떻게 다독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어.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날 추스르는 것조차 하지 못했지. 미안해, 못난 오빠라서.”
오빠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오빠는 고개를 틀며 거리를 벌렸다.
프레나는 멈춰 서서 유단의 등을 바라봤다.
오빠는 변한 게 아니라 힘들었을 뿐인 건가?
이상하게 바뀌었다고 의심하며 거리를 뒀던 게 부끄럽게 느껴졌다.
유단이 등을 보인 채 손을 들어올렸다. 얼굴 쪽을 매만지는 것 같았다.
혹시 우는 걸까?
가여운 오빠. 나 못지않게 힘들었을 텐데, 나는…….
손에 쥔 가방을 열고 안을 살폈다.
손수건을 찾다 보니 반짇고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기억을 더듬었다. 가방 밑바닥에 깔린 메모지를 꺼내기 위해 반짇고리를 의자에 올려둔 것이 떠올랐다.
“오빠, 잠깐만.”
유단이 뒤를 돌아봤다. 그새 울음을 삼켰는지 평상시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왜?”
“나 놓고 온 게 있어. 금방 가져올게.”
“같이 가.”
“아니야. 바로 저긴데 뭘. 얼른 가서 가져올게. 간 김에 책도 빌려오고.”
“그래, 그렇게 해. 난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도서관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조금씩 쌓여 거대해져 가던 오해가 단숨에 풀린 기분이었다.
오빠가 변했을 리 없지. 그래, 착각이었다.
들뜬 걸음으로 도서관을 찾았다. 분주히 움직이던 사서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봤다.
“다시 오셨네요.”
늙은 사서가 맞이했다.
“놓고 간 게 있어서요.”
“혹시 이건가요?”
반짇고리가 사서 손에 들려 있었다.
“맞아요, 고마워요.”
엄마의 손길이 닿은 몇 안 되는 물건. 반짇고리를 가방에 넣고 돌아서려 할 때였다.
“책도 빌려 가실 건가요?”
“네? 책이요?”
“아가씨께서 나가시자마자 특임 교수께서 들어오셨어요. 동생이 보고 간 책을 빌려갈 거라면서 목록을 확인하셨는데…….”
“오빠가요?”
“네. 제가 책의 목록을 말씀드리고 돌아왔을 때는 사라지셨거든요. 책을 받으러 오신 거 아닌가요?”
섬뜩한 기운이 등을 훑었다.
프레나는 경련이 일 듯 미소를 지었다.
“나, 나중에 빌릴게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뭘요. 언제든 찾아오세요.”
가방을 부여잡으며 계단을 밟았다. 건물 밖에 오빠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무슨 책을 읽었는지 다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 되물었다.
화가 난 걸까? 아니면…….
“프레나.”
“으, 응.”
“사람이 한결같을 수는 없지. 관계도 마찬가지고.”
유단이 한걸음 다가왔다.
“사서한테 뭔가 들은 모양이네.”
“아니야, 아무것도.”
“네가 읽은 책. 그래, 내가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 날 걱정해서 그런 책을 봤을 수도 있고. 네가 민망해할까 봐 모르는 척 넘어가려고 했는데 뜻대로 안 되네.”
“난 정말 오빠를 이상하게 생각한 게 아니라…… 그냥…… 그게…….”
유단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떨어져 살자.”
“어?”
“내가 나갈게. 안 그래도 연구실 정리를 끝냈어. 학회에서 마련해준 곳으로 이사할 거야.”
“오빠, 그게 무슨 소리야.”
“뮐킨 씨와 베트르 씨는 네 곁에 남겨둘게. 두 사람이 곁에 있으면 생활하는 데 아무런 불편함도 없겠지.”
“잠깐만.”
프레나는 유단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미안해, 오빠. 난 그냥 오빠가 우울해 보이는 거 같아서 도와주려고 그랬어.”
“알아. 네 마음 다 알아. 그러니 잠깐 떨어져 지내보자는 거야. 곁에 있음으로 해서 더욱 불편해지는 것들이 있으니까. 게다가 너도 나이가 차서 남자를 만나야 할 텐데, 나와 함께 살면 이런저런 눈치가 보일 거 아니야?”
“그런 생각한 적 없어. 정말이야.”
오빠가 바뀌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이별을 원한 건 아니었다.
유단은 유일한 가족이었다. 모든 걸 잃은 나에게 남은 각별한 친구이자 이해자.
작지만 연심도 품고 있었다. 언젠가 모든 게 정리되고 나면…….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하는 도중이었다. 도시 바깥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짧았지만 아주 강렬했다.
서쪽인가?
오빠 역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정보다 빨리 시작한 모양이네.”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자세한 건 내일 설명해줄게.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유단이 몸을 돌렸다. 프레나는 앞뒤로 살며시 흔들리는 오빠의 손을 바라봤다.
어릴 때처럼 그 손을 붙잡으려고 했다. 손가락 끝이 유단 손에 닿는 순간, 유단이 손을 거두었다.
“서두르자. 혹시 모르니까.”
프레나는 보고 말았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굳어버린 오빠를.
우뚝 멈춰 서며 말했다.
“……오빠 맞아?”
“그게 무슨 뜻이야?”
“오빠 맞냐고! 내가 아는 그 사람 맞냐고! 달라, 너무 달라. 지금도 봐. 내가 아는 오빠는…….”
그제야 유단의 눈꼬리가 휘었다.
순간 기계인형이 떠올랐다. 단순한 홍보 문구를 아무런 감정 없이 그저 반복하는 인형.
“다르지 않아. 난 언제나 네가 아는 유단이었으니까.”
“거짓말.”
“프레나, 피곤한 거 같은데 얼른 돌아가서 쉬자.”
“싫어. 더는 오빠를 못 믿겠어. 대체 뭐가 오빠를 그렇게 만든 거야? 응? 말해줘.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도울게. 뭐가 됐든…….”
와들와들 떨리는 다리로 유단에게 다가갔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여기서 오빠를 놓쳐 버린다면, 모든 게 끝나버릴 것 같았다.
“난 정말 괜찮아.”
텅 빈 말이었다.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위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주저앉아 입을 막고 치밀어 오르는 구토감을 삼켜냈다.
“진정되면 따라와. 천천히 걷고 있을 테니까. 알겠지?”
프레나는 고개를 홱 들었다. 유단은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걸음걸이에 망설임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오빠, 가지 마. 가지 마.”
목소리를 쥐어 짜냈지만 오빠는 돌아보지 않았다.
* * *
밀레나는 숨을 고르고 현관문을 두드렸다.
“밀레나.”
문을 열고 얼굴을 내민 건 엔엔이었다.
“가하란은요?”
“방에서 일보는 중이에요. 무슨 일 있나요?”
엔엔에게는 아직 말 안 한 모양이다. 밀레나는 낮에 가하란과 나눴던 얘기를 전했다.
“내일 아침까지 이동하는 게 본래 계획이었는데, 현장 상황이 바뀌었나 봐요. 즉시 이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어요.”
“안 좋네요. 전황이 변했다는 건 위험도가 증가했다는 거니.”
말하는 사이 가하란이 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가방을 등에 이고 있었다.
“허락하신 거야?”
가하란이 물었다.
“엄마가 말했어. 이상한 짓만 하지 않는다면 와서 봐도 좋다고. 예정이 앞당겨졌는데, 지금 출발해도 문제없지?”
“나야 상관없지.”
가하란이 현관문을 나설 때였다. 엔엔이 가하란의 가방을 붙잡았다.
“실전은 위험해요. 밀레나는 훈련받은 병사니 그나마 괜찮지만, 가하란은 전투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최전선은 아니에요. 현장에서도 얌전히 있을 거고요. 망원경으로 살펴보기만 할게요.”
“그래도 위험해요. 도시 전체가 움직였어요. 서쪽에 있는 마수가 그만큼 위험하단 뜻이죠. 그러니 가하란은 이곳에 있어요.”
밀레나는 한마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2차 저지선이 그나마 안전하다고 한들, 외벽 안쪽보다는 위험하니까.
“그럴 수 없어요. 전 언젠가 도시를 떠날 거예요. 마수들도 여럿 만나겠죠. 전투 방식과 거병 운영법을 책이 아닌 두 눈으로 봐둬야 해요.”
가하란이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엔엔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말려도 소용없을 얼굴이네요.”
“아시잖아요.”
엔엔이 손을 놓았다. 자유로워진 가하란이 밀레나 옆에 섰다.
“대신 저도 갈게요.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면 가하란과 함께 자리를 벗어나면 되니까.”
엔엔이 함께해 준다면 불상사는 없으리라. 밀레나는 부탁드린다고 말한 뒤 몸을 돌렸다.
“최대한 빨리 합류해야 해요. 아저씨들은 지금 서쪽 외벽을 향해 가고 있어요.”
“누나, 이른 아침에 이동한다고 하지 않았어?”
가하란이 옆에 붙으며 물었다.
“상황이 바뀌었어. 마수 쪽에서 먼저 움직인 거 같아.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외벽 너머로 보이는 검은 하늘에 흰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저 정도 광원이면 배터리 소모가 만만치 않을 텐데.”
가하란이 한마디 했다.
“그런 걸 먼저 떠올리는 너도 참 대단하다.”
밤공기를 휘감고 움직이는 거병들이 보였다.
길목에 놓인 집에 하나둘씩 불이 켜지며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다.
거리가 소란스러워졌다.
곧 둔 전체가 시끄러워질 것이다.
“가자.”
밀레나는 저 멀리 있는 르완 용병단 마크를 보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