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24화 (297/558)

제324화

“향 좋다.”

밀레나는 앞에 놓인 음식을 바라봤다. 잠깐 들러서 얘기만 하려고 왔는데, 어쩌다 보니 저녁까지 먹게 됐다.

“누나한테서 안 떨어지네.”

가하란이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있는 힘껏 놀아준 덕분일까?”

어깨에 매달린 루루를 사정없이 쓰다듬었다. 얼굴을 구기다가 금방 방긋 웃는데, 죄를 저질러도 용서해 줄 수 있을 정도의 귀여움이었다.

“얘랑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어. 나랑 마음이 맞는 거 같아.”

-둘이 닮긴 했어요. 대책 없이 쾌활한 모습이.

밀레나는 창가에 있는 카트시를 바라봤다.

“내가?”

-네.

“아닐 텐데.”

-맞을걸요?

카트시와 입씨름하면 언제나 손해를 본다. 밀레나는 어깨를 으쓱거린 후 포크를 들었다.

“일이 쉽게 풀릴 줄 알았는데, 조금 아쉬워.”

가하란이 말했다.

“윤과 동행했다는 사람, 찾을 방법이 아예 없는 거야? 웨켄에서 여기까지 안전하게 왔다는 건 안전 루트를 알고 있다는 소린데.”

얇게 썬 토마토를 입에 넣었다. 시큼한 소스가 뿌려져 있는데, 제법 잘 어울렸다.

“물어봤어. 그 사람이 도와준다면 당장 웨켄으로 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헤어지고 난 후라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대.”

“아쉽네. 근데 윤이라는 사람, 다시 웨켄으로 돌아가는 거 아니야? 우리가 늦게 출발할 수도 있으니 윤에게 부탁해서 대령님 소식을 퀼비언에게 전하면…….”

가하란이 도중에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물어봤는데, 당분간 둔에 있을 거래. 용무를 마치고 나면 영묘 마을 쪽으로 떠날 예정이고.”

“영묘 마을? 처음 듣는 곳인데.”

“북쪽으로 60km 정도 떨어진 곳에 생긴 마을이래. 여행자들이 경유지로 삼고 있어서 규모가 조금씩 커지고 있고.”

“대도시 바깥에서도 다들 잘 살아가고 있구나.”

“북쪽은 그나마 안전한가 봐. 랍파들이 주 활동지로 잡은 덕분에 안전루트도 여럿 생겨났고.”

바삭한 바게트를 씹으며 끄덕거렸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도시 간 보호 조약이 맺어지면 이동도 편해질 테고.

“서부 정리가 끝나고 나면 둔 주변도 안정화 되겠지.”

“누나, 말이 나와서 묻는 건데…… 내일 르완 용병단도 참가하는 거야?”

“공문도 내려왔고 뺄 이유도 없으니까. 단독으로 사냥 나가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고.”

“정말 전쟁이라도 치를 기세네.”

“왜? 걱정돼?”

“저렇게 많은 거병이 움직이는 건 처음 보니까.”

어깨 너머를 바라보는 가하란의 시선이 살짝 흔들렸다. 밀레나도 고개를 돌렸다.

노르스름하게 익은 거리를 거병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낮부터 이어진 대규모 이동이 끝을 보이고 있었다.

“오가면서 본 게 100여 대는 넘었어. 단일 작전에 이 정도 규모가 투입되는 건 이례적일 거야.”

“그만큼 둔 지도부가 열을 올리고 있다는 거겠지.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더는 늦출 수 없다고 판단한 게 아닐까? 땅은 한정적인데 사람은 계속 늘고 있으니까.”

계획도시 둔은 그라운드 제로 이후 옛 제국의 성도처럼 변해 버렸다.

위험을 무릅쓴 물자들이 둔으로 몰려들었고, 그와 함께 사람들도 모여들었다.

한때 인구가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면 거리마다 사람들로 가득했다.

외벽 안쪽은 아마 포화상태이리라.

몸집이 커질 때로 커졌으니 예전처럼 아웃라인 바깥에도 주거지를 건설해야 할 것이다.

“누나 말대로 환경 개선이 필요하긴 해. 균열 때문에 실면적이 좁아졌으니 바깥으로 눈을 돌려야겠지.”

“나쁘지 않은 시기라고 봐. 계속 웅크리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건 둔 군부의 역할이었다. 용병단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2차 저지선을 꾸리는 것.

“내일 같이 갈 수 있을까?”

가하란이 말했다.

“같이? 작전 현장에?”

“어.”

“글쎄.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엄마, 아니, 대장의 허락이 필요해.”

밀레나는 얇게 저민 햄을 루루에게 주며 물었다.

“왜 가고 싶은 건데?”

“전투에 나선 거병을 본 적이 없거든. 난 계속 도시 안쪽에 있었으니까. 마수조차 가까이서 본 적이 손에 꼽고.”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난 말리고 싶은데.”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야. 봐둬야 하니까. 거병을 이끈 전투가 어떤 건지, 어떤 식으로 싸워야 안전할 수 있는지.”

즉흥적인 대답은 아닌 것 같았다. 오랫동안 생각해오던 차에 기회가 생기니 말한 거겠지.

“언젠가 떠날 때를 대비해서?”

“어. 테리 형처럼 자유롭게 다니려면 봐둘 필요가 있어.”

“그러고 보니 테리도 보통은 아니더라. 특수하게 개조한 거병이라고 한들, 혼자서 도시를 누비고.”

“형은 노력을 많이 했거든, 팩토리를 위해서. 루드 아저씨가 돌아가시고 난 후 형이 느꼈을 부담감은…….”

밀레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니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에 무리를 했을 것이다. 가하란도 마찬가지였겠지.

“근데 요즘 보면 둘 다 제니한테 얹혀사는 거 같은데?”

“그러게. 제니도 보통은 아니야.”

“거병 조종법은 테리한테 배우면 되겠네. 기체마다 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써먹을 만한 노하우는 분명 있을 테니까.”

“형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놀기만 한 건 아니야.”

“그래? 나중에 기회가 되면 내가 한 번 봐줄게. 르완에서 조종 실력만 보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니까.”

“확실해?”

“음, 여섯 손가락?”

살짝 웃은 뒤 포크를 흔들었다.

식사를 마무리 지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서 말해볼게. 허락이 떨어지면 새벽에 널 데리러 올 거고, 아니면…….”

“누나가 안 찾아오면 얌전히 있을게.”

“도시 전병력이 투입된 일이야. 만약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아니다. 이런 얘기 꺼내면 꼭 재수가 없더라.”

밀레나는 아쉽다는 듯이 바라보는 루루에게 손을 흔들었다.

“저 애, 내일 돌려보내는 거야?”

“내일은 정신없다고 했으니 모레 데려다 주려고.”

“정들겠어.”

“그러게.”

돌아서서 나가려고 하는데 가하란이 붙잡았다.

“잠깐만.”

방으로 들어간 가하란이 작은 상자를 가져왔다.

“뭐야?”

“그때 말한 거.”

“그때?”

상자를 열어보니 곱게 접은 스카프가 들어 있었다. 꺼내서 펼쳐봤다. 끝단에 이니셜이 박혀 있었다.

밀레나는 머리끈으로 사용 중인 오래된 스카프를 매만졌다.

“대충 쓰기에는 너무 좋은데.”

“막 써도 돼.”

머리 뒤로 손을 뻗어 오래된 스카프를 풀고, 선물 받은 것으로 뒷머리를 묶었다.

해진 스카프는 접어서 안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뭘 줘야 하나.”

“누나한테서 시간을 받기로 했으니까 괜찮아.”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손해 보는 느낌인데?”

작게 웃으며 스카프를 매만졌다.

“고마워. 잘 쓸게.”

건물 밖으로 나오며 가하란에게 말했다.

“안 된다고 해도 설득해볼게. 근데 엄마가 정말 안 된다고 하면, 그건 진짜 위험하다는 뜻이니까 그땐 나도 포기할 거야.”

“그런 상황이면 누나도 위험한 거잖아.”

“나야 요리조리 잘 피할 수 있으니까 괜찮아. 우리 삼촌들도 마찬가지고. 여관에서 볼 때는 이상한 농담만 하는 아저씨 같아 보이지만, 전장에서는 누구보다 배테랑이야.”

밀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창가에 있는 카트시와 눈이 마주쳤다. 손을 흔들어 주자 카트시도 안구를 어지럽게 흔들었다.

“볼 수 있으면 새벽에 보고, 아니면 다음에 봐.”

“누나도 조심해. 다치지 말고.”

“다치는 거야 일상이니까 괜찮아.”

걱정하는 가하란을 향해 엄지를 세운 후 몸을 돌렸다.

* * *

“어때?”

에단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나무둥치에 발을 얹은 부조장이 보였다.

“똑같아요. 죽은 것처럼 가만히 있어요.”

“특이사항 생기면 바로 얘기해. 그리고…….”

부조장이 손에 든 걸 던졌다.

“저녁 맛있게 먹고.”

멀어지는 부조장을 바라보다가 손에 쥔 주머니를 펼쳤다. 고구마와 겉을 바삭하게 튀긴 고기가 들어있었다.

“고구마면 나쁘지 않네.”

다리를 뻗고 나무에 기대 저녁을 즐겼다. 벌레 우는 소리와 가끔 들려오는 낯선 동물의 숨소리.

밤이 내려앉은 숲은 의외로 부산스럽다.

멀리서 매의 울음이 들려왔다. 랍파의 단짝들은 밤에도 쉼 없이 하늘을 날아다녔다.

다오 역시 동선이 겹치지 않게 창공을 오가고 있었다.

“얌전히 있어 준다면 소원이 없겠는데.”

지금쯤이면 도시를 벗어난 거병들이 작전구역에 들어섰을 것이다.

목표는 저 멀리 있는 서쪽의 불청객.

타챠는 이번 전투를 못마땅해 했지만, 이건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산 하나면 만족하는 타린족과 달리 인간은 영토를 넓히며 살아가야 하니까.

공생이란 걸 실현할 수 있으면 더없이 좋으리라. 누가 피 흘리는 걸 좋아할까?

하지만 상대는 마수였고,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훗날 후손들은 마수를 핍박한 몰상식한 선조들이라고 욕할지도 모른다. 관계란 건 항상 변모하니까.

“지금 당장은 치워내야 할 문제덩이지만.”

도시들이 방어책을 강구하고 외벽을 세우는 동안 수없이 많은 인간이 마수의 먹이로, 장난감으로 죽어 나갔다.

안타까운 일이나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포식자가 먹이를 사냥해 배를 채우는 건 자연의 이치니까.

그러니, 정비를 마친 인간이 다시 최상위 포식자가 돼 마수를 토벌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삐이이익.

다오가 소리를 냈다. 별 이상이 없다는 신호였다.

오늘도 무사히 지나가는 걸까?

망원경을 들고 꿈틀대는 검은 물체를 바라봤다. 마수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작은 동물들을 풀어 정보를 수집해 갔다고 하니까.

자리를 고수한다는 건 응전 준비가 끝났다는 것인가?

아니면 최후의 토론을 준비 중인 걸까.

무엇이 되었든 내일이면 결과가 나올 것이다. 서쪽을 수복하고 개간해 둔의 영역을 넓히느냐, 아니면…….

숨 쉬는 듯 출렁거리던 마수가 얌전해졌다. 미동만 있을 뿐 여전히 이동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동물들의 움직임도 큰 변화가 없었다. 마수 주변을 배회하거나 먹잇감을 찾아 어슬렁거릴 뿐이다.

지독하게 평화로웠다.

만전을 준비한 인간을 상대로 어떤 대책을 내놓을 것인가.

어쩌면 시시하게 끝날지도 모른다. 지성이 곧 무력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니까.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인간이 수없이 많은 것처럼, 서쪽의 불청객도 입만 산 껍데기일 가능성이 있다.

위협적인 촉수만 조심하며 본체에 접근한다면 인간의 승리일 것이다.

에단은 뒤쪽을 돌아봤다.

5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집결지가 보였다. 또래의 마법사들이 득실득실 모여 있었다.

각기 다른 심상세계로 각기 다른 마법을 퍼부을 테지.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저 친구들을 언제까지 부려먹을 수 있을까?

시대는 점차 변하고 있었다.

저들이 자신의 힘을 완벽히 깨닫고 체제의 부조리함을 인지한 순간, 인간 서열은 또다시 뒤집힐 것이다.

에단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멍청하게 마수만 보고 있었더니 별별 생각이 다 든다.

따분한 하품을 들이켜고 마수를 관찰했다. 지긋지긋한 협조도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그때였다.

검은 마수가 바람을 집어넣은 돼지 오줌보처럼 부풀어 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