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23화 (296/558)

제323화

차를 즐긴다는 건 시간을 잊는다는 뜻이다. 향에 집중하고 맛을 음미하는 동안에는 켜켜이 쌓여나가는 시간의 존재를 망각하게 된다.

차향이 섞인 후틋한 숨을 내쉬며 바삐 움직이는 거대한 쇳덩어리를 바라볼 때였다.

아래층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불청객이 온 것 같았다. 하나는 익숙한 꼬마의 기운이고, 다른 하나는 접해보지 못한 낯선 것이었다.

브라인은 흔들의자에서 일어나 방문을 잠갔다. 계단 밟는 소리를 싹 무시하며 조금 식은 차를 즐겼다.

똑똑, 노크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대령님. 못 들은 척 그만하시고 문 열어주세요.”

셀베이아가 타이르듯 말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예상이 된다.

못 들은 척이라니. 듣고도 문을 안 여는 것인데.

브라인은 흐뭇하게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손님이 오셨어요. 만나 뵙고 할 얘기가 있다네요.”

그러시겠지. 브라인은 초콜릿을 입힌 과자에 손을 뻗었다. 의수를 벗어놓은 상태라 몇 번 헛손질한 끝내 잡을 수 있었다.

가끔은 명확하게 나눠진 인간의 손가락이 부러웠다. 마디별로 굽혀지는데다가 길어서 무언가를 잡는 게 편리하니까.

털에 묻은 초콜릿을 핥은 후 차를 마셨다. 바깥이 조용해졌다. 불청객은 물러간 모양이다.

나른한 감각을 만끽할 때였다.

“안녕하세요, 브라인 씨.”

낯선 목소리였다.

인간족 남자. 꼬마는 돌아간 건가?

“차를 즐기며 바깥세상을 구경하는 건 꽤 즐거운 일이죠.”

자신을 윤이라 소개한 남자는 시키지도 않은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도 처음에는 창을 통해 바깥을 보는 게 좋았어요. 답답한 공간에 갇혀 있지만, 그래도 변하는 풍경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따분한 하품이 나왔다. 소리에 반응하는 길쭉한 귀를 반으로 접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하루, 이틀, 사흘. 그러다 한 달, 두 달, 세 달. 정신 차리고 보니 몇 년이 지나 있었죠. 아니, 몇 년이 끝이 아니었어요. 저는 숫자를 세는 걸 그만뒀어요. 의미가 없어졌거든요. 기록은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을 때 가치를 발하죠. 전 작은 오두막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기록은 무색한 것이 돼버렸어요.”

기록은 무색하다.

브라인은 실웃음을 지었다. 기록을 업으로 삼은 바라라의 딸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군.

하지만 부정할 마음은 없었다. 공유할 수 없는 정보는 무가치하니까.

자기만족이란 버팀목을 세워두고 평생 자위하며 읽히지 않을 자료를 수집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결국 기록이란 읽히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저는 멈춘 상태로 계속 있었습니다. 자잘한 변화가 찾아오기도 했지만, 결국 제자리걸음이었죠. 돌이켜 보면 미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요.”

어느새 윤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브라인은 물결이 이는 찻잔 안을 보며 말했다.

“다른 종의 삶을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지만, 절대적 시간을 기준으로 잡으면 그래봤자 인간족의 수명이야. 끽해야 백 년 안쪽.”

“네. 바라라족과 비교하면 지극히 짧죠. 하지만, 저는 조금 다릅니다.”

“장수했나 보네. 그래서 지금 몇 살이지? 일흔? 여든? 그런 것치고는 목소리가 젊은데.”

문밖에 있는 윤이 소리 내어 웃었다. 긴 웃음이 이어졌다.

“제자리걸음 한 탓이 나이는 먹지 않았어요. 육체는 고정돼 있었죠.”

브라인은 눈을 씰룩였다.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시간은 추상적이지만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변화의 증거. 어떤 종이든 시간의 그물을 빠져나갈 수 없다.

“난 궤변가는 좋아하지 않아. 각본을 작성 중이라면, 나름 괜찮네. 최근 연극에 대해 기록 중이거든. 이야기를 잘 다듬어서 극을 올려봐.”

“시간은 절대적이다. 거스를 수 없으며 거슬러 올라가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다. 하지만, 시간이란 개념을 만들어낸 자가 지독한 장난을 쳤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가 영원불멸이라 말하는 자들을 수없이 봐왔어. 특출나게 건강한 놈들이었지. 하지만 하나같이 내 눈앞에서 사라졌어. 예의는 없었고 내 신념은 굳건해졌지. 태어났으면 사라져야 해. 그게 순리고.”

“네. 말씀하신 대로 저도 언젠가는 사라지겠죠. 한 때는 순리라는 것에서 한발자국 벗어나 있었지만, 지금은 그 흐름 안으로 편입됐거든요.”

“고루해. 너 같은 인간족은 수없이 만나봤어. 상상을 기반으로 마치 자기가 뭐라도 된 듯양 떠들지. 당장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면서 말이야.”

잠깐 흥미가 생겼지만, 금방 식어버렸다. 식어버린 차만큼이나 매력적이지 못한 상황이다.

찻잔을 치우고 슬며시 눈을 감을 때였다.

“사라진 미래, 그리고 되찾은 미래. 검게 드리워진 장막을 치워낸 덕에 길 너머의 풍경을 볼 수 있게 됐지만,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게 됐어요.”

브라인은 한쪽 눈을 떴다. 굳건히 닫혀 있는 문을 바라봤다.

“미래가 사라져? 그리고 되찾아?”

“정말로 모든 기억을 잃으셨나 보네요. 오크 주술사가 전한 정보도 잊으신걸 보면.”

오크족 주술사.

자료로만 접한 신비로운 주술사와 내가 아는 사이였던가?

“나에 대해 잘 아는 모양이야.”

“브라인 씨에 대한 건 자주 들었거든요. 언급되는 횟수가 많았어요. 특히 ‘길리우드’가 당신에 대해 많이 말해줬죠.”

“길리우드?”

아는 이름이었다.

그라운드 제로 이전 성도 테러를 일으킨 흉수로 지목된 인물. 물론 명백한 증거가 없는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아 정보로서 큰 가치는 없다.

“기억에는 없지만 자료 조사를 하며 알게 된 이름이야. 그놈과 내가 아는 사이였다?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없는 말을 지어내면 곤란한데.”

“전 사실만을 말합니다. 정보를 전달하는 자로서 지겹도록 살아오다보니 거짓말하는 게 익숙하질 않아요.”

“그 길리우드란 놈이 나에 대해 말했다고? 테러범과 얘기라.”

“테러범. 네, 그렇게도 활동했죠. 어떨 때는 군인이었어요. 정치가이기도 했으며 포주이기도 했죠. 대부호이면서 거렁뱅이였고, 위대한 마법사이자 실력 없는 양치기였죠.”

풋, 브라인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괴상한 놈이네.”

“네. 괴상한 친구였죠. 아, 제가 친구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눈을 까뒤집고 난리 치겠지만…… 어쩔 수 없어요. 그 지독한 오두막에서 절 찾아와준 유일한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요. 아시죠? 미운 정이 더 무섭다는 걸.”

“정. 그게 무섭긴 하지.”

브라인은 밑에 있는 셀베이아를 떠올렸다. 미운 정인지 고운 정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정 때문에 그 아이를 살렸을 테니까.

잠이 달아나 버렸다.

브라인은 다리를 쭉 뻗으며 말했다.

“그 길리우드란 놈과 내가 어떻게 아는 사이지?”

“각별한 사이였죠. 하지만 앙숙이기도 했어요. 서로 모를 때도 있었고, 적당히 친할 때도 있었죠.”

“복잡한 관계네. 하지만 난 그런 식으로 연을 맺지 않아. 내게서 등을 돌린 자를 용서할 정도로 내 마음이 넓지 않거든. 기억을 잃기 전에도 분명 그랬을 테고.”

“맞아요. 그래서 앙숙일 때는 앙숙인 채로 끝나버렸죠.”

“끝나버려?”

“네. 끝나고 다시 시작했으니까요.”

다시 시작하다니?

브라인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문을 열고 바깥에 서 있는 인간족 남자를 바라봤다.

중절모를 배에 가져다 댄 채 방긋 웃고 있었다.

“다시 시작한다는 게 무슨 의미지?”

“말 그대로 다시 시작한다는 겁니다. 어떤 오해와 곡해도 없이.”

“그러니까 무얼 다시 시작한다는 거야?”

“모든 것을요. 브라인 씨는 다 읽은 책을 다시 보고 싶을 때 어떻게 하시나요?”

“첫 페이지로 돌아가지.”

“네, 바로 그겁니다. 길리우드는 첫 페이지로 돌아갔어요. 우리 모두를 이끌고.”

브라인은 코웃음을 한 번 치고 이어서 입을 크게 벌려 웃었다.

얼마 만일까.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는 건. 망상도 이 정도면 예술의 경지였다.

“그 말은 즉, 그 길리우드란 놈이 시간을 되돌렸다? 신의 섭리를 거슬렀다?”

“네.”

“내가 기억을 잃었다고 한들 그런 일이 있었으면 기록에 남아 있었을 텐데.”

“인과가 모두 소멸하는데 어떻게 기억하는 자가 있을까요?”

브라인은 도톰한 손가락을 내밀어 윤을 가리켰다.

“말하는 주체가 모순덩어리면 말의 논리성이 사라는 거 아닌가?”

“그래서 말씀드렸을 텐데요. 순리에서 벗어나 있다가 이번에 편입됐다고. 정말 기나긴 시간이었어요. 너무 길어서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을 만큼.”

“세상 모두가 시간의 변조를 알아채지 못하는데, 유일하게 그걸 기억하고 있다? 각본이 너무 편의주의적이야.”

윤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 올렸다.

“저만 그 각본에 속해있지 않았거든요.”

“신이 쓴 세상에 네가 없었다면, 너란 존재는 대체 누가 창조해 냈는데?”

“창조되지 않았어요. 전 다른 계에서 왔으니까요.”

계?

브라인은 창밖을 바라봤다.

“도시 밖에서 왔다는 말을 거창하게 하는 건 아닐 테고.”

“이곳과 다른 곳. 이곳의 규율이 통용되지 않는 곳. 같으면서도 철저하게 다른 곳. 전 그곳에서 이곳으로 떨어졌고, 이곳의 신에 의해 격리된 채 세상의 변천사를 지켜봤어요. 바라라족이 하는 것처럼.”

브라인은 귀를 살짝 세웠다.

윤이라는 인간을 살폈다. 심장 근육이 피를 뿜어내고, 혈맥을 타고 피가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지독할 정도로 안정돼 있었다.

면밀하게 살피니 이질적인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인간은 무의식에 지배받는 동물이다. 의식으로 육체를 통제하려고 해도 다룰 수 없는 무의식에 의해 육체는 진실을 설토하고 만다.

눈앞에 있는 윤은 기이할 정도로 침착했다. 인간이 아니라 고목을 보는 것 같았다. 그것도 썩어서 생명 활동이 완전히 정지한 고목.

“……놀라워. 넌 대체 뭐지?”

“윤입니다. 혹은 미스터 리. 홀로 지겹게 살아와 지치는 것에 지치고, 싫증나는 것에 싫증이 나버린 불쌍한 인간이죠. 아, 그래도 요즘은 괜찮습니다. 변화에 노출돼서 행복하거든요.”

매끄럽게 움직이는 입술을 바라보다가, 브라인은 오른손을 뻗었다.

죽이기 위한 손길이었다. 살짝 튀어나온 발톱이 윤의 망막 앞에 멈췄다.

변화가 없었다.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심지어 경계하지도 않았다.

“죽을 수 있다는 걸 인지했을 텐데.”

“네. 죽겠구나 싶었죠.”

“근데 왜 피하지 않지?”

“쉬는 것도 나쁘진 않으니까요.”

“죽는 게 두렵지 않아?”

“타의에 의해 영원히 사는 것이 더 무서워요.”

브라인은 손을 거두었다.

“앉아. 그리고 질리도록 얘기해 봐. 다 들어줄 테니까.”

“저도 그걸 원하고 여기에 왔어요. 전해야 할 말이 몇 개 있지만, 시간은 넉넉하니까요.”

윤이 자리에 앉는 걸 보면서 입을 열었다.

“꼬마하고 같이 왔었지?”

“가하란을 말하는 건가요?”

“그래.”

“네, 우연히 만나서 같이 왔죠. 전 우연이란 말이 참 좋아요. 의도와 계획에서 벗어났다는 건 축복이나 나름 없으니까요.”

윤이 과자를 힐긋 바라봤다. 브라인은 턱짓했다. 윤이 과자를 들어 올렸다.

“그 애 중학생, 아니면 고등학생쯤 됐을까요. 제가 살던 곳에서는 무언가를 책임지기에는 어린 나이인데, 여기는 성인으로서 행동해야 하죠. 문화란 게 참…….”

“중학생? 고등학생? 그건 뭐지? 대학교의 학생 말고도 다른 게 있나?”

“제가 있던 곳에서는 모든 아이들이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했어요. 법으로 정해놓은 거죠.”

“이상적이야.”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의무가 곧 줄 세우기의 바탕이 됐으니까요. 이거 맛있네요.”

즐거운 얼굴로 과자를 씹는 윤이었다. 브라인은 검은 의수를 끼고 펜을 들었다.

노트를 펼치고 허벅지에 올려뒀다.

“더 얘기해 봐. 네가 살았던 곳에 대해서.”

“얼마든지요. 제 주변 사람들은 이제 질린다고 안 들어주지만.”

윤이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움직이는 거병이 시야에 들어왔다.

“걸어 다니는 깡통로봇 말고 날아다니는 깡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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