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2화
“거병이 단체로 움직이는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 보죠?”
남자가 중절모를 벗었다. 그제야 말총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순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독특한 헤어스타일이었다.
“글쎄요.”
내부 사정을 알고 있으나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아직 정식으로 발표 난 게 없으니까. 휘몰아치듯 일을 진행하고 있으니 작전 당일에 공식적인 발언이 있지 않을까?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루루가 잽싸게 일어나더니, 남자를 향해 도약했다.
늘어진 말총머리를 붙잡고 좌우로 흔드는 루루였다.
“죄송해요. 루루! 그만해.”
“괜찮아요, 괜찮아. 그다지 아프지도 않고.”
짜증을 낼 법도 한데 웃기만 하는 남자였다. 그러고 보면 낯선 사람인데도 루루가 경계하지 않았다. 적어도 몇 분 정도는 멀찍이서 관찰해야 할 텐데.
“자길 구해줬다는 걸 아나 봐요. 살갑게 구는 걸 보면.”
남자가 어깨를 툭툭 쳤다. 루루가 머리카락을 놓고 어깨에 몸을 걸쳤다.
“이리 와.”
가하란은 손을 내밀며 타일렀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루가 남자의 목덜미 뒤로 숨었다.
고개만 빠끔 내미는데,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인간처럼 표정이 자연스러운 루루였다.
놀리는 건가?
인상을 확 쓰며 노려봤다. 루루가 잠깐 움찔했지만 이내 끽끽 긁는 웃음소리를 냈다.
“더 놀아주고 싶지만 나도 슬슬 가봐야 해서.”
남자가 루루을 붙잡아 넘겨줬다. 품으로 돌아온 루루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종적인 눈동자로 바라봤다. 약아도 이렇게 약을 수가 없었다.
“그 작은 친구를 구해준 사례비를 받고 싶은데…….”
“아, 네. 물론이죠.”
식탁에 올려둔 지갑을 떠올리며 몸을 돌릴 때였다.
“농담인데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제가 곤란하죠. 사람이 순박하네요.”
집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멋쩍게 웃었다.
“사람을 찾고 있어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인간은 아니지만 어쨌든.”
남자가 중절모를 머리에 얹으며 말을 이었다.
“바라라족의 브라인. 둔에 있다고 들었거든요. 혹시 어디 계신지 아나요?”
“네, 알긴 알아요.”
“전해들은 대로 유명하신 분이네요. 길에서 만난 사람이 알 정도면. 그래서 어디로 가야 그분을 뵐 수 있죠?”
가하란은 방향을 가리키며 주소를 말해줬다.
“주소 체계가 제가 있던 곳과는 조금 다른 것 같네요.”
“도시를 재정비하면서 새로운 주소형식을 만들었는데, 그게 좀 복잡해요. 균열 때문에 도로 곳곳이 어긋나 버려서.”
“하긴, 저런 게 길목을 막고 있으니.”
남자가 갈라진 땅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그래 주신다면 저야 고맙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 녀석 데려다 놓고 내려올게요.”
집으로 들어갔다.
-저 남자는 누구예요?
“나도 잘 몰라. 근데 브라인 님을 찾고 있어.”
가하란은 루루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냉장보관함에 큼지막한 사과를 한 알 꺼내 루루에게 쥐여주었다. 기쁜 표정으로 사과를 끌어안는 루루였다.
“나갔다 올게. 얘 좀 돌봐줘.”
-알겠어요. 손발이 없지만 능력껏 돌보고 있을게요.
“고마워. 아, 그리고 말이야.”
가하란은 카트시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루루는 자신이 본 걸 단짝인 라라와 공유해.”
-보안이라면 걱정 마세요. 근데 본 걸 전부 다 표현할 수 있는 거예요?
가하란은 창문 걸쇠를 내리고 사이에 포크를 꽂아놓았다. 이렇게 해두면 루루가 열 수 없을 것이다.
“그 정도는 아니었어. 수석님 말대로라면 간단한 숫자 정도? 훈련을 시켜보려 했지만 되질 않았대. 정보를 표현하는 게 서투른 모양이야.”
-알겠어요. 그런 거라면 문제될 거 없어요. 우리가 나눴던 대화가 바깥으로 전해진다면 조금 곤란하겠지만…….
카트시가 사과를 껴안고 뒹구는 루루를 바라봤다.
-쟤는 사과에 미쳐서 아무것도 안 들릴 테니.
“시각 정보 외에 다른 건 공유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러니 조심하는 게 낫겠지.”
부탁할게, 가하란와 눈을 마주친 후 바깥으로 나왔다. 남자는 화단 앞에 앉아 물끄러미 꽃을 보고 있었다.
“가실까요?”
말을 걸었는데 남자는 반응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어깨를 살짝 쳤다.
“왔군요. 꽃이 너무 예뻐서 정신없이 구경했어요.”
“꽃을 좋아하시나 봐요.”
“꽃뿐만이 아니라 변하는 모든 걸 좋아하죠. 예전에는 정말 보잘 것 없어 보였는데, 요즘에는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이 감정이 식질 않아요.”
방긋 웃는 남자였다. 유쾌한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전 가하란이에요.”
걸으면서 말했다. 옆에서 보폭을 맞춰 걷던 남자가 우뚝 멈춰 섰다.
“이런 게 드라마죠. 운명은 사라졌지만 우연은 남아 있다. 음, 좋네요.”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흘려들을 수는 없었다.
운명이 사라졌다. 은유적인 표현으로도 잘 쓰이지 않는 문장이었다.
경계심이 살짝 돋아났다. 감정의 변화를 눈치챘는지 남자가 연한 미소를 지었다.
“경계할 필요 없어요. 어찌 보면 같은 팀이니까.”
“팀이요?”
“음? 철없는 황제가 여길 다녀가지 않았나요? 예정대로라면 그쪽을 만났을 텐데요. 아니면 또 샛길로 빠져서 놀고 있으려나?”
많은 걸 생략한 말이었지만, 유추하기에는 충분했다.
협회.
남자가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이거, 혹시 처음 보는 건가요?”
가늘게 뜬 눈을 형상화한 배지.
아르드헨이 넘기고 간 협회 배지였다.
“알고 있는 눈치군요.”
가하란도 배지를 꺼내 남자에게 보여줬다.
“시장님께 받았어요.”
“같은 팀 맞네요.”
“전 아직 협회에 들어간다는 말은 안 했어요. 이건 필요한 물건이기에 받았고요.”
“그래요?”
남자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요. 이런 악덕 모임에 발을 들이는 건 손해죠. 가하란도, 아니, 가하란 씨도 멀찍이서 구경만 해요. 들어오면 피곤해지니까.”
시장은 가입을 적극적으로 권했는데, 눈앞에 남자는 농담 섞인 말로 만류했다.
그러고 보니 황제는 말했었다.
협회는 다가올 미지와의 조우를 위해 설립됐기에 온갖 군상이 모여 있다고.
시장과 사이가 나쁜 건 아니지만 바라는 방향성은 약간 다른 건가?
“아, 이름을 듣고도 제 소개를 안 했네요. 전 ‘윤’이라고 합니다. 이름이 따로 있긴 했는데 오래전 일이라 잊어 버렸어요. 아니, 잊고 싶기도 하고.”
“윤 씨라 부르면 될까요?”
“네. 혹시라도 그게 불편하면 ‘미스터 리’라고 불러도 됩니다. 윤보다는 이 별명으로 부르는 사람이 더 많으니까요.”
윤과 리.
미스터 윤, 미스터 리.
“윤 씨는 왜 브라인 님을 찾는 건가요?”
“부탁받은 것도 있고 개인적으로 만나보고 싶기도 하고. 제 처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해 줄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산뜻한 웃음 뒤쪽에 읽어낼 수 없는 공허함이 자리 잡은 것 같았다.
한없이 긍정적인 사람처럼 보였는데, 방금 표정만 보면 모든 것에 질린 사람 같기도 했다.
기묘한 사람.
“혹시 브라인 님께 무언가를 물으려고 찾아가는 거라면…….”
말끝을 흐리니 윤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군요.”
“예. 기억을 잃으셨어요.”
“저런.”
턱을 매만지며 끄덕이는 윤이었다.
“제가 들은 것과는 다르게 상황이 안 좋군요. 그 사람은 별 문제 없을 거다, 그저 귀찮아서 잊고 있을 테니 가서 언질만 해주면 된다고 했는데.”
“누구한테 어떤 부탁을 받은 건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곤란하시면 대답 안 하셔도 돼요.”
브라인과 연관된 일이라면 사소한 것이라도 파악해 두고 싶었다. 게다가 협회와 연관된 사람이었다.
협회에는 브라인을 도울 유일한 인물은 마도사가 있었고.
“곤란한 거 하나도 없어요. 배지를 받은 사람이니 알 권리도 있죠. 물론 정식으로 가입한 건 아니지만, 황제가 권했다는 것만으로도 알 자격은 있어요.”
윤이 걸음을 떼며 말했다.
“퀼비언. 그 사람에게 부탁을 받아 브라인을 찾는 중이에요.”
간절히 찾고 있는 이름이 윤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가하란은 조바심을 느끼며 말했다.
“마도사는 지금 어디에 있죠? 웨켄에 있는 게 맞나요?”
“네. 거기에 있어요. 저도 웨켄에서 이곳으로 왔고요.”
가하란은 주먹을 꽉 쥐었다. 마도사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웨켄에 가면 마도사를 만날 수 있는 거군요?”
“아마도요. 사정이 생겨서 떠날 수도 있지만.”
일정을 더 앞당겨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질문이 날아들었다.
“퀼비언은 왜 찾는 거죠?”
가하란은 현 상황을 설명하고,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브라인 안에 있는 또 다른 퀼비언이라. 정신체를 남의 심상세계 안에 박아두는 게 참 그 사람답네요.”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브라인의 집 앞이었다.
“여기예요.”
“고마워요. 덕분에 쉽게 찾아왔어요. 주소만 받고 직접 찾으려 했으면 한동안 헤맸겠네요.”
윤이 중절모를 벗고 문을 두드렸다.
“저기, 하나만 더 질문해도 될까요?”
“그러세요.”
“웨켄에서 둔으로 어떻게 오신 거죠? 저도 웨켄으로 가려고 준비 중인데 마땅한 정보가 없어서 용병단도 호위를 꺼려하거든요.”
윤이 아, 하고 탄식을 흘렸다.
“까다롭긴 하죠. 웨켄으로 가는 길목이 마수들의 주 활동지가 됐거든요. 일반인이 거길 뚫고 가려면 시간을 꽤 써야할 거예요.”
“그런 곳을 어떻게 지나온 거죠?”
“전 항공모함 덕분에 쉽게 움직일 수 있었죠.”
“네? 그게 어떤 건지…….”
윤이 빙긋 웃었다.
“항거 불능한 절대적인 무력. 그런 힘을 지닌 사람 곁에서 아주 편하게, 여행하듯 여기로 왔어요.”
“그분은 협회 사람인가요? 혹시 가능하다면 자리를 주선해 주실 수 있나요?”
윤이 미안하다며 눈꼬리를 살짝 내렸다.
“둔 인근에서 헤어졌어요. 여기저기 바쁘게 다니시는 분이라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고요. 정기회의 때면 만날 수 있지만, 앞으로 넉 달 후니까…… 힘들겠네요.”
아쉽게도 기회가 닿지 않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목맬 필요는 없었다. 예정대로 준비해서 떠나면 되니까.
“누구시죠?”
셀베이아가 문을 열며 나왔다. 가하란은 윤 대신 사정을 설명했다.
“안에 계세요. 근데 사람 만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기셔서.”
“괜찮습니다. 내키지 않아하시면 전해야 할 말만 전하고 떠나겠습니다.”
윤이 셀베이아와 함께 안쪽으로 들어섰다. 같이 들어오라는 셀베이아의 손짓에 가하란은 고개를 저었다.
“전 다음에 올게요. 말씀 나누세요.”
윤이 손을 들어 올렸다.
“다음에 또 봐요. 못 다한 얘기도 그때하고.”
* * *
“점점 식구가 느는 거 같네.”
밀레나는 이리저리 날뛰는 원숭이를 보며 말했다.
-곧 떠날 애니까 정 주지 마세요.
“뭔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가하란은?”
-잠깐 나갔어요. 아, 그리고 잠시.
카트시가 안구를 움직여 가까이 오라는 표시를 했다. 곁으로 다가섰다.
-저 원숭이가 있는 동안에는 말조심을 해야 해요.
“사람 말을 알아듣기라도 해?”
-그런 건 아니지만,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요. 자세한 건 가하란이 돌아오면 말해줄 거예요.
끼! 끼기긱!
밀레나는 사과 옆에서 맹렬히 울부짖는 원숭이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원숭이가 몸으로 사과를 가렸다.
내가 빼앗아 먹을까 걱정하는 건가?
그렇다면 해야 할 행동은 정해졌다.
“나 쟤랑 좀 놀고 있을게.”
-……울리진 마요.
밀레나는 사과를 향해 돌진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