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1화
-거기, 친구들? 새로 얻은 몸은 괜찮고? 이질감이 심해서 힘들진 않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창가 근처로 와서 말해줘. 뭐? 하고 싶은 말이 없다고?
“그 독백은 언제까지 하는 거야?”
가하란은 종이 상자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왔어요?
“한참 전에. 물론 너도 알고 있었을 거고.”
-전혀요. 전 정말 몰랐는걸요.
“거짓말도 자꾸 하면 버릇돼.”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 원활한 대인관계를 위한 윤활유라고 해둘게요.
가하란은 빙긋 웃으며 카트시 옆으로 갔다. 창밖으로 길게 뻗은 중앙도로를 거병이 점거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마차가 다니는 길목으로 한두 대 정도 오갈 텐데, 지금은 대열을 맞춰 선 군인처럼 빼곡하게 늘어섰다.
시민들은 도열한 거병을 바라보며 감탄하기도 하고, 걱정에 찬 얼굴을 하기도 했다.
저것 보라며 신이 난 아이의 손을 중년의 남자가 채갔다. 아이들은 감지 못한 기류를 성인들은 알아채고 있으리라.
-전쟁인가요?
“전쟁……일지도 모르지.”
가하란은 벨솔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카트시가 안구를 쭉 빼 거병들을 훑었다.
-만들어지자마자 한바탕 날뛰는 거네요. 좋겠어요, 저 친구들은.
“카트시도 몸을 갖고 싶어?”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신체. 탐나긴 해요. 하지만 줄리어스는 우리에게 몸을 만들어주지 않았죠.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았던 거예요. 위험하다는 걸.
거짓된 말로 사람을 꾀어 죽인 로키. 상승을 갈망한 유사정령에게 몸이 생겼다면 연구원 한 명에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가하란은 카트시 본체에 손을 올렸다.
“줄리어스가 제작한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꽤 멋진 거병이 만들어졌어. 조만간 그 몸에 널 옮길 거야.”
-외관은 어때요? 되도록 미형이면 좋겠는데. 지금 와서 걱정이 되는 건 가하란의 미적 감각이에요. 엉망이면 전 옮기는 걸 거부할 거예요.
“글쎄. 내 눈에는 멋져 보였는데. 잠깐만.”
종이와 펜을 들고 와 카트시 앞에서 모형을 그렸다. 외장갑을 걸치지 않은, 탈로스 상태인 게 흠이지만.
-전고 3.9미터라고 했죠?
“외장갑을 착용하고 나면 그 정도 될 거야.”
-전투용으로 개발된 것치고는 작네요. 하긴, 저 밖에 있는 친구들도 다 작으니.
가하란은 오래 전 카트시와 나눴던 대화를 기억해냈다.
“엘롱 라인이라고 했던가? 나타 왕조 시절에 군수용으로 제작된 거병이.”
-네. 전고 7미터. 거대화 계획 이전에 가장 완성도 높고 크기도 큰 거병이었죠.
“마법공학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발달한 시대에서는 거대화를 꿈꿨는데, 이제는 소형화에 열을 올리게 됐네.”
-시대마다 요구하는 가치는 다르니까요. 하지만 줄리어스가 계획한 건 엄밀히 말해서 크기만 키우는 게 아니었어요.
“거병의 옛 모습을 찾는 거였지?”
-네. 그거예요. 출처 불명의 고서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강철 거신을 복원하는 것.
강철 거신.
최초의 오토마타는 강철 거신의 뇌였다고 했었지.
가하란은 뿌연 안개 속에 가려진, 하늘에 닿을 듯이 서 있는 거대한 조형물을 상상했다.
“모든 유사정령은 최초의 오토마타의 카피본이잖아?”
-그렇죠. 베이스 아키텍쳐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니까요.
“줄리어스도 기존 소스를 이용했겠지? 새로 개발한 게 아니라.”
-맞아요. 어머니는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천재였지만, 그녀도 베이스 아키텍처의 비밀을 풀지 못했어요.
가하란은 카트시의 본체를 바라봤다.
“오픈소스. 최초의 오토마타에서 추출한 마력선 도안은 질리도록 봤어.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저 역시 지겹게 봤죠. 구조를 해석하면 제 본질을 이해하게 되는 거니까요.
“얻은 게 있었어?”
-아니요. 회로 최하층에 깔린 의미 불명의 베이스는 참 단순하게 생겼네, 이런 감상만 수없이 얻어냈죠.
“나도 그래. 그 단순한 구조 안에 거병 기동에 필요한 모든 요체가 담겨있다니, 볼 때마다 기운이 빠져.”
오토마타를 공부하는 이들은 장담컨대 눈 가리고 오픈소스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수백 년간 연구된 단 하나의 회로.
그럼에도 풀지 못한 단 하나의 회로.
“줄리어스가 고안해낸 마력선 짜맞춤은 평면에 고착된 회로를 입체로 옮겼어.”
-사상의 전환이죠.
“하지만 줄리어스는 정보를 점에 집약했어. 평면에 놓인 하나의 점에. 너도 그걸 기반으로 제작됐다고 했고.”
-압축. 새의 눈에서 사람을 내려다보면 손가락보다 작게 보이겠죠. 새보다 높이 사는 동물이 있다면, 사람은 손가락이 아닌 점으로 보일 테고요.
“정보의 집약도 중요하지만 역으로 확대하는 것, 풀어내는 방식도 고안해내야 해. 정말 배워야 할 게 줄어들지 않아.”
-전 가하란에게 기대하고 있어요. 줄리어스가 우리에게 보여주려 했던 세계를 가하란이 실현시킬 거라고.
큰 기대는 하지 마, 가하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지해 있던 거병들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쪽 외벽을 향해 이동하는 것 같았다. 정비용 트레일러도 뒤를 따랐다.
용병단 마크가 달린 거병들도 어디선가 나타나 대열에 합류했다. 눈으로 헤아린 수만 해도 서른 대가 넘었다.
기동성과 연계성을 확보한 다수의 거병. 그라운드 제로 이전의 거병처럼 압도적인 위용은 없지만, 전술적인 이점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저 정도 물량이 투입됐는데 만약 마수를 정리하지 못 한다면…….
“최악은 상상하지 않을래.”
-그게 좋겠네요.
군부는 물론이고 용병단까지 투입된 전력이었다. 군부는 판단한 것이다.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고.
그게 아니라면 전병력을 움직일 리가 없다.
육중한 걸음 소리가 귀에서 멀어질 때였다. 등 뒤에서 투둑투둑,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무슨 소리죠?
카트시도 들은 모양이다.
가하란은 양옆에 배치된 문과 계단 쪽을 살폈다. 쥐인가? 아니면 방향 잃은 새가 머리를 박고 있나?
종이 상자가 들썩였다.
-그러고 보니 저 상자 뭐죠? 저기서 소리가 나는 거 같은데.
“자료야. 저 안에는 종이만 들어있어.”
-종이가 살아서 움직일 리 없잖아요. 어서 가봐요. 전 쥐 같은 거 질색이니까.
“이럴 땐 보안책임자를 내세우는 게 아니라 먼저 나서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러고 싶은데, 전 손발이 없잖아요.
실실 웃는 카트시였다. 가하란은 눈을 씰룩이며 상자로 걸어갔다.
다시 한번 들썩. 덮개가 열리기 직전이었다.
살며시 상자 덮개를 열었다.
끽!
웅크리고 있던 원숭이가 튀어 올랐다. 재빠르게 찬장으로 가더니 세워놓은 식기를 몸으로 밀쳤다.
“자, 잠깐만!”
그릇이 떨어졌다. 무참하게 깨져 파편이 바닥에 깔렸다. 요란한 소리가 원숭이를 재차 자극한 것 같았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두 손을 위로 뻗으며 원숭이를 뒤쫓아 다녔지만 헛수고였다. 어찌나 재빠른지, 손이 닿을만하면 몸을 날려 구석으로 도망쳤다.
-저, 저게 뭐예요?
“원숭이.”
-끔찍해라. 얼른 잡아줘요.
카트시는 안구를 창가 쪽으로 뺐다. 그때였다. 계단 난간에 매달려 있던 원숭이가 카트시를 향해 뛰었다.
-오, 오지 마!
커넥터로 이어진 안구를 휘두르며 저항했으나, 원숭이는 사뿐히 본체 위에 앉았다.
끼긱, 작은 손으로 본체를 두드리는 원숭이였다.
-가하란! 가하란! 이 끔찍한 생물을 얼른 치워줘요! 오, 오줌이라도 싸는 날엔 제 영혼이 부식될 거예요.
다급한 음성에 서둘러 발을 떼려 했다.
-얼른요!
보채는 목소리에 가하란은 우뚝 멈춰 섰다. 미소를 짓고 본체에 오른 원숭이를 바라봤다.
-가, 가하란?
“이참에 친해져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저기요?
끽, 본체 위에서 팔짝 뛰는 원숭이와 비명을 지르는 카트시.
가하란은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물을 마셨다.
“찍혔네.”
-무슨 소리예요? 그보다 얼른 치워주세요.
“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야. 너무 싫어하지 말고 잘 들여다봐봐. 귀엽게 생겼으니까.”
-안 귀여워요! 자, 잠깐만. 이 녀석 몸을 웅크리고 있어요. 배변 자세라고요! 안 돼, 안 돼!
기절할 듯 소리 지르는 카트시였다.
* * *
“아직 어려서 그런 걸 거야. 아마도.”
가하란은 품에 안겨 있는 원숭이를 쓰다듬었다. 진정했는지 소리치지도, 뛰어다니지도 않았다.
-누구시죠? 누구신데 저한테 말을 거시는 거죠?
카트시가 밖을 쳐다보며 말했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투덜대는 카트시를 지켜보다가 원숭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 들어간 것일까. 얼굴에 맺혀 있는 푸른 몽고점을 엄지로 쓸어내렸다.
“루루, 단짝은 어디에다 두고 혼자 왔어.”
엄지를 붙잡으려고 두 팔을 허우적대는 루루였다.
-이 작고 끔찍한 것에 이름도 있어요?
고개를 드니 카트시의 안구가 옆에 있었다. 질겁하더니 이제는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제 기록에 남아 있는 원숭이는 이렇게 작지 않은데.
“나도 처음 봤어.”
-성체는 아니겠죠? 이게 다 큰 거라면 좀 이상한데.
“모르지. 개들도 품종마다 덩치가 다르잖아.”
어깨에 오른 원숭이가 카트시 안구를 향해 뛰었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얌전히 있는 카트시였다.
“이젠 괜찮아?”
-아까 오줌을 쌌다면 평생 안 보려 했는데, 기특하게도 참더라고요. 앞가림은 하는 것 같으니 관찰해 보려고요.
원숭이가 커넥터를 미끄럼틀 삼아 주르륵 미끄러졌다. 본체 곁을 서성이는데, 그곳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키울 건가요?
“아니. 돌려줘야지. 그쪽에서도 뭔가 조사 중인 거 같았으니까.”
-언젠가는 해부하겠죠?
“음, 그런 결말은 원치 않는데.”
본체 위에 얌전히 누워있던 원숭이가 벌떡 일어섰다. 성난 눈으로 밖을 바라보는데, 시선이 닿은 곳에 거병이 있었다.
-신경질 내는 거 같죠?
“그러게.”
-커다란 게 쿵쿵거리며 움직이니까 거슬리긴 하겠죠. 야생에서는 저런 걸 피해 다녔을 테니.
자그마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킥, 날 선 소리를 내는 원숭이였다.
-창문을 가릴까요?
“그러는 게 좋겠네.”
방으로 들어가 옷걸이에 걸린 코트를 꺼낼 때였다. 카트시가 다급히 외쳤다.
-안 돼!
재빨리 방을 나왔다.
가하란 눈에 보인 건, 걸쇠를 올리고 창문을 밀어내는 원숭이였다.
“위험해!”
서둘러 몸을 날렸지만, 루루는 창밖으로 뛰어내린 후였다.
몸을 밖으로 빼 아래를 내려다봤다.
루루가 어떤 남자 품에 안겨 있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중절모를 쓴 남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위에서 갑자기 얘가 떨어졌는데, 그 집에서 키우는 애인가요?”
“아, 네. 맞아요. 금방 내려갈게요.”
서둘러 집 밖으로 나갔다.
“옳지, 옳지. 아쉽게도 바나나가 없네.”
중절모를 쓴 남자는 루루를 다독이고 있었다. 흥분상태였던 루루도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그나저나 웬 바나나?
“여우원숭이라 하기에는 덩치가 작네요. 생긴 건 비슷한데.”
남자가 루루를 넘겨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혹시 얘 때문에 다치시거나…….”
“화단을 구경 중이었는데 눈앞으로 뚝 떨어지더라고요. 놀라긴 했어도 다치진 않았어요.”
“정말 다행이네요.”
똘망똘망 눈을 굴리는 루루를 톡 건드렸다. 겁도 없이 밖으로 뛰어내리고.
“얼굴에 멍이 들었던데.”
남자가 말했다.
“멍이 아니라 점이에요. 몽고점.”
“오호, 몽고점. 그런 표현을 쓰는군요.”
“네?”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냥 헛소리 한 거니까 무시하세요.”
남자가 눈웃음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