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0화
기우뚱거리며 뛰던 거병이 점차 밸런스를 잡기 시작했다. 발끝부터 어깨까지, 인체를 표방한 탈로스는 흐트러짐 없이 뜀박질했다.
“밸런싱까지 실시간으로 잡는 거 같은데, 이래도 같은 종이 맞아요?”
“좀 특이한 구석이 있는 애였지.”
“이제는 애가 아니라면서요?”
수석 연구원이자, 괴짜로 소문난 벨솔조차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넋이 나간 모양이었다.
다른 연구원들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첼리는 거병 측면으로 이동해 기체를 살폈다. 균일한 이동을 보이는 축, 향상되는 협응성, 정밀한 무게 이동.
믿기지 않는 속도로 균형을 잡아가고 있었다.
옆으로 다가온 벨솔이 입을 열었다.
“전문가가 보기에는 어때?”
“정밀 분석을 해봐야겠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따지면…… 표준 옵션으로 삼아도 괜찮을 정도예요.”
“너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
“할 수야 있죠. 아니, 제 밑에 있는 파트원 아무나 붙잡고 시키면 다 해낼 거예요. 밸런싱은 창의성과 연관이 없으니까요.”
진득하게 눌러앉아 수치를 바꾸는 것.
추구하는 안정값 안으로 숫자가 들어오도록 모듈을 정비하는 게 밸런싱의 요체였다.
그야말로 단순 반복 노동.
“너라면 이 기체를 다듬는데 어느 정도 걸릴까?”
“안에 든 거, 골리앗의 피죠?”
“맞아.”
“그러면 이틀은 붙잡고 있어야 해요. 밥 먹는 시간, 싸는 시간 다 빼고.”
“이틀이라.”
벨솔이 손에 쥔 펜으로 볼을 톡톡 건드렸다.
“그걸 18분 안쪽으로 해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첼리는 묵직한 쇳소리를 들으며 체임버를 올려다봤다.
“글쎄요. 저도 모르겠네요.”
* * *
“다음에 올 땐 변장하는 게 좋을 거야.”
벨솔이 말했다.
“변장이요?”
의아한 말에 멀거니 벨솔을 바라볼 때였다. 벨솔이 손가락을 들어 연구실 쪽을 가리켰다. 첼리를 비롯한 연구원들이 고개를 쭉 빼고 바라보고 있었다.
“쟤들이 널 해부할지도 모르거든.”
가하란은 작게 웃은 후 연구원들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좋으신 분들이에요. 이것저것 많이 알려주셨어요.”
“그게 다 호감을 얻은 후에 해부실로 끌고 가려는 수작이야. 특히 첼리를 조심해. 네 머리를 열고 뇌를 뒤적거리며 웃을 지도 모르니까.”
벨솔이 식칼을 쥐듯 펜을 잡더니 머리를 쓱 그었다.
“교수님, 아니, 수석님도 멀쩡히 계시니 저도 괜찮겠죠.”
“나야 격렬하게 저항했으니까.”
벨솔이 거병을 올려다봤다.
“첼리가 그러더라. 기체 밸런싱을 20분 안쪽으로 잡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사람마다 재능이란 게 하나씩 있다잖아요. 전 자잘한 계산 같은 걸 빠르게 할 뿐이고요.”
“너 그 말 쟤들 앞에서 하지 마. 비관 자살할지도 모르니까.”
다시금 연구원을 가리키는 벨솔이었다.
“출력은 67까지 나왔어. 세부 조정을 끝낸 완성품이 80을 목표로 하니까 준수한 수치지. 게다가 이 녀석 안에 든 건 골리앗의 피고.”
가하란은 체임버 안쪽으로 전해지던 충격을 떠올렸다.
“웨이브겔이 활성화됐는데도 내부 충격이 꽤 심했어요. 실린더 반동 역시 허용 수치를 넘을 뻔했고요.”
“조금만 과열됐으면 파열됐겠네.”
“네, 아마 그랬을 거예요.”
“역시 아직은 이른가.”
군색 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고정대에서 거병을 떼어냈다.
“내 방으로 가자. 시간 괜찮지?”
“네.”
오토마타가 늘어선 반응실을 지나 3층 건물로 들어갔다.
“편한 곳에 앉아.”
벨솔이 문 앞에 널브러져 있는 옷을 차며 말했다.
“방이…….”
무의식중에 말이 나왔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혼돈을 형상화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일단 작업복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찢어지고 물들고 해진 옷들.
밀림의 주축을 이루는 게 옷가지들 사이로 먹다 만 과일들이 너저분하게 흩뿌려져 있었다.
가하란은 허리를 숙여 반쪽만 남은 사과를 들어 올렸다. 표면이 바짝 말라 있었다. 이틀 정도는 내버려 둔 거 같은데.
“방이 좀 어수선하지?”
벨솔이 창문을 활짝 열고 주전자가 놓인 화구로 걸어갔다.
“예, 뭐…….”
어안이 벙벙해서 뭉뚱그리는 말만 나왔다. 어릴 적 본 벨솔의 연구실은 필요한 것들만 갖춰져 있는 깔끔한 곳이었다.
“오해하지 마. 내가 평소에도 이렇게 사는 건 아니니까.”
벨솔이 눈을 찡그리며 천장 구석을 바라봤다. 가하란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천장에 가로로 박아놓은 기다란 봉이 보였다. 그곳에 자그마한 원숭이 두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몸집. 잔뜩 움츠러든 채 낯선 방문자를 경계하고 있었다.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는 거야. 저놈들이 다 어질러 놓거든. 그래서 포기했어. 쟤들을 데리고 있는 한 내게 정리 정돈이란 존재하지 않아.”
벨솔이 찻잔을 내밀며 말했다.
“그거 치우고 앉아도 돼.”
가하란은 의자에 놓여 있던 정체불명의 목각상을 치우고 자리에 앉았다.
“기르시는 건가요?”
“쟤들? 기른다고 해야 할지 눌러앉았다고 해야 할지.”
차를 마시며 작은 원숭이를 바라볼 때였다. 눈이 마주친 한 마리가 폴짝 내려오더니, 곁으로 다가왔다.
오도카니 지켜봤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원숭이가 잽싸게 다리를 타고 오르더니 어깨에 앉았다.
“축하해. 찍혔네.”
벨솔이 웃으며 말했다.
“찍혀요?”
“네가 마음에 들었나 봐.”
작은 얼굴에 큰 눈을 가진 원숭이가 찻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 돼, 라고 말하며 찻잔을 빼자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은근히 아프다. 가하란은 주머니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 원숭이 손에 쥐여줬다.
진득하게 사탕을 탐색하던 원숭이가 입을 벌려 사탕을 핥았다.
핥자마자 끽끽, 소리를 내며 펄쩍 뛰더니 사탕을 냅다 던졌다.
“신맛이 별로였나 보네.”
가하란이 웃으며 말하자 알아들었다는 듯이 다시 머리카락을 당겼다.
“이렇게 작은 원숭이는 처음 봐요.”
“나도 처음 봤을 때는 신기했어.”
“어디서 만난 건가요?”
벨솔이 다리를 꼬며 창밖을 바라봤다.
“자원조사 차 도시 남부 쪽 버려진 광맥에 갔을 때였어. 골리앗의 피에 들어가는 백유를 찾기 위해서였지.”
“백유요?”
“특수한 문양을 지닌 단층 인근에서 종종 하얀 돌이 발견돼. 표면은 일반적인 돌과 다름없는데, 안쪽을 파보면 뭉글뭉글한 점토 같은 걸로 가득 차 있어. 그걸 가공하면 하얀 기름이 되고.”
“특이하네요.”
“그라운드 제로 때 지형이 바뀌었잖아? 땅 밑에 묻혀 있던 것들이 위로 올라왔지. 백유 말고도 온갖 희한한 것들이 지상으로 올라왔어. 우린 그걸 연구 중이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것도 질렸는지 어깨에서 내려와 다시 천장으로 올라가는 원숭이였다.
벨솔이 원숭이를 바라봤다.
“탐사구역 안에 저 애들이 있었어.”
“그때 데려오신 거군요.”
“아니! 둘이서 잘 노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일을 마친 후 돌아왔지. 돌아와서 보니까 저 둘이 트레일러 하단에 붙어있더라고. 어이가 없어서.”
끽끽거리며 날뛰기 시작하는 원숭이들이었다. 책상에 내려앉아 펜을 집어 던지더니, 마른 과일을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눌러앉았다.
벨솔이 한 말의 의미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행동하는 건 저래도 생긴 건 귀엽잖아?”
“귀엽긴 하네요.”
“그래서 클랜 사람들이 오냐오냐 데리고 다녔지. 먹이도 주고 놀아도 주고. 그렇게 반년. 지금 이 꼴이 됐어!”
벨솔이 소리치며 원숭이를 쫓아다녔다. 두 마리의 원숭이는 코웃음을 치며 방안을 누비다가 다시 천장으로 도망쳤다.
“이젠 낯선 사람도 겁 안 내. 처음 여기 왔을 땐 야성이 남아 있어서 손 내밀면 할퀴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이제는 보다시피…….”
다시 내려온 원숭이 두 마리가 벨솔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았다. 벨솔은 반쯤 포기한 얼굴로 차를 마셨다.
“아, 맞다. 재미난 거 보여줄까?”
벨솔이 왼쪽 어깨에 앉은 원숭이를 붙잡았다.
“볼에 몽고점처럼 파란 점 보이지? 얘 이름이 루루. 암컷이고, 없는 애가 라라. 라라는 수컷.”
라라를 붙잡아보라는 말에 가하란은 손을 내밀었다. 라라는 눈치를 보다가 손바닥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 손을 탄 동물. 머리를 간질이니 아기처럼 웃었다.
“데리고 있어봐.”
벨솔이 잡동사니를 넘어 왼쪽 방으로 들어갔다.
“라라한테 숫자를 보여줘 봐. 손가락으로.”
방 안쪽에서 벨솔이 외쳤다.
영문을 모르겠으나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가하란은 손가락 두 개를 펴서 라라에게 보여줬다. 갸우뚱거리던 라라가 검지와 중지를 붙잡으며 끽끽거렸다.
방문이 열렸다.
“두 개. 맞지?”
엿본 건 아닐 테고.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이 아이를 통해서 정보가 전해진 건가요?”
벨솔 쪽에 있는 루루를 바라봤다. 벨솔의 왼손 손가락 두 개를 쥐고 있었다.
“둘만이 공유하는 특수한 신호를 방출하는 건지, 아니면 마나적인 특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둘을 연결하는 무언가가 있어.”
마나란 말에 가하란은 모노클을 눈에 얹었다. 두 마리의 원숭이를 주의 깊게 살폈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여러 장치를 통해 검출해보려 했는데, 딱히 정의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 마법사 중 한 명은 둘이 심상세계를 공유하는 것 같다는 이상한 소리를 했고.”
“동물에게도 심상세계가 있는 건가요?”
그 질문에 벨솔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인간도 동물인 건 알고 있지?”
“그렇긴 하죠.”
“심상세계가 지성을 지닌 동물들의 특권인지 아니면 모든 생물이 지닌 체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얘네들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작은 세계를 품고 있겠지.”
손에서 벗어난 라라와 루루가 소파 밑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숙여 어둠에 숨은 두 원숭이를 살폈다.
손을 꼭 붙잡은 채 엎드려 있었다.
“꼭 저기 들어가서 자더라.”
“보금자리네요.”
목소리를 조금 낮춰서 말했다.
“내 정신 좀 봐. 저 두 놈 때문에 깜빡 잊고 있었네.”
벨솔이 종이 상자를 가져왔다. 덮개를 여니 빼곡히 놓여 있는 파일이 보였다.
“액상근육에 관심 있다고 했지? 이게 기초니까 천천히 살펴봐.”
“반출해도 되는 건가요? 중요한 문서 같은데.”
“내가 정리한 것들이라 클랜하고는 아무 상관 없어. 골리앗에 관한 것도 들어있으니까 보고.”
벨솔이 덮개를 닫았다.
“대신 협조 좀 해줘. 연구에는 자원이 매우 필요하거든. 특히나 인적자원이.”
“전 수석님을 도와드릴 만큼 잘 알지…….”
“어중간하게 아는 애들 보다 너 같은 애가 나아. 게다가 머리 쓰는 건 이미 증명했잖아? 내키지 않으면 두고 가고.”
가하란은 재빨리 손을 뻗어 상자를 붙잡았다.
“아니요.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었어요. 수석님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주신 건 빠짐없이 살펴볼게요.”
“느긋하게 봐. 늙은 나와 달리 넌 젊으니까. 그렇다고 너무 느리게 보진 말고.”
벨솔이 상자 덮개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점심 먹을 시간이네. 온 김에 먹고 가. 할 얘기도 더 있고.”
“주신다면 거절하진 않아요.”
벨솔과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첼리를 비롯한 연구원들과 마주쳤는데, 밥 한술 뜨지도 못하고 1시간 넘게 떠들기만 했다.
흥미로운 주제라 허기진 것도 잊은 채 대화를 이어나갔다.
식사를 마친 건 1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였다.
“모레 다시 와. 내일은 바빠서 안 될 테니까.”
벨솔이 늘어선 거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하란은 상자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예, 라고 대답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