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19화 (292/558)

제319화

6년 전만 해도 회로 겹침은 발생해서는 안 될 극단적인 오류였다.

완성된 마나 회로가 서로 간섭하지 않도록 안전한 레이어 위에 쌓아나가는 것.

이게 기본 구조론이었다.

하지만 그라운드 제로 이후 덴스 교수가 제창한 겹이론은 회로 구성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층으로 쌓아올린 회로 간에 긴밀한 연결. 공유 단자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회로 구조는 간소화는 물론 비약적인 효율 상승을 실현시켰다.

패러다임 시프트였다.

거병의 소형화가 본격적으로 논의될 수 있었던 것도 덴스가 발견해낸 겹이론 덕분이었다.

모든 개발자들이 겹이론에 매달렸다.

몇몇 개발자는 짧은 개요만으로도 이론의 정수를 깨닫고 겹이론을 실적용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개발자들은 이론과 결과물을 보고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첼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쪽이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것일까?

겹이론을 이해한 친구를 찾아가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친구는 도리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이걸 이해 못 하는 거지? 너 정도 되는 애가 말이야.”

기이한 간극이었다. 친구는 날밤을 지새우며 설명했고, 첼리는 귀담아듣다가 고개만 갸웃거렸다.

친구의 설명은 마치 ‘볼 수 없는 것을 봐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미 활용성이 입증된 이론인데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했다.

해소되지 못한 의문을 품고 다시 며칠 동안 골머리를 앓을 때였다.

학술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학회가 주도하는 첫 공식 행사.

머리도 식힐 겸 찾아갔다.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았으나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겹이론이 잡히지 않는 날파리처럼 집요하게 머릿속을 날아다녔다.

돌아가서 쉬는 게 낫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회장을 벗어날 때였다.

체구가 자그마한 아이가 보였다.

피곤한 얼굴로 단상에 오르고 있었다. 한쪽 다리가 의수인지 걸음마다 강단을 밟는 소리가 달라졌다.

열 살 남짓 된 아이.

세상이 바뀌고 ‘신인류’라는 말이 간간이 튀어나올 정도가 됐다지만, 지성인들의 축제에 저런 어린아이가 낄 자리는 없을 텐데.

호기심이 생겨 벽에 기대섰다. 좌석은 많았으나 대부분 비어 있었다.

단상에 오른 아이는 메마른 기침을 했다.

긴장한 것 같지는 않았다. 들뜬 것 같지도 않았다. 지루한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삭막한 냄새를 풀풀 풍길 뿐이었다.

아이는 객석을 보지도 않고 준비해온 종이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기회가 닿게 되어 이 자리에서 연구 결과를 발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미건조한 어투였다.

저 자리에 서고 싶어 하는 학도들이 얼마나 많은데. 괜한 반발심이 들어 팔짱을 꼈다.

종이만 보고 주절대는 아이가 흥미로웠는지, 몇몇 사람들이 자리에 앉았다.

아이는 여전히 신경 쓰지 않고 인사말을 읊고 있었다.

듣다 보니 확신이 들었다. 길고 긴 인사말은 저 아이가 쓴 게 아니구나.

아이가 종이를 내려놨다.

“이론 설명을 시연과 병행하겠습니다.”

감각기를 손에 끼고 꼼지락거리던 아이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시그니쳐가 펼쳐졌다.

단언컨대 그토록 난잡한 시그니처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실선들이 나풀거렸다.

마나 회로를 구현한 시뮬레이션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얼굴과 달리 긴장한 걸까?

“레이어와 레이어의 연결. 간섭을 방지하며 회로 간 조직성을 높이려면 생략이 중요해집니다. 단자 공유 역시 마찬가지죠.”

무의미하게 퍼져 있던 실선들이 한순간 모형을 갖춰나갔다.

“현상화에 소질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하는 편이 보기 좋겠죠.”

아이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회로 소자의 기호들이 공간을 점유하기 시작했다.

섬세한 조작이었다. 시그니처로 저렇게까지 표현할 수 있다니.

설명이 이어졌다. 첼리는 벽에서 떨어져 조금씩 단상으로 걸어갔다.

넋 놓고 이야기를 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텅 비었던 회장 안에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교수님의 겹이론을 바탕으로 제가 이해한 골자를 적용해 봤습니다. 이상입니다.”

회장을 수놓던 실들이 무덤덤한 인사말과 함께 사라졌다.

아이는 꾸벅 인사하고 처음 단상에 올랐던 것처럼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각자의 생각에 빠져 주변을 신경 쓰지 못 했다.

첼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약 이름 모를 학자가 아이를 붙잡아 세우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강연자의 이름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이름이 뭐죠?”

던져진 질문에 아이는 들고 있던 종이를 반으로 접으며 말했다.

“루드 팩토리의 가하란입니다.”

* * *

“첫 학술회 때 계셨군요.”

첼리는 반응점검을 하는 가하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있었죠. 그날 이후로 겹이론을 이해할 수 있게 됐어요. 근데 그게 벌서 4년 전 일이네요?”

“그때는 제가 예의가 없었죠? 즐거운 자리인데 인상 팍 쓰고 올라와서 주절주절 얘기만 하고.”

“아주 약간 피곤해 보이기는 했어요. 건방진 느낌도 조금 있고.”

첼리는 농담이라 말하며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거병의 오른손이 호를 그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오른쪽도 연결됐네요. 14초. 이렇게나 빨리 찾을 줄은 몰랐어요.”

“정돈된 소스라 그래요. 파트장님의 실력이 좋은 거죠.”

“아닐걸요. 같이 일한 파트 사람들도 제가 짠 소스를 건드리려면 반나절은 투자해야 해요. 단자 배정을 좀 멋대로 해놨거든요.”

“그런가요? 전 패턴이 확실해서 오히려 편했어요.”

“패턴이요?”

가하란이 오른손을 움직였다. 4년 전 보았던 정밀한 시그니처가 다시금 눈앞에 펼쳐졌다.

평면상에 회로가 그어졌다.

“76에서 89. 그리고 101에서 103.”

“연관성이 없지 않나요?”

“이렇게 보면 관련이 없지만, 회로를 축에 세우고…….”

평면에 놓여 있던 회로가 반구 형태가 됐다. 첼리는 눈을 깜빡였다.

“이 상태에서 살피면 단자들이 일정한 선 위에 놓인다는 걸 확인할 수 있죠. 겹침 내에서도 안전성이 높은 단자에요.”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가하란이었다.

하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회로가 반구형으로 변하는 순간, 뇌가 정지해 버렸다.

눈으로 들어온 정보가 단순한 자료로 변해 뇌 구석에 쌓여만 갔다.

“치프님은 이게 이해가 된다는 거죠?”

“아…… 네.”

이건 겹이론이 아니었다. 회로를 포갠 수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무언가 다른 방식을 도입했다.

답답할 노릇이었다. 눈앞에 새로운 체계가 있는데 이해가 되질 않으니까.

첼리는 인상을 한껏 쓰다가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만 해둘게요. 아니, 기억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네요. 이 방식은 언제쯤 발표하실 예정인가요?”

“손봐야 할 곳이 많아서요. 이론 발표는 아직 먼 얘기에요.”

반구형을 유지하던 회로가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긴, 시그니처로 시뮬레이션 할 수 있다고 해서 현실에 구현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아직은 상상의 산물이란 거겠지?

“그것만으로도 놀랍긴 하네요. 발상의 차이. 루드의 메인치프님은 역시 대단하네요.”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아요.”

“여기서 더 배우게요? 안 돼요. 저희 일자리 다 사라지겠어요.”

가하란이 작게 웃었다.

“오토마타 소스 말고도 탈로스 제작과 액상근육 배합 쪽도 제대로 공부하고 싶어요.”

“혼자서 거병을 만드실 생각이에요?”

재미난 농담이라고 생각하며 미소 지을 때였다. 첼리는 가하란의 표정을 보며 깨달았다. 지금 한 말, 농담이 아니구나.

“가능하다면요.”

“어우, 쉽지 않을 텐데요.”

에둘러 말한 거였다. 혼자서 거병을 제작한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마법공학이란 거대한 테두리 안쪽에는 무수한 갈래가 존재했다.

회로에 빠삭하다고 해서 제조나 성형, 조합까지 능숙해지는 건 아니었다.

머리 회전이 중요한 영역이 있는가 하면, 손끝 감각이 중요한 부류도 있다.

잠깐만.

첼리는 가하란의 오른쪽 다리를 봤다.

열넷이란 나이에 둔 학회에서 주목받는 천재. 거병 모듈 제작 쪽에 지원을 나갈 만큼 박식하지만, 지금 가하란을 대표하는 건 의체 제작이었다.

의수와 의족에 들어가는 신경망 회로는 거병 모듈에 쓰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루드 팩토리의 의체는 만듦새도 훌륭하지만, 원활한 신경 연결이야말로 특장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둔에서 쓰이는 표준 모델도 치프님께서 만들었죠?”

“저 혼자 만든 건 아니에요.”

“듣기로는 혼자 만든 것과 다름없다고 하던데……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첼리는 가하란의 눈을 바라봤다.

“현재 사용되는 연결회로 말고도 다른 방식을 개발 중이신가요?”

“몇몇 개 생각해둔 건 있어요.”

“의체 제작을 하며 얻은 데이터. 거기서 뭔가 힌트를 얻으셨겠네요. 개인 제작에 성공하면 그걸 적용해보실 생각이죠? 그렇죠?”

“점술가 하셔도 되겠어요.”

가하란이 손목을 꺾었다. 거병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첼리는 접이식 사다리를 꽉 쥐었다.

“죄송해요. 생각보다 반동이 크네요.”

가하란이 머쓱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그보다 벌써 상부 모듈 전체를 훑어보신 건가요?”

“네.”

“이렇게나 빨리요?”

매뉴얼이 있고 보안 잠금도 다 풀어놓은 상태지만, 그렇다고 쳐도 진행속도가 말이 안 됐다.

“체임버 닫고 겔 상태를 확인해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럼요. 그렇게 하세요. 클랜장님의 특별 지시가 있었으니 마음껏 하셔도 돼요.”

첼리는 사다리를 내려와 뒤로 물러섰다. 가하란이 손짓하자 체임버 덮개가 닫혔다. 허리 실린더에서 찰랑거리던 액상근육이 한순간 파이프를 타고 퍼져나갔다.

파이프 주변으로 마나 고리가 생겨났다.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이 이뤄지고 있었다.

“손에 닿을 듯 말 듯 하면 질투가 나지만, 한없이 멀면 경외심만 든다는 게 이런 뜻이겠죠?”

첼리는 옆에 선 벨솔을 보며 말했다.

“경외심?”

“나중에 직접 보시면 알게 되실 거예요. 전 그런 회로 처음 봤어요. 겹이론을 처음 봤을 때만큼이나 이해가 되질 않아요.”

“뭘 본 건데?”

“말로도 설명할 수 없어요. 뇌는 기억하고 있는데, 그걸 표현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네요.”

벨솔이 귀에 얹고 있던 펜을 손에 쥐더니, 그대로 첼리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생각보다 아파서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너를 상대하는 너희 쪽 애들도 비슷한 심정이니까 투덜대지 마.”

“제가요? 전 그래도 이해하기 쉽게 말해줘요.”

“저 표정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뒤를 돌아보니 함께 온 파트원들이 뚱한 얼굴을 한 채 바라보고 있었다.

첼리는 눈썹을 긁은 후 거병을 바라봤다.

“아무튼 저 안에 있는 애는 정말 달라요. 우리랑 같은 종이 아닌 것 같다니까요.”

“이제 애라고 부를 수 없고, 같은 인간 맞아.”

축 늘어졌던 거병 다리가 꿈틀댔다. 트레드밀이 올라오자마자 거병이 첫 걸음을 뗐다.

“2분 31초. 하부 모듈 세부조정 끝냈네요. 이게 말이 된다고 보세요?”

눈을 가늘게 뜨고 벨솔을 바라봤다. 그때, 거병이 뛰기 시작했다.

걷는 게 아니라 전력으로 달린다.

요란한 소리에 첼리는 두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출력 측정 좀 해줘요!”

제어판 앞에 서 있는 연구원에게 외쳤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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