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18화 (291/558)

제318화

“3번 창고 물건 이쪽으로 빼고! 저기 선로 막지 말고!”

자동수레 앞을 막던 사람이 헛숨을 들이켜며 옆으로 비켜섰다. 정지했던 자동수레가 선로를 따라 바깥으로 이동했다.

가하란은 분주히 움직이는 ‘밤나비’ 클랜 사람들을 바라봤다.

“정신없지?”

뒤에서 불쑥 나타난 벨솔이 말했다. 인사하려고 입을 떼려 할 때 벨솔의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잠을 격하게 주무셨나 봐요.”

중력을 거스르듯 하늘을 향해 이리저리 뻗친 머리카락이었다. 벨솔이 늘어지는 하품을 하며 머리를 눌렀다.

“바빠서 신경 쓸 틈도 없어. 그래도 이 정도면 봐줄 만한 거야. 저기 봐.”

벨솔이 가리킨 곳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남자가 박스를 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침대에 눕혀야 할 것처럼 보였다.

“부지 이전이라도 하나요?”

“그런 거라면 차라리 낫지. 순차적으로 내보내기로 한 거병들을 내일까지 전부 꺼내놔야 해.”

모듈이 실린 수레가 눈앞을 지나갔다. 하나 둘 셋,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 멍한 표정을 보아하니 전혀 모르는 눈치네. 하긴, 루드 팩토리 쪽에는 연락 갈 일이 없을 테니.”

벨솔이 말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대단한 비밀도 아니니까 말해줄게. 어차피 내일이면 코흘리개들도 알게 될 일이니.”

벨솔이 개방한 창고 정문을 통해 밖을 바라봤다.

“마수 토벌. 우리 늙은 여우님께서 마음을 잡은 모양이야.”

늙은 여우. 디온 사령관을 뜻하는 것이다. 가하란은 맞은편 조립실에서 완성되어가는 거병들을 바라봤다.

“저 정도 물량이 동원될 정도라면…….”

“이게 끝이 아니야. 마공장을 보유한 제작 클랜들은 전부 다 밤을 새웠을걸?”

“사냥이 아니라 전쟁 준비네요. 둔 주둔군만 움직이는 건가요?”

“용병들한테도 긴급 협조문을 띄웠어. 서쪽에 뭐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씨를 말릴 생각인 것 같아.”

이 정도 규모라면 보안대책을 세울 수도 없을 것이다. 내일이면 민간에도 소문이 쫙 퍼지겠지. 벨솔이 말한 대로 코흘리개들도 전쟁을 떠올리게 되리라.

“군부뿐만 아니라 시의회와 학회도 힘을 보탠 것 같네요.”

“상인회도 협력 중이야. 덕분에 우리만 죽어나지. 협조하지 않으면 도시안전법에 따라 지독한 면담을 하게 될 테니까.”

쿵, 쿵, 쿵.

완성된 거병이 창고를 빠져나갔다. 매끄러운 외장갑을 타고 햇빛이 미끄러졌다.

“저게 밤나비의 주력 모델이죠?”

“어. 저번에도 한 번 봤지? 룬 no.3”

전고 3.6미터. 범용 트레드밀에서 측정한 출력은 80엘론.

오토마타의 서포팅과 탑승한 기사에 따라 바뀌겠지만, 기본 출력만 놓고 보면 흠잡을 곳이 없었다.

탈로스의 밸런스도 훌륭하고 하부 모듈의 안정성 역시 검증이 끝났다.

“내가 봐도 잘 만든 모델이야. 이번 마켓에서도 반응이 좋았고. 클랜장이 기를 쓰고 장인들을 붙잡아 놓은 성과가 이렇게 나타나는 거지.”

벨솔이 턱짓하며 몸을 돌렸다.

“남의 거 보고 침 흘리지 말고 이쪽으로 와. 네 거는 따로 준비돼 있으니까.”

선로를 따라 건너편 제조실로 넘어갔다. 액상근육이 지하 파이프를 따라 맹렬하게 흐르고 있었다.

“근데 정말 괜찮겠어? 골리앗의 피는 안정화가 끝났다고 해도 실전에 투입하기에는 좀 이른 감이 있는데.”

“지금 당장 쓸 건 아니니 괜찮아요. 무엇보다 교수님도 실험해보고 싶지 않나요?”

“나야 물주가 허락하면 언제든 환영이지. 안 그래도 눈치가 보이긴 했어. 테스트한다고 날려 먹은 실린더가 한두 개여야지.”

“제 건 날려 먹지 말아 주세요.”

“최대한 노력해 볼게.”

눈을 찡긋거리며 걸음을 멈추는 벨솔이었다.

“이게 너한테 갈 아이야.”

가하란은 고정대에 바짝 붙어 있는 거병을 바라봤다.

외장갑이 벗겨져 있어 탈로스와 실린더, 액상근육 파이프와 제어 장치들이 고스란히 노출돼 있었다.

“요구한 대로 오토마타는 미세조정 안 해놓을 거야. 근데 커스텀 제대로 할 수 있어?”

“열심히 만져봐야죠. 신형에 손대보는 건 처음이니까요.”

“시뮬레이션이 까다로울 거야. 너도 알다시피 유사정령은 제작자의 개성이 반영되니까. 나도 여기 와서 처음 유사정령을 들여다봤을 때 어질어질했어. 유사정령 제작 파트장을 붙잡고 며칠을 떠든 끝에 겨우 시뮬레이션 할 수 있었고.”

가하란은 거병 가까이 다가갔다.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쇠에 얼굴이 비쳤다. 정성 들여 광택 처리를 한 것 같아 살짝 웃음이 나온다.

“안 보이는 곳까지 꽤 신경 썼지? 그만큼 루드와의 거래를 중요시한다는 거야.”

벨솔이 손목에 감는 밴드를 내밀었다. 널버스 볼팅, 시동키였다.

“시그널 정렬은 해둔 상태야. 기동하면 바로 눈을 뜰 거고. 물론 움직일 수는 없겠지만.”

“아직 정식으로 인도받은 거 아니잖아요.”

가하란은 시동키를 보며 말했다.

“뭐 어때. 어차피 곧 너한테 갈 건데. 자, 받아서 인사 정도는 해. 지원시스템이긴 하지만.”

벨솔이 시동키를 던졌다. 손안에 떨어진 시동키를 잠시 바라보다가 손목에 찼다.

“문제 생기면 교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거죠?”

“어릴 땐 귀여운 맛이 있었는데, 크고 나니까 안 귀엽네.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얼른 타봐. 그리고 교수님이 아니라 수석님.”

가하란은 눈웃음 지으며 몸을 돌렸다. 지지대에 발을 걸치고 있는 힘껏 밀었다. 개방된 체임버 안쪽으로 몸을 반쯤 들이밀었다.

“제법 넓네요.”

가하란은 몸을 비틀어 의자에 앉았다. 시야 아래로 벨솔이 보인다.

“웨이브겔 사용량을 줄였거든. 덕분에 체임버 크기도 넓힐 수 있었고.”

“충격량 문제를 해결한 모양이네요.”

“사용자에 대한 부담이 약간 증가하긴 했지만, 구조안정성이 높아졌으니까. 정면에서 맞지 말고 측면에서 맞으면 기존과 똑같을 거야.”

“……무서운 농담이네요.”

가하란은 시동키를 매만졌다. 정전기가 인 것처럼 손목 주변이 따끔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나들이 분주하게 회로 사이를 오가고 있을 것이다.

가하란은 감았다 뜨는 것으로 정보의 세계로 발을 들이밀었다. 시동키에서 길게 뽑혀나 온 여러 가닥의 선들이 방사형으로 뿌려져 체임버 안쪽을 가득 채웠다.

“살펴보고 있어. 난 저쪽 일 때문에 잠깐 다녀올 테니까.”

“예, 편하게 일 보세요.”

벨솔이 자리를 비웠다.

가하란은 안쪽 주머니에 넣어둔 감각기를 꺼내 손에 꼈다. 착 달라붙는 가죽의 질감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안녕.”

우측 상단에 박혀 있는 램프가 점멸하다가 이내 청색이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지원시스템 ‘웰’입니다.

“유사정령에 이식된 시스템이야?”

-아닙니다. 커넥터를 통해 임시로 관리번호 192를 조정 중입니다.

가하란은 손목을 좌우로 비틀며 말했다.

“기체 제원에 대해 알 수 있을까?”

-기동중인 유사정령의 버전은 2.32, 오토마타는 3.33. 탈로스는 DTT-3입니다.

“액상근육은?”

-알 수 없습니다.

골리앗의 피는 공개 자료가 아닌 건가.

“감각확장은 몇 단계까지 가능해?”

-임시점검 상태에서는 1단계까지만 지원합니다.

“연결해줄 수 있겠어?”

짧은 침묵이 찾아왔다. 가하란은 고개를 들었다. 체임버 안쪽을 가득 채운 선들이 꿈틀대더니, 몸을 향해 쏟아졌다.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거리에 나선 것처럼 선들이 몸 곳곳에 촘촘히 박혔다.

테리의 거병을 커스텀하면서 몇 번 본 광경이지만, 볼 때마다 놀라웠다.

유사정령 말단에 존재하는 해석불가한 회로가 인간의 신경망을 읽어내 동조를 일으킨다.

복잡한 조종장치 없이 거병을 기동 가능케 하는 신비로운 회로. 베이스 아키텍쳐가 없었다면 거병을 움직이기 위해 수많은 조작장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거병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을 테지.

최초의 오토마타, 베이스 아키텍처를 설계한 사람은 이 난해한 구조를 어떻게 단순화한 걸까?

“선대의 지혜는 이해할 수 없으나 이용은 가능하지.”

시야가 겹쳤다. 거병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과 육안으로 본 세상이 빠르게 교차했다.

호흡을 고르며 기다렸다. 이윽고 시계가 안정화됐다.

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육체만 움직일 뿐, 거병의 몸체는 움직이지 않았다.

-밸런싱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각 모듈간 연결이 온전치 않습니다.

웰이 빠르게 설명했다.

“내 쪽에서 지원 소스를 변경할 수 있을까?”

-권한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정보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니 온몸에 박혀 있던 마나의 선들도 사라졌다.

-가능합니다. 서포터를 이용하시겠습니까?

“아니.”

손가락을 꼼지락거린 후 검지를 가볍게 튕겼다. 감각기가 반응하고 곧이어 시그니쳐가 펼쳐졌다.

정보의 세계에서 보았던 선들과 유사한 형태의 선이 손가락 끝에서 뻗어 나와 체임버를 가득 채웠다.

“오토매틱 매뉴얼은 어디 거야?”

-카일럼브릴 Set 3입니다.

“학회 거네. 살펴본 적이 있어.”

선을 잡아끌었다. 심상세계가 투사된 시뮬레이션이 눈앞에 펼쳐졌다.

“연결할 때마다 반응점검을 해줄 수 있어?”

-실행하겠습니다.

왼손 엄지와 검지로 나풀거리는 실선을 붙잡아 끌었다. 오른손을 편 상태로 가볍게 위로 들어 올렸다.

도식화된 회로가 공중에 나타났다. 오른손을 몇 번 더 움직였다. 투영된 회로가 겹겹이 쌓이며 입체적으로 변했다.

“왼손 손목관절부터.”

신경회로를 연결하고 반응을 기다렸다. 신체에 자극이 오지 않았다.

매뉴얼을 기반으로 했으나 단자 몇몇 곳을 다르게 쓰는 것 같았다.

개발자에게 물어보면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지만, 가하란은 수수께끼를 풀 듯 하나씩 회로 접속단자를 바꿔나갔다.

이윽고 손목이 시큰해졌다.

쓰아아, 액상근육이 파이프를 타고 흘러갔다. 체임버 안쪽으로 전해지는 소리에 가하란은 빙긋 웃었다.

-연결됐습니다.

첫 걸음은 뗐다. 이제 두 번째 걸음을 떼서 방향을 잡아야한다.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연결하고 반응성 체크하고. 몇 번을 반복하니 사용 단자를 특정할 수가 있었다.

개발자의 취향을 엿본 것이다.

그렇게 선 사이에 파묻혀 오토매틱 소스를 손볼 때였다. 아래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가하란은 거병과 연동된 시야를 끊고 육안으로 체임버 밖을 내다보았다.

벨솔이 먼저 보였고 주변에 모여든 다른 사람들도 눈에 들어왔다.

“……일에 방해가 됐나요?”

“아니아니, 하던 거 계속해.”

벨솔이 손을 내저었다.

머쓱하게 웃으며 작업을 이어가려 했는데, 시선이 신경 쓰였다.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나는 신기해서 구경할 뿐이지만, 이쪽 분은 하고 싶은 얘기가 있긴 할 거야.”

벨솔이 손을 들어 옆에 서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이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청색 연구복을 매만지며 앞으로 걸어왔다.

“웰의 지원현황을 살펴보고 왔어요. 지금 오토매틱 매뉴얼 소스를 변경 중인 거죠?”

“네. 혹시 건드리면 안 되는 거였나요?”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여자가 거병의 왼손을 바라봤다.

“아까 보니까 움직이던데, 이미 반응점검을 끝낸 건가요?”

“지금 하고 있어요. 왼쪽 모듈부터 천천히 보려고요.”

“다시 한번 움직여 주실 수 있나요?”

어렵지 않은 주문이었다. 가하란은 신경망을 재연결해 거병의 왼손을 움직였다.

멀거니 바라보던 여자가 한걸음 더 다가왔다.

“카일럼브릴을 이전에도 다뤄보셨나요?”

“네. 커스텀할 때 그쪽 버전을 썼어요.”

“하지만 이 모델에 적용된 건 제가 몇몇 곳을 바꿔서 손대기 까다로웠을 텐데요.”

가하란은 체임버 밖으로 상체를 살짝 내밀었다.

“개발자분이셨군요.”

“네. 첼리에요.”

“깔끔하게 정돈된 수정버전이라 단자를 찾아내기 쉬웠어요.”

“설마…… 하나하나 전부 대입해본 건가요?”

“예. 무식하지만 이게 확실해서요.”

“세상에.”

헛웃음을 내던 첼리가 몸을 홱 돌렸다.

“잠시만요! 사다리 좀 가져올게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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