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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317화 (290/558)

제317화

“군이 발령한 ‘긴급 협조’는 어느 정도의 강제력이 있는 거야?”

밀레나는 단검집을 손에 쥐며 질문했다. 오래된 단검집에서 뽑혀 나온 단검은 찐득찐득한 기름에 잠겨 있었다.

“사유 없이 불참하면 눈에 보이는 불이익이 당장 내일 찾아오겠지.”

엄마가 대답했다.

“부탁을 가장한 협박이네.”

“도시 시설을 이용한 대가인 거지. 불응하고 싶으면 도시를 떠나라, 그런 거고.”

“클랜들이 반발하지 않아? 예전처럼 막무가내로 굴면 난리 날 텐데.”

“군, 학회, 상인회, 시의회. 네 곳이 합의했으니 클랜도 고개 빳빳이 들 수는 없지.”

쿵, 소리와 함께 먼지가 일었다. 밀레나는 코밑으로 날아든 먼지를 손부채로 쳐냈다.

“삼촌, 살살 좀 놔.”

손을 툭툭 터는 하우스를 보며 말했다.

“떠들 시간 아껴서 이것도 마저 점검해.”

“나 혼자 떠들었나. 저기 계시는 필렌 씨도 같이 떠들었어.”

“넌 말단, 저긴 대장. 더 설명이 필요해?”

엄마와 하우스가 서로 바라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예, 말단이 잡일 해야죠. 그럼요, 네, 그럼요.”

교체용 의수와 의족을 하나씩 꺼내 점검했다. 점검이라고 해봤자 배터리를 연결해 작동 여부를 확인하는 정도지만.

“둔이 총력을 기울여야 할 정도면…… 군집이라도 발견된 걸까요?”

의족을 어깨에 이며 물었다. 하우스가 의족을 가져가며 말했다.

“알 수 없어. 자세한 내용은 오늘 직접 들어야 하니까.”

“저도 가도 되는 거죠?”

“참석 가능한 인원은 둘. 그러니 넌 애들하고 장비 점검이나 해.”

의족을 살펴보던 하우스가 “이건 빼놔라” 라며 의족을 던졌다.

“단장님! 슬슬 출발 하시죠. 시간 됐는데.”

누군가가 외쳤다. 엄마와 하우스가 옷을 챙기고 일어섰다.

“다녀와서 얘기해줘.”

떠나는 엄마의 등에 대고 말한 후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 * *

“……이상입니다.”

필렌은 설명을 마친 군인을 바라봤다. 자신을 루카라고 소개한 군인은 담담한 눈으로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마리. 겨우 한 마리 잡으려고 이 인원이 전부 투입되는 거라고?”

필렌은 왼쪽으로 눈을 돌렸다. 절벽늑대 용병단이었나, 익숙한 마크가 눈에 들어왔다.

거수하고 질문한 용병단장을 향해 루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최전선에 투입되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디까지나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대비책입니다.”

“‘날뛸지도 모르는 동물과 기타 마수를 저지해야 한다.’ 말로는 간단한데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거든?”

“말씀해 보시죠.”

“마수가 정확히 어떤 능력을 써서 동물을 조종하는 거지?”

“파악되지 않은 부분입니다.”

여기저기서 쯧,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본체가 되는 마수의 특징은?”

“그건 여러분이 아실 필요가 없습니다.”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본대가 다 뒤져서 우리가 나서야 할지도 모르는데.”

“만일 본대가 괴멸하는 상황이 온다면…….”

루카가 낮아진 톤으로 말을 이었다.

“여러분도 막을 수 없다는 뜻이니 도시를 버리고 탈출하시면 됩니다.”

“정말로 전면전을 준비 중인가 보네. 이 거대한 도시가 단 한 마리의 마수를 상대로 말이야.”

“상부에서는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혹시 모를 일 따위는 만들지 않겠다는 게 사령관님의 뜻입니다.”

“낭비 아닌가?”

“모자란 것보다는 낭비가 낫다고 봅니다.”

절벽늑대 용병단장이 씩 웃었다.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드네.”

차갑게 굳어 있던 루카의 얼굴에도 살며시 미소가 걸렸다.

“후방 배치에 뚫리면 도망치라는 말까지 나왔으니 더 물을 게 없네. 눈치 살살 보다가 엿된 거 같으면 죽어라 튈 준비나 해야지.”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나왔다.

루카가 좌중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더 하실 말씀이 없다면 설명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죠.”

담당구역만 사수하면 되는 단순한 작전이라 긴밀한 협업 같은 건 필요도 없었다.

필렌은 옆에 앉아 있는 하우스를 툭 쳤다. 볼일 다 봤으니 떠날 시간이었다.

일어서려 하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절벽늑대 단장이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기사님이 여기 계셨네.”

“받은 봉토도 날아간 판에 기사는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하신다. 아른고개의 기사님께서 말이야.”

절벽늑대 단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손뼉을 두 번 쳤다.

“자자, 우리 중 제일 잘 나가는 양반께서 한 말씀 하신다고 하니 모두 경청합시다.”

일선에서 마주친 용병들이 킥킥 웃고 있는 게 보였다. 필렌은 벌떡 일어서려는 하우스를 손으로 저지했다.

“기왕 말할 거면 앞에 나가는 게 좋겠지? 내가 옆얼굴 보다는 정면이 자신 있어서 말이야.”

루카가 말없이 옆으로 비켜섰다. 필렌은 눈짓으로 고마움을 표시한 후 작전판 앞에 섰다.

“누군가 싶었는데 절벽늑대의 좀생이였어. 지난번에 마켓에서 거래처 문제로 나한테 화내더니, 그 앙금이 아직도 남아 있는 모양이야.”

“앙금은 무슨. 나 그렇게 속 좁은 남자 아니야.”

절벽늑대 단장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아무튼 나왔으니 한마디 해야겠지? 마수사냥꾼 노릇하면서 여러 인간을 만나왔어. 여기서도 나랑 마주친 인간이 몇몇 있을 거야, 그렇지?”

용병 몇몇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개중에는 날 어려워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유 없이 싫어하는 새끼도 있었고, 싫어하는 건 넘어 증오하는 놈도 있었지. 이유는 알아. 내가 1등 귀족이었으니까.”

필렌은 팔뚝에 묻은 먼지를 툭툭 쳐냈다.

“이해해. 몇몇 놈들 눈에는 내가 악의 축으로 보였을 테니까. 나는 여타 귀족과 달랐다고 말한들, 허황된 소리처럼 들리겠지.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필렌은 절벽늑대 단장 앞으로 걸어갔다. 고개를 쳐들고 있는 단장을 똑바로 바라봤다.

“불만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 나름 유명해서 찾기는 쉬울 테니까.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다면, 죽이러 와도 돼. 하지만 돈은 두둑이 들고 오는 게 좋을 거야. 내 돈으로 장례식 치를 수는 없잖아?”

웃음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유치한 도발은 유치하게 되받아쳐야 한다.

근데, 이놈이 이렇게까지 날 싫어할 이유가 있었나? 거래처 빼앗긴 게 그렇게 속이 아팠나?

“찾아가도 된다고?”

“얼마든지.”

“그렇다면 꽃다발을 준비해 곧 찾아가지.”

“묘비 옆에 둘 꽃도 미리미리 준비하는 게 좋긴 해.”

“아니. 당신을 위한 꽃이야. 내 사랑을 위한 꽃.”

“사, 뭐?”

반사적으로 왼쪽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검집을 차고 있었다면 바로 뽑아내 목을 쳤을지도 모른다.

“나 킹우단! 고귀한 기사 필렌에게 내 남은 생을 바치리라!”

절벽늑대 단장이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그와 동시에 다른 용병들도 일어서며 괴상한 고백을 해왔다.

멍하니 바라보다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터진 건, 아들뻘 되는 놈이 사랑을 입에 담을 때였다.

“미친 새끼들.”

필렌은 고개를 내저었다. 휘파람 부는 놈들 사이를 비집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뒤따라오던 하우스가 숨넘어가듯 웃는 게 보였다.

“저것들 단체로 정신 놓은 거야?”

“그건 아닐 겁니다.”

“근데 왜 저래?”

“왜 저러긴요. 다들 대장님을 좋아해서 그런 거지.”

“진심으로 하는 말 아니지? 지금 닭살이 돋아나다 못해 살갗이 더 벗겨질 것 같으니까.”

하우스가 침으로 번들거리는 입가를 닦아내며 말했다.

“절반은 그냥 놀리는 겁니다. 분위기 따라간 거죠. 근데, 절반은 진심을 겁니다.”

“날? 왜?”

“경외하니까요. 존경해 마지않는 사람이 곁에 있으니까 주체를 못 하는 거죠.”

“몇 번 마주쳤을 때 그런 눈빛들이 아니었는데.”

“사내놈들은 원래 그럽니다. 판 깔아주기 전까지 쭈뼛쭈뼛하다가 이렇게 기회 생기면 냅다 지르고 보는 거죠. 특히 그 철벽늑대 놈은 제대로 꽂힌 거 같아요.”

“다음에 보면 혀를 반쯤 잘라야겠어. 헛소리 못 하도록.”

한 방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뭐,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내가 오해하고 있었네. 다들 날 기피하고 싫어하는 줄 알았거든.”

“싫어하는 애들도 있지만, 좋아하는 쪽이 압도적으로 많을 겁니다. 칼밥 먹고 사는 놈들은 다들 아른고개의 기사를 좋아하니까요.”

“옛날얘기야.”

“다들 옛날 사람이에요.”

“어린놈도 있던데?”

“걔는 뭐…… 취향이 독특한가 보죠. 아줌마를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니까요.”

필렌은 하우스를 쓱 쳐다봤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너도 그놈들처럼…….”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우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사과하십시오. 해도 될 말이 있고 해선 안 될 말이 있는 겁니다. 무엇보다 전 어린 여자가 좋습니다.”

“……더럽게 미안하네.”

하우스가 웃으면서 검을 집어넣었다.

“농담이고, 흑심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닙니다. 근데 같이 생활하다 보면 알게 되잖아요. 대장님 마음에 빈자리가 없다는 걸.”

“당연하지. 내 남편만한 남자는 이 세상에 없는걸? 일단 생긴 것부터가 다들 험악해. 우리 남편처럼 둥글둥글하니 귀여워야 하는데.”

“예, 그러시겠죠. 사실 저도 죽은 마누라밖에 없습니다.”

“그런 것치고 데슨에 있을 때 여자랑 같이…….”

“사생활은 지켜주시죠.”

픽 웃은 후 고개를 들었다. 새 몇 마리가 지붕에 앉아 요란스럽게 지저귀고 있었다.

“모레 나갈 때 이번에 새로 받아온 거병도 가져가자. 테스트 할 겸.”

“전부 다 나가는 겁니까? 밀레나도?”

“오지 말라고 한들 얌전히 말을 들을까?”

“아니죠. 따라오겠죠. 아주 대놓고.”

시끄럽게 울던 새들이 훌쩍 날아올라 서쪽으로 향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말을 끝맺기 전에 하우스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상한 소리 마세요. 그 자그마한 아가씨는 대장님밖에 못 다뤄요. 그러니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대장님은 살아계셔야 합니다.”

“늙는 것도 서러운데 병까지 앓아야 해?”

“그럼 곱게 늙기만 하세요.”

하우스도 서쪽을 바라봤다.

“도시에 주둔한 모든 군이 나선다고 하니 보통 놈은 아니겠죠. 지휘관이 말한 대로 최선전이 뚫리면 그냥 내빼자고요. 영웅놀이는 하지 말고. 용병은 용병답게, 받은 만큼만 하자고요. 아시겠죠?”

“영웅놀이 한 적 없어.”

“없긴요. 몇 번을 봤는데.”

필렌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네 말대로 안 되면 튀어야지. 그게 맞는 거고.”

“예. 제발 도망칩시다.”

도심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이 시간에 맞춰 흘러가고 있었다. 뛰어노는 아이들, 홍보하는 기계인형, 가게 벽을 보수하는 주인과 그 옆에서 멀거니 하늘을 보는 노인까지.

뚫리게 되면 이 모든 게 꿈처럼 사라질 것이다. 둔의 상부는 그걸 알고서도 적진으로 진격으로 결정했다.

서쪽의 마수는 무엇일까?

무엇이기에 윗놈들이 전력을 다해 공격을 강행할까.

바라건대 도시 방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길. 부디 그 결정에 허욕이 끼어있지 않길.

필렌은 허물어진 옛 중앙부와 그 옆에 새로이 건설된 군 중앙부를 바라봤다.

늙은 여우는 여전히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겠지?

“욕심은 적당히 부립시다.”

디온은 망상을 쫓는 이가 아니었다. 보신에 집착하지만, 위험한 도박수는 절대 던지지 않는 남자.

디온이 작전을 수립했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잃을 게 많은 노인이니까.

어쩌면 루카의 말대로 시시하게 끝날지도 모른다.

필렌은 몸을 돌렸다. 2차 저지선이라고는 하지만 준비해야 할 건 많았다.

“가자.”

하우스에게 말한 후 걸음을 뗐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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