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6화
취조부가 사라졌을 때 유렐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인사부 수장 자리가 자신의 것임을.
취조부에서 인사부로. 간판은 바뀌었어도 하는 일은 그대로였다. 인간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
“날씨가 좋군요.”
유렐은 향초를 하나 집어 들며 말했다. 가게 주인은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었다.
“이걸로 주시죠.”
포장된 향초를 들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시원스럽게 난 창문 너머로 물품을 정리중인 가게 주인이 보인다.
유렐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변동사항 없음. 관찰 목록에 오른 대상자는 오늘도 성실한 장사꾼을 연기 중이었다.
분배소 주요 물품을 타 도시로 빼돌리는 위법행위. 도시 내 거래로는 크게 벌 수 없으니, 목숨을 내걸고 외부로 눈길을 돌린 것이다.
잡아넣으려면 지금이라도 지하 깊숙한 곳에 넣을 수 있다. 하지만 당분간 내버려 둘 것이다. 덜 여문 과실을 따는 건 아쉬우니까.
손끝에 침을 발라 수첩을 넘겼다. 향초 가게가 파릇한 열매라면, 이쪽은 농익은 열매였다.
유단.
수확할 시기가 온 것이다.
증거는 없고 정황만 있는 상황이라 다들 눈치 보고 있지만, 유렐은 뒷짐 지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지난 번 봤을 때 확신이 들었다.
학회장의 죽음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다.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유렐은 눈웃음 지으며 휘갈겨 쓴 문장을 봤다. 이건 학회장의 딸, 프레나를 통해 얻어낸 정보였다.
조심스러웠고, 말을 아낄 줄 아는 제법 똑똑한 여자였지만 감정을 두드리는 화법에 중요한 단서를 토해내고 말했다.
사건이 일단락되고 장례식까지 치른 마당에 불안에 떨 이유가 무엇일까.
유렐은 뒤틀리는 소리를 들었다. 유단 안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건 취조부에 있을 때 수없이 들어온 반가운 소음이기도 했다.
인간의 몸은 결코 진실을 감추지 못한다. 유렐은 입이 아닌 몸으로 진실을 듣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 마지막으로 확인한 후 절차를 밟을 것이다. 그럴듯한 껍질 안쪽에서 와들와들 떨고 있을 유단의 영혼이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안내하겠습니다.”
몇 번이나 봐서 제법 익숙해진 가정부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섰다.
흠, 유렐은 심드렁하게 벽면을 훑었다.
달라졌다. 걸려 있던 그림들이 죄다 바뀌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카펫의 재질도, 문양도 바뀌었다.
“인테리어가 바뀌었군요.”
“네. 유단 님께서 직접 손을 보셨어요.”
“그렇습니까?”
취향은 오묘한 것이다. 숨기려 해도 은연중에 드러나는 것이 취향이었다.
실내장식이야말로 취향의 정수이고, 거주자의 내적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지표였다.
심경에 변화가 생긴 걸까?
“아주 깔끔해졌군요. 언제쯤 바꾼 겁니까?”
물음에 가정부가 공손히 대답했다.
“사흘 전이요.”
반길만한 변화일까, 아니면 쓴맛을 안겨줄 변화일까. 생각하던 찰나에 응접실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유단의 눈을 들여다보는 순간, 유렐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일이 제대로 꼬였군.
* * *
“건진 건 없다는 거군요.”
디온은 탄드라 교수를 바라봤다.
“동물과 소통 가능한 마법사도 생각을 읽어내지 못했어요. 오히려 심상세계가 역으로 공격당할 뻔했죠.”
헛웃음이 나온다. 동물을 이용한 탐색이라니. 동시에 섬뜩하기도 했다.
“놈이 동물을 조종해 도시를 습격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어요.”
외벽을 세웠다고 한들 쥐새끼들이 드나들 틈은 널리고 널렸다. 전염병을 몸에 두르고 곡창에 들락거리기만 해도 골치가 아플 것이다.
고민하던 찰나였다. 맞은편에 있는 남자가 손을 어깨 높이로 들어 올렸다. 둔에 모인 랍파들의 대변자, 호반이었다.
“매들을 통해 알아본 바, 도시 서쪽으로 도망친 동물의 수는 많지 않았습니다. 마수의 말대로 힘에 의한 조종이 아닌 협력체계라면 마수가 부릴 수 있는 동물의 수는 많지는 않겠죠.”
“마수의 말을 믿는다면 그렇겠죠.”
디온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찌 됐든 우리도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그 괴물이 도시를 관찰하고 떠났습니다. 이게 뭘 의미하는 건지, 돈만 만지고 사는 저보다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시겠죠.”
말을 마친 세잔이 물로 입을 축였다.
시선이 한순간 디온에게 몰렸다.
“전선은 본진과 멀면 멀수록 좋죠.”
“자기 집 앞마당에 피가 흐른다면 좋아할 사람이 없겠죠.”
디온은 세잔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 적대적 행위를 했으니 우리도 보답할 겁니다. 시장님께는 이미 말을 전해뒀습니다. 회의 결과에 따르겠다는 말도 받아왔고요.”
공생.
있을 수 없는 단어였다. 집안에 바퀴벌레가 들어왔다면 둘 중 하나였다. 밟아 죽이거나 빗자루로 쓸어버리거나.
“군은 물론 둔에 머물고 있는 모든 용병단에게 협조문을 띄울 겁니다. 클랜 쪽도 마찬가지고요. 적은 미지의 생물입니다. 여지를 남기지 않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축출해내야 합니다.”
디온은 탄드라를 바라봤다.
“물론 학회에서도 협력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임시긴 하지만 제가 전권을 받아왔어요. 학회는 이번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상인회 역시 마찬가집니다.”
세잔이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마무리 짓고 작전을 수립한 다음 다시 모이기로 합시다.”
회의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남은 건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탄드라, 그리고 세잔 둘 뿐이었다.
디온은 닫힌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표본을 얻어야 합니다. 생포할 수 있다면 생포하는 게 가장 좋겠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방금 사령관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만.”
세잔이 한쪽 눈을 찌푸렸다.
“이게 끝이 아닐 겁니다. 또 불청객이 찾아오겠죠. 이번 마수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마수와 전혀 다릅니다. 껍질부터 체액까지, 들출 수 있는 건 모두 들춰서 약점을 파악해 둬야겠죠.”
“옳으신 말씀입니다만…….”
세잔이 고개를 천천히 움직였다. 탄드라를 지그시 바라본 후 디온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것 말고도 다른 목적이 있으실 텐데요?”
디온은 입가를 매만졌다. 세잔과 탄드라. 둘 다 머저리는 아니었다. 당연히 저 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서장님도 관심이 있으신가 봅니다.”
“사령관님만큼은 아니겠지만, 저도 늙는 게 두렵습니다. 아니, 어느 누가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을까요.”
입을 닫고 있던 탄드라도 슬쩍 끼어들었다.
“텅 빈 인간을 봤을 때 저도 가능성을 엿봤어요. 심상세계 자체가 사라진 인간, 아니, 인형. 거기에 다른 심상세계를 주입할 수만 있다면 영생은 실현할 수 있겠죠.”
“다들 같은 생각을 하셨군요.”
디온은 깍지를 꼈다.
“그날 지하실에서 있었던 일은 최측근만 알고 있습니다. 학회도 마찬가지겠죠?”
탄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성이 있는 마수입니다. 거래가 통할지도 모르죠. 그게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고요. 그러니 서쪽의 불청객은 생포해야 합니다.”
“제거가 아닌 포획 쪽으로 계획을 짠다면 사람들이 반발하지 않을까요?”
세잔이 말했다.
“생포해야 하는 이유는 수없이 만들어낼 수 있어요. 설득력을 더해주는 건 탄드라 교수가 해주면 되고. 다들 학회를 신용하니까요.”
탄드라가 낮게 신음했다.
“영생은 탐나지만 우리가 위험에 처할 가능성도 있어요. 심상세계를 건드는 건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니까요.”
“실험재료라면 자유롭게 구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디온은 탄드라에게 다가가 어깨를 살며시 붙잡았다.
“교수님. 무얼 걱정하는지는 압니다. 하지만 우리가 도덕 같은 것에 충실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겠죠.”
“……그렇겠죠.”
“또한 우리만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인류가 그간 도달하지 못한 영역으로 이끌 수 있어요. 이런 생각 해보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이 1년만 더 살았다면 세상이 바뀌었을 텐데. 그 천재가 단명하지 않았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 텐데.”
눈을 살며시 감았다 뜨는 탄드라였다. 망설임은 사라진 것 같았다.
“희생은 언제나 뒤따르는 법이었죠.”
“맞습니다. 그리고 두 분은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연구 성과를 검증해야 하는 시기가 왔을 때 제가 가장 먼저 실험대에 오를 테니까요.”
디온은 흐뭇한 웃음을 두 사람에게 보여줬다.
“이 늙은이가 무사히 살아난다면 기뻐하며 두 분도 젊어지면 되는 거고, 제가 죽게 된다면 그걸 발판삼아 새롭게 실험을 준비하면 됩니다. 좋지 않습니까?”
“사령관님께서 젊어지시면 그땐 말을 놓아야 할지, 높여야 할지.”
세잔이 웃음을 섞어가며 말했다.
“그때 가서 생각해 봅시다.”
그때 가서.
* * *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러지.”
친절하게 웃으며 문을 닫는 유단이었다. 유렐은 현관 앞에 서서 몇 분간 숨을 골랐다.
“빌어먹을.”
바뀌었다.
사람이 바뀌었다.
외형도 같고 행동거지도 똑같지만, 속에 든 알맹이는 완전히 바뀌었다.
단언컨대 45년 인생 역사상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눈앞에 사람이 있는데 그 어떤 정보도 가져올 수 없었다.
앞에서 말하는 게 사람이 맞는지, 그런 어처구니없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유렐은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다가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채 밖에 나와야 했다.
대화야 수도 없이 했다. 조급한 마음에 엉뚱한 질문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유단은 틈이 없었다.
말 못 하는 금수도 면상을 뜯어보고 있으면 감정이 전해진다. 이놈 좋아하는구나, 싫어하는구나, 배가 고프구나.
유단은 그런 게 없었다.
감정 엇비슷한 것들이 순차적으로 지나갈 뿐, 인간이라면 응당 보여야 할 흔들림이 자취를 감췄다.
무엇이 유단을 바꿔놓았단 말인가.
입안이 바짝 말라갔다. 심증을 기반으로 인간의 내면을 캐내 정보를 취득해야 하는데, 이래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었다.
지금 유단을 지하 취조실로 끌고 가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들쑤시고도 성과를 얻지 못한다면…….
유렐은 상상했다. 디온 사령관이 넌지시 말하는 모습을.
“자넨 좀 쉬는 게 낫겠군.”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유렐은 저택을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당분간은 유단한테서 손을 뗄 것이다.
* * *
“오빠, 괜찮은 거야?”
프레나는 계단 난간을 붙잡으며 말했다. 1층에 멀거니 서 있던 유단이 고개를 돌렸다.
“어. 아무 문제 없어.”
상냥함이 묻어나는 목소리.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음성.
“……그래. 알겠어.”
프레나는 눈웃음 짓는 유단을 피해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다르다. 무엇인지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으나, 1층에 있는 오빠는 다른 사람이었다.
프레나는 방으로 들어와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두 손을 마주 잡고 몸을 웅크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는 이윽고 문 앞에서 멈췄다.
똑똑. 두 번의 노크. 문 앞에 있는 건 오빠였다.
“프레나, 혹시 몸이 안 좋은 거야? 약이 필요하다면…….”
“아,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정말 괜찮은 거지?”
“응. 걱정 끼쳐서 미안.”
“미안해하지 마. 우린 가족이잖아.”
가족.
그 말이 왜 이렇게 거칠고 무섭게 다가오는 걸까.
용기를 내 문을 열고 유단의 손을 붙잡고 묻고 싶었다. 오빠가 맞냐고, 내가 아는 유단이 맞냐고.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질문하는 순간,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그걸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제발, 내가 아는 오빠로 있어줘.”
프레나는 책상 위 아빠 사진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