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5화
샬롯은 길게 숨을 뿜어냈다.
현실에 안착한 기쁨을 만끽할 때였다. 눈앞에 이상한 게 보였다. 가하란 어깨 너머로 흐느적거리는 무언가가 지나가고 있었다.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흐느적거리는 정체불명의 무엇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가하란. 너 뒤에 있는 저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가하란이 고개를 돌려 확인한 후 말했다.
“이게 보이는 거야?”
“너도 보이는 거 맞지?”
썩은 오징어의 몸통을 닮은 ‘그것’은 꾸물거리며 왼쪽으로 이동하다가, 이내 책장을 뚫고 사라졌다.
샬롯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진료실 안에 이상한 것들이 가득 차 있었다. 어림잡아 열 마리는 넘어 보였다.
“이게 다 뭐야?”
안원에 다녀오기 전만 해도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다. 반으로 갈린 오리, 날개 달린 책, 빙글빙글 도는 연필.
현실의 물건과 닮았으면서도 어딘가 어긋난 것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까 내가 말한 정령들이야.”
“이게? 이게 정령이라고?”
샬롯은 바람을 불렀다. 익숙한 알갱이들이 손끝에 모여들었다. 형태라고 할 만한 게 없는, 작은 바람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정령을 응시했다.
“안원에서 본 정령들 하고도 달라. 뭔가 이상해. 혹시 이게 네가 말했던…….”
말끝을 흐렸다. 정면으로 반으로 갈린 오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흠칫하며 고개를 옆으로 피했다.
“맞아. 근원을 잃어버린 정령. 존재해야 할 이유마저 잊어버리고 그냥 이곳을 돌아다니는 정령들.”
“죽은 것과 다름없네.”
용기를 내 손가락으로 정령을 톡 건드렸다. 반발력이 느껴질 줄 알았는데, 아지랑이를 찌른 것처럼 손가락이 통과해 버렸다.
“이대로 떠다니는 거야? 아무것도 안 하고?”
“맞아.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고, 건드려도 반응하지 않아.”
가하란이 곁으로 다가온 정령을 툭 밀어냈다. 샬롯은 눈을 깜빡거렸다.
“방금 만진 거야?”
“어.”
“난 안 되던데.”
샬롯은 다시 손을 뻗었다. 정령이 왼손을 통과해 벽으로 날아갔다.
“정령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된 거야?”
“그때 말하지 않았나? 그냥 보게 됐다고.”
샬롯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궁금한 게 많은데 대답해줘야 할 상대가 답을 모르고 있다. 답을 모르는데 문제는 풀고 있다는 점이 신기할 뿐이다.
“바람들도 널 따르는 거 같고.”
붙들어두면 내 주변을 맴돌지만, 제어하지 않으면 가하란 주변으로 날아갔다.
정령들이 좋아하는 냄새가 나는 걸까? 체질 같은 건가?
“가하란 손 좀 내밀어봐.”
가하란이 양손을 등 뒤로 숨겼다.
“다시 안원으로 갈지도 몰라. 원인을 파악하기 전까지 조심하는 게 좋겠지?”
“나도 알아. 잡을 생각은 없어. 그냥 보기만 하려고.”
조심스럽게 손을 내미는 가하란이었다. 샬롯은 팔짱을 낀 채 손을 살폈다.
이제 보니 꽤 투박하다. 잡았을 땐 몰랐는데 손등에도 상처가 많았다. 공구를 다루다가 다친 걸까?
“단순히 손을 잡았다고 해서 안원에 간 건 아닐 거야. 그랬다면 가하란하고 악수한 사람들은 전부 정령세계로 떨어졌겠지.”
“맞아. 접촉은 원인 중 하나일 뿐. 다른 무언가가 있어.”
“내가 정령을 다룰 줄 알아서 그런 걸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 내 주변에 정령과 친밀한 사람은 없었거든.”
샬롯은 생각에 잠겼다. 구치 아저씨를 통해 정령술사를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들과 같이 있었을 때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어.”
가하란이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어떤 일?”
“내가 안원에 갔을 때야. 언제나 그랬듯 예고도 없이 그곳에 끌려갔어.”
샬롯은 집중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그곳에서 난 하나둘씩 기억을 잃고 있었어. 아마 그 상태로 오래 있었으면, 나도 너처럼 기억을 잃고 안원을 방황했을 거야.”
“정말 위험한 곳이네. 근데 이번에는 나도, 그리고 너도 기억장애는 없었어.”
“난 적응해서 그런 거고, 넌 산카 님이 보호해준 게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 뱀이 그랬거든. 내 몸에서 산카의 냄새가 난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왜 이곳에 있는지, 무얼 하고 싶은 건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어. 심지어 가족들조차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게 느껴졌지.”
말만 들어도 아찔했다. 계속 방치돼 있었다면 가하란은 지금쯤…….
“멍하게 있는 날 사슴님이 데리고 가려고 했어. 정령들이 있는 곳으로. 그곳에 갔으면 난 돌아오지 못했을 거야.”
“사슴? 날 도와준 그 사슴?”
“맞아.”
“뭐야. 인간한테 우호적인 거 아니었어?”
“내가 말했잖아. 다르다고.”
“근데 친하게 지낸 거야? 그 사슴하고? 너도 참…….”
“이제는 아니까. 사슴님도 나에 대해 이해하고 있고. 아무튼 끌려가고 있을 때 산페르 아저씨가 날 도와줬어. 근데 방법이 좀 거칠었지.”
“어땠는데?”
“파도를 일으켜 주변을 쓸어버렸어. 날 데려가던 사슴님도, 주변에 있던 다른 정령들도 말끔하게 씻겨 나갔지. 물론 나도.”
“산카 만큼이나 화끈하구나.”
가하란이 작게 웃었다.
“물살에 휩쓸려서 정신이 없었는데, 그때 날 붙잡아주는 손이 있었어. 덕분에 버틸 수 있었지.”
“그게 누구였는데? 안원에 같이 간 사람이 또 있었어?”
“아니. 안원에 있던 건 나 혼자였어. 손을 잡아준 건 이쪽 층에 있던 누나였고.”
“누나라면…….”
왠지 모르게 밀레나가 먼저 생각났다. 밀레나였냐고 되물으니 가하란이 맞다고 대답했다.
샬롯은 손을 바라봤다. 안원에서 느껴졌던 온기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너를 통하면 안원에 가까워지는 거 같아. 현실에 있던 언니가 안원에 있던 네 손을 잡은 것만 봐도 그래.”
“그럴지도.”
가하란이 손을 늘어트렸다.
산카가 관심을 보인 인간.
감춰진 비밀이 많은 게 분명했다.
호기심이 불쑥 솟아났다. 가하란과 함께 연구하면 정령세계의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두려운 곳이나 그럼에도 다시 찾아가고 싶었다.
“저기 말이야.”
서두를 뗄 때였다. 시린 바람이 문을 비집고 들어왔다.
샬롯은 바로 알아챘다. 산카라는 걸.
작은 새가 몸 주변을 바삐 돌아다녔다. 걱정하고 있는 게 전해졌다.
“산카, 난 괜찮아.”
-조용히 해. 내가 보고 확인해야 하니까.
“정말이라니까.”
-쉿.
꼼꼼히 훑던 산카가 팔뚝에 내려앉았다. 한쪽뿐인 날개로 팔을 쓰다듬었다.
-상처가 심해.
“내 팔? 아니야. 봐봐, 정말 괜찮잖아.”
-심상세계가 다쳤어. 넌 자각하지 못할 뿐이지. 당분간 내 힘을 이용하지 마. 상처가 아물 때까지 얌전히 있고.
육체는 괜찮지만 정신에 문제가 생긴 건가? 살짝 겁이 나지만, 태연하게 웃었다.
“아무렇지 않아. 난 튼튼해.”
-아니. 넌 얇은 유리 같은 아이야. 그래서 내 곁에 두고 계속 보호해야 했고. 이럴 줄 알았으면 도시에 붙들어 놨어야 했는데.
“산카! 그건 싫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 난 갇혀 살고 싶지 않아.”
산카의 마음은 이해는 하지만 억압되는 건 싫었다.
-그래, 알겠어.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둬. 네가 아프면 난 참을 수 없이 괴로워져.
“……다치지 않을게. 정말이야.”
산카를 품에 안고 일어섰다.
여기 있으면 가하란에게 불똥이 튈 지도 모른다.
“이번 가볼게. 나중에 봐.”
산카가 해코지하기 전에 얼른 방문을 열었다.
-잠깐.
문을 나서기 전 산카가 말했다.
-샬롯, 네 눈이…….
언제나 도도하고 매끄럽게 말하던 산카가 어눌하게 뒷말을 흘렸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내 눈이 왜?”
-뜨였어. 예상보다 빨라. 샬롯, 나 말고 다른 게 보이는 거야?
거짓말할 상황은 아니었다. 산카를 속이고 싶지도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다른 정령이 보인다고.
산카가 가하란을 바라봤다.
-직시의 가지로 널 살폈을 때 불안하긴 했어. 하지만 내 딸한테까지 영향을 끼치리라곤 생각 못 했지.
직시의 가지?
무얼 뜻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제가 뭔가 실수한 건가요?”
가하란이 걱정을 담아 말했다.
-아니. 널 탓할 건 아니겠지. 예정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눈은 내가 예측한 것보다 더 위험한 것 같아. 타인을 안원으로 인도하는 것까진 그렇다 치지만, 눈을 뜨이게까지 하다니.
산카가 샬롯을 바라봤다.
동시에 소리가 사라졌다.
-딸아. 잠깐만 기다려주겠니?
몸이 살며시 들리더니 문밖으로 밀려났다. 발버둥 쳤지만 바람의 올가미를 벗어날 수 없었다.
“산카!”
외쳐봤지만 대답은 없었다. 문이 쿵 닫혔다. 집중해서 소리를 들어보려 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에서 둘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걸까?
“나도 알고 싶다고!”
* * *
가하란은 왼손을 들어 눈을 매만졌다. 생각보다 더 위험하다고?
-마나의 뿌리와 닮은 형태. 정보를 보는 눈. 하지만 이젠 본다는 행위를 넘어선 일이 네 눈을 통해 일어난 것 같아.
“잘못된 건가요?”
-알 수 없어. 그 눈에 대해 아는 자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너만이 느낄 수 있고, 너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 거지.
샬롯이 정령을 보게 된 건 이 눈 때문일까?
-안원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지도 몰라. 몇 번이고 끌려간 건 우연이 아닐 테니까.
“최근 이상을 느낀 적은 없어요. 자주 사용하지도 않았고.”
정보를 볼 수 있는 편리한 눈으로 남아주면 좋을 텐데. 만약 다른 사람에게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샬롯은 특별한 아이니 예외로 두고, 널 통해 안원으로 간 사람이 또 있어?
“아니요. 샬롯이 처음이었어요.”
-그렇다면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샬롯은 안원으로 데려가지 마. 그 애는 널 붙잡고 늘어질 거야. 작정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니까.
“설득해보고 안 된다고 하면 피해 다닐게요.”
-그게 좋겠네. 정 안 되면 나도 힘을 써서 붙잡아 놓을 테니.
말 안 듣는 딸이라 걱정이 된다며 한숨을 푹 쉬는 산카였다. 절대자의 면모는 사라지고 속앓이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눈이 뜨인 자’. 저도 여러 번 들어봤는데, 안 좋은 상황인가요?”
-아니. 그렇지 않아. 이쪽 층에서 정령과 연관된 모든 이들이 꿈꾸는 단계가 ‘눈이 뜨인 자’이니까. 샬롯은 재능이 있어. 언젠가는 스스로 눈을 뜨게 될 거였지. 널 만나서 그게 앞당겨졌지만.
다행이었다. 적어도 해가 된 건 아니구나.
-마나 뿌리가 날뛴 이후로 안원도 변모했어. 샬롯이 안원으로 넘어왔는데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앞으로 조심할게요. 샬롯이 다치지 않도록.”
-그래주면 고맙겠네. 저 아이, 네 말이라면 그나마 듣는 것 같으니 잘 타일러봐.
“네.”
가하란은 문으로 향하는 산카에게 말했다.
“혹시 산페르 아저씨를 만나셨나요?”
-아니. 안원에서도 그놈 냄새가 사라졌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그렇군요.”
-안 나타난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어. 때가 되면 얼굴을 들이밀 테니까. 원래 그런 놈이고.
문이 활짝 열렸다. 공중에 붙들려 있던 샬롯이 바닥으로 내려왔다.
“정말 이럴 거야? 나도 알 권리가 있어!”
-가하란에 관한 거야. 넌 몰라도 돼.
“그러면 가하란한테 물어…… 자, 잠깜만! 산카!”
샬롯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산카에게 붙들려 계단 위로 사라졌다.
가하란은 의자에 걸터앉은 채 숨을 골랐다. 작은 거울에 두 눈이 비쳤다.
“넌 대체 뭐야?”
가하란은 자신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