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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314화 (287/558)

제314화

온몸의 핏줄이 한순간 팽창했다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시야가 한순간 붉게 물들었다.

“왜 그래?”

뱀이 말했다.

샬롯은 손아귀에 힘을 더 주었다. 쥐어짜 터트려 버릴 것이다.

“화낼 것까진 없잖아. 난 널 먹지 않을 거야.”

뱀 주변으로 몰려든 바람이 허무하게 흩어졌다. 불꽃이 잠깐 휘날렸을 뿐 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가하란을 돌려줘!”

“내가 먹은 것의 이름이 가하란이야? 근데 왜 내가 돌려줘야 하지?”

뱀이 다가왔다.

샬롯은 두 다리를 땅에 고정한 채 두 손을 맞잡았다.

귀가 먹먹해졌다. 붉게 물든 시야가 이번에는 어둡게 변했다.

몸이 비명을 질렀지만 괜찮았다. 여기에 있는 건 가짜 몸이니까.

모든 걸 바칠 기세로 바람을 불러 모았다. 살갗이 얇게 저며지기 시작했다. 올올이 솟은 피부 밑으로 붉은 살결이 보였다.

“뭔가 착각한 거 같은데, 거기 있는 몸이 죽으면 층 너머에 있는 너도 사라지게 될 거야.”

“거짓말.”

“거짓말이란 표현은 재미있는 거 같아.”

악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샬롯은 무구한 아이와 마주한 기분이었다.

정말 아무런 감정 없이, 그저 호기심에 가하란을 먹은 거야?

“제발 부탁이야. 내 친구를 돌려줘.”

“네 부탁을 내가 들어줘야할 이유는 없어. 그렇지?”

“안 돼. 가하란을 죽이지 마. 제발…….”

“걱정하지 마. 내 안으로 들어간 인간이 사라진다고 해도 넌 괜찮을 거야.”

“안 괜찮아!”

두 손을 힘차게 뿌렸다. 피부가 찢어지며 피가 흘러왔다. 한계치까지 힘을 사용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몰아친 바람이 뱀의 머리를 때렸다. 뱀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격앙될 필요 없어. 내가 층 너머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인간의 목숨은 개별적이라는 건 알아. 너는 무사할 거야.”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힘으로 어쩔 수 없고, 말로도 설득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무력한 걸까.

양손을 늘어트렸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샬롯은 두 다리를 움직여 뱀 가까이 갔다. 일렁이는 불꽃을 향해서.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는 마. 내 불에 직접 닿으면 넌 사라지게 될 거야.”

“돌려줘. 가하란을…… 돌려줘.”

“먹은 걸 되돌릴 순 없어. 그러고 싶지도 않고. 포기하는 게 어때?”

뱀이 머리를 내렸다. 검은 눈동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아니면, 너도 먹어줄까?”

“이 악마!”

“악마? 난 그런 추상적인 게 아니야. 난 실존해. 너희들이 만들어낸 가상의 절대자가 아니야.”

뱀이 혀를 날름거렸다.

“산카의 냄새가 밴 널 먹으면, 분명 산카가 날뛰겠지. 그건 귀찮은 일이야. 하지만 뱃속 깊숙한 곳에 넣으면 산카도 알아채지 못하겠지? 그래. 그렇다면…….”

주둥이가 열린다.

샬롯은 지옥의 입구를 바라봤다.

마지막 한 방. 몸을 대가로 바람에게 부탁할 것이다. 상냥한 바람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방법이 없었다.

안쪽은 그나마 연하겠지.

무섭지는 않았다. 오히려 침착해졌다. 정령도 뇌가 있을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부터 주둥이를 관통해 머리를 뚫어버릴 거니까.

“부탁할게.”

모여든 바람에게 작게 속삭였다. 말리던 바람들도 조용해졌다. 의지가 깃든 한 줄기의 삭풍. 얇게 벼려낸 이 바람이 저 녀석의 머리를 꿰뚫어주길!

손을 뻗기 직전이었다.

뱀이 급하게 주둥이를 닫더니 이리저리 날뛰었다. 강렬한 진동이 지면을 타고 전해졌다.

샬롯은 공중에 뜬 채로 사정없이 고개를 젓는 뱀을 바라봤다.

“잠깐, 잠깐만!”

뱀이 외치면서 주둥이를 열었다. 아니, 입 안쪽에서 솟아난 거대한 팔이 뱀의 아가리를 벌린 것이었다.

저게 대체 뭐지?

두 개의 거대한 팔이 지지대가 돼 뱀의 입을 고정시켜 버렸다.

샬롯은 활짝 열린 뱀의 주둥이를 바라봤다. 어두컴컴한 안쪽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전 작아서 무슨 맛인지도 모를 거예요. 그렇죠?”

가하란이었다. 너무나도 태평한 얼굴이었다. 흙으로 이뤄진 거대한 팔을 밟으며 가하란이 바깥으로 나왔다.

샬롯은 지상으로 내려가 떠듬떠듬 말했다.

“너, 너…….”

“안쪽에서 계속 말했는데 내 목소리가 안 들렸나 봐. 네가 말하는 건 잘 들렸는데.”

머리가 헝클어지긴 했지만 그것 외에는 달라진 점이 없는 가하란이었다. 혹시나 해서 몸 전체를 살펴봤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마음이 놓이자마자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찢어진 피부가 눈물이 나올 정도로 쓰라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프지 않았는데.

“여긴 상상이 현실이 되는 곳이야. 그러니 마음을 편하게 먹고 아프지 않다고 생각해.”

다가온 가하란이 팔이 손을 얹으며 말했다.

“너무 아파.”

“알아. 피부가 이렇게 벗겨졌으니까. 나라면 엉엉 울었을 거야.”

“……울 정도는 아니야.”

“역시 샬롯. 나보다 참을성이 좋네.”

대화하니 안심이 됐다.

“괜찮아.”

그 말을 들으며 눈알 감았다가 떴다. 갈라져서 붉은 속살이 보이던 팔이 뽀얗게 아물었다. 통증은 남아 있지만 금방 사라질 거란 확신이 들었다.

“어때? 이제 괜찮지?”

가하란이 손을 떼며 말했다.

“이런 걸 어떻게 알았어?”

“사슴님이 설명해준 거야.”

샬롯은 가하란에게서 눈을 떼고 버둥거리는 뱀을 바라봤다.

“상상이 현실이 된다고 했지? 강하게 바라면 저 뱀을 죽일 수도 있는 거야?”

“어…… 사실 정확히 말하면 상상이 실현되는 게 아니라 근원의 발현이야.”

“근원의 발현? 그게 무슨 뜻이야.”

“사실 자세한 건 나도 잘 몰라.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했거든.”

샬롯은 팔을 매만졌다. 숨을 쉬지 않아도 되는 가짜 몸이지만, 이게 사라지면 층 너머에 있는 나도 죽는다.

영혼 같은 걸까? 아니면 정신?

아니지.

궁금증은 나중에 풀면 된다. 지금은 눈앞에 있는 뱀한테 집중해야 했다.

뱀의 입을 고정했던 거대한 팔이 잘게 부서지며 흙으로 돌아갔다. 뱀이 입맛을 다시며 입을 다물었다.

“가하란.”

다급하게 가하란을 불렀다. 곧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가하란이 손을 살며시 들어 올려 샬롯의 앞을 막았다.

“잠깐만.”

무얼 하려는 걸까?

가하란이 뱀을 향해 걸어갔다. 지금은 거대한 팔도 없었다. 무방비했고 위험했다.

“위험해!”

“괜찮을 거야.”

가하란이 고개를 돌려 연한 미소를 보여줬다.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이었다.

말린다고 해서 들을 것 같지 않았다. 샬롯은 뱀을 경계하며 가하란 뒤를 따라갔다.

이윽고 하얗게 변한 뱀의 눈과 마주했다.

“예전에 한 번 봤었죠? 잠깐 스쳐 지나갔을 뿐이지만.”

가하란이 말했다.

“기억하고 있네. 그때도 먹어보고 싶었는데 먹으면 귀찮아질 것 같아서 그냥 보냈어.”

포식자와 사냥감의 대화치고는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차라리 그때 먹어볼 걸 그랬어. 지금은 네 세계가 단단해져서 손대기 껄끄러워.”

뱀이 긴 혀를 내밀어 가하란을 핥았다.

“먹어도 별맛 없을 거예요.”

“아니, 맛있을 거 같은데.”

“작아서 안 느껴질걸요?”

“네 안쪽 세계는 제법 커. 포만감이 들겠지.”

“포기하면 안 될까요? 전 점심이 되고 싶지 않아요.”

가하란이 웃으며 말했다. 뱀은 다시금 혀를 내밀어 가하란을 핥은 다음 시무룩한 목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맛보는 건 그만둘게. 대신, 먹이가 되고 싶다면 바로 찾아와야 해. 약속이야.”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그래? 그거 아쉽네.”

괴상한 대화였다. 샬롯은 징그러운 뱀의 눈을 흘깃 보며 속삭였다.

“웃어넘길 일이 아니잖아.”

“말로 해결했으니까 이제 됐어.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악의로 똘똘 뭉친 거 같은데. 다짜고짜 널 먹었다고.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가하란이 귀 뒤쪽을 긁적거렸다.

“아기들이 손에 쥐는 걸 전부 입에 가져가는 것과 비슷해. 이 뱀은 그냥 먹고 싶었을 뿐이야.”

“아니지!”

먹고 싶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마디 더 하려하자, 가하란이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

“여긴 다른 곳이야. 모든 게 달라. 그러니 받아들여야 해. 물론 이해하기 힘든 것들도 많지. 그런 것들은 흘려보내야 하고.”

“……넌 그걸로 괜찮아? 죽을 뻔했는데도?”

“살아 있잖아. 그거면 됐지.”

뭔가 다른 사람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게 가하란의 본모습일 지도 모른다.

차분하고 고요했다. 작은 몸 안에 깊은 호수가 들어있는 듯했다.

몸에 떨림이 멎었다. 흥분했던 머리도 알맞게 식었다.

“알겠어. 화가 나긴 하지만, 여긴 그런 곳이니까.”

법칙에 얽매이지 마라.

물리적인 현상뿐만 아니라 도덕이나 관념까지 아울러 다 다르다는 뜻이었다.

인간의 목숨이 귀중한 이유를 뱀에게 설명해봤자, 뱀은 어리둥절하게 쳐다볼 것이다.

그래서 뭐?

이렇게 대꾸하겠지.

“그래도! 멋대로 사람을 잡아먹으면 안 돼요. 아시겠죠?”

샬롯은 뱀을 향해 외쳤다. 뱀이 혀로 눈알을 몇 번 닦은 다음 말했다.

“약속은 안 해. 약속은 무거운 거니까. 하지만, 기억나면 일단 물어는 볼게. 내가 먹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 말이야.”

“상대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먹을 거죠?”

“그건 또 모르지. 그쪽의 의사가 중요한 만큼, 내 의사도 중요하잖아? 그렇지?”

정말 말이 안 통하는 뱀이었다.

“그래도 재미있었어. 이 고정된 공간 안에서 너희만큼 재미난 존재도 없으니까. 다음에 또 봐.”

뱀이 날아올랐다. 샬롯은 멀어지는 뱀을 향해 소리쳤다.

“산카하고 친하다는 그 말, 그거 거짓말이죠?”

“가장 오래된 형태들과 친한 존재는 없어. 그것들은 오만하고 독선적이고 까칠하거든.”

“그쪽도 똑같아요!”

“그럴지도 모르지.”

강렬한 불꽃과 함께 뱀이 사라졌다. 샬롯은 맥 빠지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재미난 곳이지?”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가하란이었다. 샬롯은 격하게 도리질을 쳤다.

“끔찍해. 내가 상상하던 건 이런 게 아니야.”

가하란이 작게 웃었다.

“완전히 다른 곳이라고는 하지만 비슷한 점도 꽤 있어. 정령들 중에서는 인간을 공부하고 이해해주는 정령도 있고.”

“이해한 다음 잡아먹는 거 아니고?”

“그럴지도 모르지.”

가하란이 손을 내밀었다. 바람에게 부탁하면 사뿐히 일어설 수 있었지만, 샬롯은 바람대신 손을 택했다.

손을 마주잡는 순간 바닥이 꺼졌다. 몸이 끝없는 추락을 시작했다.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공간을 허우적거릴 때였다.

샬롯의 눈에 무수히 많은 선이 보였다. 이리저리 꼬인 선들은 무질서해 보였으나, 무언가 의미를 지닌 것 같기도 했다.

눈이 어지러웠다.

머릿속으로 뭔가가 밀려들고 있었다. 아찔한 감각에서 벗어나고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샬롯은 익숙한 풍경과 마주하게 됐다.

시계와 책장. 나란히 걸려있는 의수들.

돌아왔다, 현실로.

샬롯은 손을 내려다봤다. 살며시 움켜쥐고 있던 가하란의 손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돌아온 것 같네.”

가하란이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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