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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313화 (286/558)

제313화

아니겠지.

샬롯은 슬쩍 몸을 움직였다. 상공에서 휘적휘적 움직이던 뱀이 길쭉한 몸뚱이를 틀었다.

착각일 거야. 아마도.

오른쪽으로 재빨리 이동했다. 다리에 바람을 휘감고 단숨에 도약했다.

몸이 쭉쭉 뻗어나갔다. 얼기설기 솟은 푸른 잔디를 밟으며 뒤를 돌아봤다.

“맞잖아!”

불꽃을 두른 뱀이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모든 걸 빨아들일 것 같은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온다!

하늘에서 수영하던 뱀이 느긋한 움직임을 보이며 지면으로 다가왔다.

저 속도라면 피할 수 있지 않을까?

도망치는 건 자신 있었다. 거리와 방향을 가늠하고 움직이려 할 때였다.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지면을 덮는 그림자는 붙잡을 수 없는 속도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지독히도 명확했다.

뱀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컸고, 느긋해 보이던 움직임은 예상했던 것보다 빨랐다.

개미가 온 힘을 다해 뛴다고 해도 말이 한 걸음만 떼면 따라잡히고 만다.

어찌할 수 없는 체급의 차이.

“너무 크잖아!”

샬롯은 비명을 지르며 온몸에 바람을 둘렀다. 한군데 부서질 각오를 하며 몸을 날렸다.

주변 풍경이 흐릿해지며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호흡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달려 나갔다.

그럼에도 지면을 덮은 그림자는 멀어져만 갈 뿐이었다.

한계를 느끼고 멈춰 섰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토해내며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눈이 시렸다. 지글지글 끓는 불꽃이 앞에 있었다. 다행인 건 안 뜨겁다는 정도?

시야 가득 들어오는 뱀의 머리가 온몸을 굳게 만들었다. 눈동자가 사람보다 컸다. 어찌나 반질반질한지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전신거울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허무맹랑한 생각이 드는 건 반쯤 포기해서 그런 걸까?

샬롯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어쩌면 사람을 안 먹는 뱀일지도 모른다. 몸에 불까지 두른 신기한 뱀이니 좀 더 특별한 걸 좋아하지 않을…….

뱀의 주둥이가 서서히 벌어졌다. 희망을 집어삼키는 뱀의 아가리였다.

샬롯은 양손을 옆으로 뿌렸다. 지면을 휘감는다는 느낌으로 손을 쥐었다.

콰드드, 바람으로 움푹 파낸 흙더미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목표는 뱀의 눈!

전력을 다해 던졌다. 사람이었다면 마차에 치인 것처럼 날아갔을 것이고, 돌담이었다면 볼품없이 허물어졌을 것이다.

그 정도로 강력한 힘이 담겨 있었다.

툭.

조촐한 소리가 났다. 뱀은 눈꺼풀조차 닫지 않았다. 머리가 핑핑 돌 정도로 힘을 짜냈는데, 결과가 허무했다.

도망칠 수도 없고, 저항할 수도 없었다.

신비로운 풍경에 감탄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이대로 먹히는 건가?

이딴 곳이 그토록 고대하면 정령세계인건가?

“나 먹으면 배탈 날 거야! 진짜야! 너 후회하게 될 거야. 게다가 난 맛도 없어! 작기도 하고! 먹어봤자 하나도…….”

주둥이가 코앞까지 왔다.

어디로 도망쳐야 할까.

아니, 뛴다고 살 수 있을까?

절망만 내놓는 머리와 달리 몸은 착실히 움직였다. 달리고 또 달렸다. 장난감이 된 기분을 한껏 맛보며 뱀을 떨쳐내기 위해 뛰었다.

“아.”

눈앞에 벽이 생겼다. 불타오르는 벽. 뱀의 몸뚱이였다.

뱀은 똬리를 텄고 샬롯은 갈 곳을 잃었다. 주전자 덮개를 덮듯, 뱀의 머리가 위에서부터 내려왔다.

끝났다.

주둥이 안쪽 깊은 어둠을 바라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머, 놀랐니?”

목소리였다. 귀가 아닌 머릿속으로 바로 전달되는 목소리.

샬롯은 고개를 들었다. 뱀이 입을 닫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진정시키며 말했다.

“아, 안 잡아먹는 건가요?”

“내가? 널? 아니야. 그냥 신기해서 따라왔을 뿐이야.”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 음성이었다. 바짝 긴장했던 몸에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정말이죠?”

“내가 널 먹어야 했니?”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거대한 뱀의 몸체가 움직였다. 사방을 에워싸던 벽이 사라졌다. 요란한 소리가 날 법도 한데, 조용하기만 했다.

“층 너머의 것이 이곳을 찾는 건 흔하지 않거든.”

뱀의 눈이 가까워졌다. 움찔했으나 겁먹은 티를 내지 않았다.

“너한테선 익숙한 냄새가 나.”

“냄새요?”

“그래. 혹시 산카를 알고 있니?”

산카란 말에 남아있던 경계심마저 풀어졌다. 샬롯은 한 걸음 다가섰다.

“산카를 아세요?”

“알지. 아주 친한 사이란다. 너한테서 나는 아늑한 냄새는 역시 산카의 것이구나.”

손등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정령만 알아챌 수 있는 특별한 냄새가 있는 건가?

“의식을 치른 거니?”

“의식이요?”

“안원을 찾기 위한 의식.”

“아니요. 전 그냥…….”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령세계에 도착했다고 말해야 하나?

“자질은 있지만 아직 눈이 뜨인 것 같지는 않은데. 네 힘으로 온 게 아니구나?”

“네. 솔직히 제가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알지 못해요. 친구 손을 붙잡았을 뿐인데 여기로 오게 됐어요.”

“친구? 우리와 가까운 인간이니? 너희들 표현에 따르면 정령술사였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정령과 친한 건 맞아요.”

불을 두른 뱀이 혀를 날름거렸다.

“그 친구는 지금 어디에 있지?”

“아까까지만 해도 옆에 있었는데, 여기로 온 순간 사라졌어요.”

“층을 넘는 순간 갈라진 모양이네. 저쪽의 위치는 이곳과 연관이 없으니.”

뱀이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친구를 찾아야겠지?”

“찾을 수 있나요?”

“도와주고 싶지만 내 능력으론 힘들어. 층이 다르면 감각할 수 있는 수단이 적어지거든. 너한테서는 특별한 냄새가 나서 바로 알아봤지만.”

뱀이 다시금 혀를 날름거렸다.

“하지만 너라면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제가요?”

“같은 층에서, 그것도 동시에 넘어왔다면 연결고리가 있을 테니까. 층과 층은 모든 게 달라. 그곳의 법칙에 얽매이지 말고 너에게 전해지는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여봐.”

어려운 말이었다. 법칙에 얽매이지 말라니.

샬롯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뱀의 표현을 빌려 쓰자면 ‘저쪽 층’에 있었을 때 분명 가하란을 붙잡고 있었다.

“한 가지 더. 너의 육신이, 물질이 층을 넘어온 건 아니야. 널 이루는 대부분의 것들은 층 너머에 그대로 남아 있어.”

“네? 저는 지금 여기 있는데요.”

“그렇게 느껴질 뿐이야. 어디 보자, 그래. 너희는 호흡을 한다고 하지? 숨이란 걸 들이마시고 내뱉고.”

샬롯은 고개를 끄덕였다. 숨 쉬지 않는 인간은 세상이 없을 것이다.

“그 돌출된 코와 입으로 숨이란 걸 받아들이는 거겠지?”

“맞아요.”

“그러면 그 구멍을 막아볼래?”

갸웃거리면서도 일단은 손을 움직였다. 코를 붙잡고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 깊숙한 곳에서 아우성을 쳤다. 공기를 달라고, 폐가 일할 수 있게 코와 입을 열라고.

다리를 동동 굴렀다. 역시 인간은 숨이 필요했다. 더는 참을 수 없어 손을 떼려 할 때, 뱀이 말했다.

“그곳의 법칙에 얽매이지 마. 넌 정말 숨이란 게 필요해?”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괴로웠다. 몸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괴로움은 허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샬롯은 코와 입을 막은 채 계속 서 있었다. 여전히 괴롭지만 참을 수 있었다.

아니, 참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서서히 괜찮아지고 있었다.

샬롯은 손을 뗐다. 숨을 멈춘 채 뱀을 올려다봤다.

“어때?”

뱀이 질문했다.

“숨을 안 쉬어도 되네요? 정말로.”

“속박되지 마. 여긴 모든 게 달라.”

샬롯은 팔을 매만졌다. 있지만 없는 건가? 아니, 없는데 있는 건가?

그때였다. 오른손이 따뜻해졌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건 체온이다.

누구의 체온인지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알 것 같아요. 가하란이 어디 있는지!”

뱀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깨달은 모양이네. 이제, 네 친구를 찾으러 가볼까?”

“네!”

공포심이 사라지고 나니 주변 풍경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가하란이 말한 대로 상상을 초월한 모습이었다.

몇 년을 바라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이다. 투명한 땅 밑을 헤엄치는 물고기와 날개 달린 거북. 무지개를 따라 열심히 무리 지어 가는 개미들.

“여긴 정말 아름다운 곳 같아요.”

“다르다는 건 신선한 충격과 즐거움을 주지. 나도 너희 층을 엿봤을 때 꽤 즐거웠어.”

공중에 2m 정도 뜬 채로 따라오는 뱀이었다. 친절한 정령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었다.

저 멀리 발 달린 촛대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촛대의 정령인 걸까?

촛대는 이쪽을 바라보는 듯하더니 방향을 꺾어 사라졌다. 도중에 몇몇 정령들과 마주쳤는데, 다들 멀찍이 돌아갈 뿐이었다.

“널 두려워하는 거야.”

“네? 저를요?”

“너와 나는 다름에서 즐거운 충격을 받지만, 저들은 공포만 찾아내거든. 미지란 그런 거지.”

듣고 보니 이해됐다.

정령들 눈에 비친 나는 이상한 생명체겠지? 멀리 돌아가는 건 당연해 보였다. 괜히 가까이 갔다가 공격당하면 안 되니까.

“저기…….”

“난 이름이 없어. 이곳에 사는 대부분은 이름이 없지. 필요가 없거든.”

질문하기도 전에 뱀이 말했다. 정말 영리한 정령이었다.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부른다는 행위가 필요할까? 곁에 있는 걸로 충분한데.”

샬롯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젤리 같은 땅을 지나, 뜨거운 눈을 피해 계속 움직였다.

“이쯤인 거 같아요!”

샬롯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손아귀에 전해지는 온기가 강렬해졌다.

가하란이 근처에 있는 걸까?

“너처럼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면 내가 찾아볼 수 있어.”

뱀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샬롯도 손에 느껴지는 감각을 따라 계속 이동했다.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 때였다.

저 멀리, 찾아 헤매던 얼굴이 보였다.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샬롯은 손을 높이 들었다. 가하란을 향해 반가운 목소리를 내기 직전이었다.

그림자가 생겨났다. 뱀도 가하란은 찾은 모양이다. 새로운 친구를 만났으니 정겹게 인사해 주겠지?

뱀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짧은 순간, 뱀의 눈이 보였다. 한없이 검기만 한 그 눈을 다시 본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경각심이 발끝을 타고 올라와 목 뒤를 훑었다.

“잠깐…….”

멀리 있는 가하란을 향해 뻗은 손 위로 뱀의 몸체 얹어지고, 이윽고…….

쿵.

묵직한 소음과 함께 가하란이 있던 자리에 뱀이 내려앉았다.

샬롯은 전신의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사납게 주둥이를 벌린 뱀이 가하란을 집어삼켰다.

“왜, 왜, 왜.”

떠듬떠듬 말이 나왔다.

멀리 있던 뱀이 고개를 돌렸다.

다문 입 주변에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역시, 그때 본 그 애가 맞았어. 그래. 난 이게 궁금했어. 대체 어떤 맛일까?”

뱀이 입을 열었다. 흙더미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근데 아무 맛도 나지 않아. 원래 이런 걸까? 응?”

뱀의 검은 눈이 하얗게 변했다.

샬롯은 멍하니 뱀과 뱀이 헤쳐놓은 땅을 바라봤다. 생각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가하란은 어디 있어?

먹었다니?

왜?

굳어 있던 머리에 피가 쏠렸다.

샬롯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다.

“도로 뱉어.”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강하게 움켜쥐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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