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0화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가하란이 고개를 들었다. 샬롯은 가하란을 향해 손을 크게 흔들었다.
가하란이 맹한 웃음을 지으면서 손짓했다. 내려오라는 뜻 같았다.
“싫어!”
율도 그렇고 다들 내려오라고만 한다. 하늘과 가까워지는 옥상이 얼마나 좋은데.
어깨를 으쓱이고는 팩토리로 다가오는 가하란이었다. 샬롯은 고개를 푹 숙였다.
마중 나온 거대한 개가 가하란에게 양발을 올리고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톨이었나, 툴이었나.
귀엽게 생겼지만 다가가는 건 조금 무서웠다. 이전에 용기를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가 덥석 물리기도 했고.
물론 이빨을 세워 깨문 건 아니었다. 친근함의 표시라는 것도 알고는 있었다.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겁 없이 마수 옆을 얼쩡대면서 저런 개가 무서워?”
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뭔가 안 맞는단 말이지.”
샬롯은 중얼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둔의 전경도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다. 하긴, 몇 주째 같은 걸 보고 있으면 질릴 만하지.
스파우를 빠져나오면 색다른 게 기다릴 줄 알았다. 새로운 만남, 놀라운 사건, 그리고 경이로운 모험.
둔에 막 도착했을 때만 해도 다르긴 달랐다. 꿈에서만 보던 가하란도 만나고, 율에게 조르고 졸라 둔 곳곳을 다녀보기도 하고.
지루할 틈이 없는 하루하루였다.
“산카!”
하늘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바람을 이끌고 나타나야 할 작은 새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도 바쁜 모양이다.
도시의 모든 것이 익숙해져 버리고, 산카마저 소식이 뜸해졌다.
싱겁고 지루한 나날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온갖 핑계를 대며 겨우 스파우를 빠져나왔는데도 이 꼴이라니.
기지개를 켠 뒤 뒤로 누워버렸다.
“뭘 해야 되나.”
율한테 놀아달라 하는 것도 이제는 눈치가 보였다. 몇 주째 잠도 제대로 안 자고 일하고 있으니까.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주변을 기웃거리면, 율은 웃는 얼굴로 괜찮다고 말했다.
또래인 제니를 꼬드겨보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제니 역시 바빴으니까.
타챠와 에단은 뭐 그리 할 일이 많은지 얼굴조차 보지 못 했다.
“다들 어른이네.”
물장구를 치듯 다리를 움직였다.
주변 사람들은 착실하게 바뀌고 있었다. 나만 뭣 모르는 어린애로 남아 있는 느낌이다.
이제는 바뀌어야 할까?
멋대로 옥상에 오르는 것도 그만 두고, 철없이 힘을 쓰는 것도 자제하고, 착실하게 일을 배워 아리엘에게 도움을 주는 거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면 지루함도, 불안함도 사라지는 걸까?
푸릇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바로 옆에서 하악질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하얀색 고양이가 털은 곤두세운 채 쇳소리를 내고 있었다.
고양이 밑에는 목덜미가 뜯겨 나간 새가 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진다.
피.
샬롯은 윗니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흉측한 괴물이 사람의 목을 잡아 뜯어냈다. 소복이 쌓인 눈 위로 시뻘건 피가 튀었다. 시체, 시체, 그리고 또 시체.
핏물로 몸은 적신 괴물이 천천히 다가왔고, 샬롯은 목소릴 쥐어 짜내 한마디 했었다.
아빠, 라고.
고양이가 새를 물고 사라졌다. 얼룩처럼 남은 핏자국을 바라보다가 눈을 돌렸다.
“어른.”
되고 싶지 않지만 이제는 되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찡한 코끝을 손등으로 비볐다. 한 시간만 누워 있다가 내려가자,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지정석이 됐네.”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지붕 위로 고개만 빠끔 내민 가하란이 보였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듯했다.
“뭐해?”
샬롯은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끔찍한 옛 생각 때문인지 말이 투박하게 나가버렸다.
“뭐하긴. 옥상에 이상한 사람이 있다고 해서 올라와 봤지.”
엉거주춤한 자세로 지붕에 오르는 가하란이었다. 몸을 낮추고 느릿하게 걸어 샬롯 옆으로 다가왔다.
“높은 곳도 계속 보다 보면 익숙해지려나?”
가하란이 저 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샬롯은 손을 들어 가하란의 등을 툭 쳤다.
으악, 소리를 내며 지붕에 찰싹 달라붙는 가하란이었다.
“너 웃긴다. 저번에 내가 들어올렸을 때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겁을 내?”
픽 웃으면서 가하란을 볼 때였다.
샬롯은 깨닫고 말았다. 가하란의 다리는 물론, 눈동자조차 떨림이 없다는 걸.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너 사실은 하나도 안 무섭지? 맞지?”
바닥에 엎드려 있던 가하란이 슬쩍 일어섰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리를 쭉 뻗으며 옆에 앉았다.
“나름 혼신의 연기였는데.”
“그게?”
가하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샬롯은 입을 다물고 앞을 봤다. 쭉 뻗은 도로와 듬성듬성 서 있는 기계인형들. 이제는 눈 감고도 그려낼 수 있는 둔의 정경이었다.
몇 분을 그러고 있었을까.
참다못한 샬롯이 입을 열었다.
“뭐야. 할 말이 있으니까 올라온 거 아니었어?”
“아까 말했잖아. 옥상에 이상한 사람이 있어서 올라와 봤다고.”
“……너도 어지간히 할 일이 없구나?”
실없이 낸 소리였다. 가하란은 누구 못지않게 바쁜 아이였다. 나와는 다르게 말이다.
“뭘 보고 있었어?”
가하란이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그냥 이것저것.”
“이것저것 뭐?”
의지와 상관없이 입술이 튀어나왔다.
“시비 거는 거야?”
“아니.”
아니, 라고 대답하는 얼굴이 오늘 하늘처럼 더없이 맑았다. 뒤따라 튀어나오려던 뾰족한 말이 입 안에서 풀어졌다.
샬롯은 숨을 작게 내쉬고 말했다.
“……미안. 내가 신경질 나서 너한테 괜히 화풀이한 거야.”
“그럴 때도 있지.”
머리를 긁적일 때였다. 가하란이 주머니를 내밀었다. 안을 보니 자그마한 사탕이 잔뜩 들어 있었다.
“하나 어때? 이상한 맛도 섞여 있지만, 대체로 맛있어.”
사탕을 골라 입에 넣었다. 신맛이 확 올라왔다. 얼굴 근육이 코를 향해 쏠렸다.
“왜 이렇게 셔.”
“그거 좋아하는 애들도 꽤 있어.”
사탕을 뒤적거리던 가하란이 이거네, 하면서 사탕을 입에 넣었다. 금방 얼굴이 구겨졌다.
“세긴 세네. 밀리언 아저씨가 작정하고 만들었나봐.”
“이런 걸 왜 가지고 다니는 거야?”
침이 줄줄 나왔다.
“애들이 좋아하거든. 내가 말주변이 좋았다면 말로 애들을 달랠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안 되니까 선물을 준비하는 수밖에.”
“애들?”
신맛이 점점 옅어졌다. 적당히 새콤해져서 입안에서 굴리는 재미가 생겼다. 딸기맛도 은은하게 풍기고.
가하란이 지면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의수를 찬 아이가 엄마와 함께 팩토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보자마자 ‘애들’이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이해했다.
“사탕을 주면 잘 안 울어?”
“울어. 아프니까. 신경을 연결할 때 그 감각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거든. 그래도 자극을 분산시키면 덜 아파해.”
자극. 입안에 아련히 남은 신맛은 분명 즐길 만한 자극이었다.
“오히려 애들이 사탕 때문에 우는 거 아니야? 너무 셔서.”
샬롯은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런가? 아저씨하고 상담해야겠네. 쓴맛으로 대체하는 건 어떻겠냐고.”
“그건 아니지. 쓴맛보다는 신맛이 나으니까.”
손바닥을 내밀었다. 설명이 필요없는 동작에 가하란은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줬다.
“이번에도 신 거야?”
“아마도?”
사탕을 입에 넣었다. 적당히 신맛이었다. 아니, 입이 적응해서 덜 시게 느끼는 걸지도.
멍청히 사탕을 굴리다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샬롯은 사탕을 왼쪽 볼에 밀어넣고 말했다.
“난 애가 아닌데.”
“그래도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았어?”
“그렇긴 하지만.”
가하란이 주머니를 싸매며 물었다.
“내가 잘못 본 걸지도 모르지만, 표정이 안 좋아 보였어.”
“내가?”
손가락으로 얼굴을 가리켰다. 가하란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좋아 보였다라.
아, 그때인가?
“누구나 다 잊고 싶은 기억 같은 게 있겠지?”
“있겠지.”
나직이 대답하는 가하란이었다.
다시금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빠에 관한 걸 떠들 생각은 없었다. 그건 들춰선 안 될 악몽이었다.
잠깐 상상한 것만으로도 몸이 살짝 떨렸다. 다 털어냈다고 여겼는데, 여전히 그날의 기억이 뒷덜미를 물고 있었다.
“악몽도 언젠가는 익숙해지겠지?”
샬롯은 두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그렇겠지.”
“안 그런다면? 도저히 떨쳐낼 수 없을 정도로 무섭다면?”
“혼자서 이겨낼 수 없다면 주변 사람이 도와줄 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가하란이 빙긋 웃었다.
속 편한 말이었다. 뻔한 말이기도 했고. 그런데 안심이 됐다.
“가하란은 어른이구나.”
“내가?”
샬롯은 바람을 한 줌 쥐어 가하란에게 뿌렸다. 자다 일어난 사람처럼 가하란의 머리카락이 비죽 솟았다.
가하란이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아까 산카 님을 부르지 않았어?”
“응, 불렀어. 근데 대답이 없네.”
“바쁘신가.”
“바쁜 걸 수도 있고, 지켜보고 있지만 못 오는 걸 수도 있어. 세상이 바뀌고 난 후 산카도 이쪽으로 오는 게 어려워졌다고 했으니까.”
이쪽.
샬롯은 탁한 하늘을 품은 가하란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정령세계에서 날 만났을 때 일, 너는 전부 다 기억하고 있는 거잖아?
“그렇지.”
“산카는 말했어. 날 위해서 내 기억을 덮었다고. 정령세계 일을 떠올리면 심상세계에 타격을 받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산카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특히 나와 관련된 일은 숨기는 게 있을지언정 거짓은 없다.
“하지만 넌 모든 걸 기억하고도 괜찮았어. 나한테 자세히 설명을 해줄 정도로.”
가하란에게 조금 다가갔다.
“내가 도시를 떠나 여기까지 온 건 모험을 위해서야. 물론 널 만나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
“그래서?”
“둔도 익숙해져 버렸어. 식상해. 그렇다고 바쁜 언니를 붙잡고 보챌 수도 없어.”
가하란이 조금 떨어졌다.
“하고 싶은 말이…….”
“정령세계. 그래, 왜 이걸 잊고 있었지? 내가 탐험해야 할 곳은 바로 거기야!”
“산카가 위험하다고 했을 텐데.”
“했지. 하지만 넌 몇 번이고 거길 다녀왔다며? 게다가 멀쩡히 돌아왔고.”
“우연이었어.”
“우연으로 퉁치기에는 횟수가 많아. 넌 분명 요령을 알고 있는 거야.”
“글세…… 난 아는 게 없어. 정령세계에 관한 거라면 더더욱.”
샬롯은 눈을 가늘게 떴다.
“같이 가달라는 말은 안 할게. 가는 방법만이라도 알려줘.”
“몰라.”
“정말 이럴 거야?”
“진짜 몰라서 그래. 내가 원해서 그쪽으로 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물론 방법을 알았다면, 아버지와의 약속이 없었다면 혼자 찾아가 봤을 테지만.”
거짓말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산카에게 부탁 받아서 잡아떼는 거였다면 끝까지 물고 늘어졌을 텐데.
“정말 모른 거야? 모르는데 그런 곳을 다녀온 거고?”
샬롯은 잠깐 고민한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갔는데?”
“처음?”
기억을 더듬던 가하란이 입술을 뗐다.
“타챠 아저씨의 제구를 살피던 때였어. 목소리가 들려왔고 정신 차리고 보니 안원이었지.”
“도마뱀 아저씨? 잠깐만. 제구라면 그 창이잖아?”
창에 뭔가 비밀이 있는 건가?
골똘히 생각할 때였다.
시야에 먹잇감이 걸려들었다.
한동안 얼굴조차 비추지 않았던 타챠가 창을 어깨에 인 채 팩토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