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9화
“상정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는…….”
가하란은 카트시의 눈을 바라봤다.
“유단과 연관돼 있을지도 모르는 유사정령에게 단서를 준다는 거겠죠. 마나포집의 원안이 발표되는 순간 상대편도 카트시의 존재를 예측할 수 있게 되니까.”
카트시가 눈을 늘어트렸다. 창틀에 기댄 후 느긋한 목소리를 냈다.
-마나포집은 저와 로키가 고안해 냈어요. 가하란이 손을 대서 조금 바뀌었다고 한들 우리라면 본래 형태를 알아보겠죠. 카트시, 혹은 로키가 활동 중이라는 걸 알게 되는 거예요.
정보 누설까지 감내해야 하는 건가. 가하란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가하란이 말한 대로 결국은 넘어야 할 산이에요. 유단의 동태를 철저히 감시하면서 일을 진행해야겠죠.”
엔엔이 나직이 말했다.
-아니면 먼저 접근하는 방법도 있어요. 가장 위험한 적은 친구보다 가까이 둬라, 그런 격언이 있다면서요?
“너무 위험해.”
가하란은 딱 잘라 카트시의 의견을 부정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엔엔이 직접 위험에 노출된다.
이미 살인까지 저지른 유단이었다. 엔엔에게 무슨 짓을 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아니요. 카트시 말이 옳아요. 마나포집 원론을 발표하기 전에 먼저 유단에게 접근해야 해요. 사전에 정보를 흘리고 반응을 살피는 쪽이 대비하기 편하고요.”
“엔엔 님이 위험해져요. 그럴 수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가하란은 이미 유단에게 접근했었죠? 덴스를 혼자 찾아가기도 했고.”
“그건…….”
“가하란이 절 걱정하는 것만큼, 저 역시 가하란을 걱정해요. 그리고 몇 번이나 말한 거지만 전 쉽게 죽지 못해요. 칼랑께서 보호해주고 계시니까요.”
엔엔이 자신의 회백색 털을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생각만 해둘게요.”
“당장 실행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덴스, 유단, 그리고 아버지.
복잡하게 얽힌 인과관계 바깥쪽에 카트시의 동료가 있었다.
이름 모를 유사정령은 무얼 바라고 있을까? 무엇을 위해 덴스를 죽이도록 유단을 조종했을까?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무구한 유사정령을 유단이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연결망을 잃어버린 유사정령은 철저히 고립된 상태고, 유단이 제공하는 정보로만 세상을 해석해야 하니까.
정보가 필요했다.
엔엔의 말대로 먼저 손을 대는 게 옳은 선택인가?
가하란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미소 짓고 있는 엔엔을 바라봤다.
“가하란.”
“네?”
“또 혼자서 뭔가를 할 생각이라면 그만 둬요. 이번에는 다리를 부러트려서라도 말릴 테니까.”
슬그머니 눈동자를 돌렸다.
“얌전히 있을게요.”
“다른 말은 신용하지만, 그 말은 못 믿겠네요.”
귀 뒤쪽을 매만지며 어설프게 웃었다.
-이번만큼은 저도 엔엔에게 한 표 던질게요. 유단에게 접근하는 건 엔엔이 해야 해요. 길러준 덴스조차 죽인 인간이에요. 가하란이 방해물이라 인식한 순간 쓱싹 해버리겠죠.
쓱싹이란 말에 목덜미가 따끔거렸다.
“혼자서 엉뚱한 짓 안 할게요. 정말로. 하지만…… 한 번은 만나볼 생각이에요. 얼굴을 보고 얘기를 해봐야 아는 게 있으니까요.”
“펠트신이나 카트시에 관한 건 언급하지 말아요. 어디까지나 아는 형을 만나는 기분으로 가야 해요. 알겠죠?”
“네. 선은 지킬게요. 절 위해서, 그리고 절 걱정하는 두 분을 위해서.”
가하란은 엔엔과 카트시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 * *
몸이 생겼다.
촉감도 돌아왔다.
의지대로 움직이는 몸뚱이라 이리도 반가울 줄이야.
“응집돼 있어. 강하다고 표현해야하나? 이건 어떤 종류의 강함이지?”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단은 쯧 혀를 차며 앞을 보았다. 허연 눈이, 죽은 생선 같은 눈이 앞에 둥둥 떠다녔다.
“그런 게 뭐가 중요해. 그보다 나 좀 내보내 달라니까? 나 같은 거 붙잡아 둬서 뭐 하게.”
유단은 괴물에게 소리쳤다.
“네 요구 사항은 들어줄 수 없어.”
“왜? 대체 왜?”
“돌아갈 곳이 사라졌으니까.”
“사라지다니…… 설마?”
피와 살로 이뤄진, 현실의 육체는 이미 갈기갈기 찢어져 흩뿌려졌나?
허탈감이 밀려왔다. 육체를 잃은 정신이라니. 면 없는 파스타에 고기 없는 스테이크였다. 가니시만 잔뜩 놓여 있는 괴랄 맞은 음식.
풉, 하고 웃음이 나왔다.
“에라이, 좆됐네. 돌고 돌아 이제 괴물 뱃속에서 죽어야 해? 인생 지랄맞네, 진짜!”
냅다 누워버렸다.
주변에 떠 있는 눈들이 거슬려 눈꺼풀을 닫았다. 분명 눈을 감았는데, 주변이 여전히 보였다.
“잠도 못 자? 몸을 구현해 주려면 제대로 해주든가. 설마 똥오줌도 가려야 해?”
“흐트러지지 않는군. 인간들이 표현을 빌리자면, 그래, 절망하며 녹아내려야 하는데.”
“절망? 야, 뭐 희망이 있어야 물고 빨고 하는 거지. 남는 게 없는데 절망할 게 뭐 있어. 게다가 난 몇 년 째 이 상태였어. 몇 년 맞나? 깨어있는 채로 계속 있었더니 시간 감각도 맛탱이가 가버렸어.”
아득바득 버텨오며 겨우 희망의 끝자락을 봤는데, 결국 이 꼴이 됐다.
육신은 사라졌고 정신은 괴물 장난감이 됐다.
전전긍긍하는 것도 질렸다. 예정된 끝을 목도했으니 다 내팽개치고 편안하게 있다가 뒈질 것이다.
“죽이려면 빨리 죽여. 돌아갈 몸도 찢어버렸으니 나도 그렇게 하면 되겠네.”
“뭔가 착각하고 있군. 네 몸은 건들지 않았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건 네 몸이 내 곁에 없다는 뜻일 뿐.”
벌떡 일어나 코앞에 있는 눈깔을 붙잡았다. 끈적끈적한 게 촉감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내 몸, 찢어버린 거 아니야?”
“공격 의사가 없었다. 내가 공격할 필요도 없지.”
“그 안에 있던 놈은? 로키 그 새끼는!”
“나와 닮은 그것은 내버려 두었다. 데려와서 묻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그건 내가 건드릴 수 없는 것이었어. 인간과 비슷해 보였지만, 인간이 아니었지.”
“당연하지! 그건 기계니까. 우리가 만들어낸 고철 덩어리니까!”
두피가 근질거렸다.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긁었다.
“야, 너. 나한테 원한 있는 거 아니지?”
“원한? 추상적인 단어이지만 뜻은 이해했다. 너한테 그런 감정은 없다.”
“그러면 나 좀 돌려 보내줘. 그 새끼 잡아다가 다시 집어넣으면 돼. 어때?”
“내가 그래야 할 이유는?”
이유. 골치 아픈 단어였다. 유단은 쥐고 있던 눈깔을 놓았다.
“좋아, 네가 바라는 걸 말해봐. 내가 도움을 줄게. 그 뒤에 내가 원하는 걸 들어줘. 상부상조 하자고, 어때?”
“바라는 건 이미 손에 넣었다. 터전. 우리가 살아갈 땅. 그러니 네게 바라는 건 없다.”
“없으면 왜 날 뽑아낸 건데? 인간들을 왜 데려오는 건데?”
“알기 위해서.”
“뭘?”
사방에 둥둥 떠 있던 눈들이 한순간 자취를 감췄다. 남은 건 코앞에 있는 혼탁한 눈깔뿐.
“필요 충분한 공간을 확보했다.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일 테고. 하지만 인간은 나의 땅에, 우리의 공간을 침범하고 있다. 어째서? 그들은 이미 가질 만큼 가졌을 텐데?”
한심한 얘기였다. 유단은 눈깔을 노려봤다.
“나 말고도 다른 인간들과 얘기해본 거 아니야? 그러면 알 텐데.”
“육성을 통한 대화는 몇 번 나누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반대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더군. 진실된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안에 잠든 세계를 내 쪽으로 초대했으나…….”
빛이 감돌았다. 어둡기만 했던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단은 발치를 내려다봤다. 부패한 고깃덩이 같은 게 꾸물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사람의 눈코입이 덩어리 중간중간 박혀 있었다.
보는 순간 깨달았다.
인간이라는 걸.
하지만 혐오감 같은 건 없었다. 더러운 오물을 밟았을 때처럼 기분만 나빠질 뿐이었다.
고깃덩어리들은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지천에 깔려 있었다. 귀를 기울이니 “으.” 혹은 “어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게 다 인간이야?”
“그렇다.”
“그래서 녹아내렸다고 말한 거네. 진짜로 녹아버렸어.”
유단은 왼발을 들어 고깃덩어리를 밟아버렸다. 눈알이 짓눌리며 터져버렸다. 쉰 소리를 내던 입도 뭉개졌다.
“동족 아닌가?”
“동족? 이런 게? 아니지, 아니야. 이런 건 인간이 아니야.”
“폭력적이군.”
“네가 그런 말할 처지야? 이런 걸 잔뜩 만들어놓은 게 누군데?”
유단은 손가락을 들어 뭉개진 인간들을 가리켰다.
“나는 그저 초대했을 뿐이다. 형태를 유지 못 한 건 저들의 잘못이지.”
“……그 발상은 마음에 드네. 그래, 네 잘못은 아니야. 허약한 놈들이 잘못된 거지.”
유단은 자리에 철퍼덕 앉았다. 다리를 쭉 뻗어 고깃덩이에 올려놨다.
“인간은 별 볼 일 없어. 유사인종이라 부르는 타 종족보다 허약하고 지능도 떨어지고 결속력도 없다시피 하지.”
흰색 눈깔도 바닥에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 보잘것없는 동물이 대륙의 지배자가 됐어. 왜 그런 것 같아?”
“개체수가 많아서?”
“개체수로 따지면 벌레가 주인이 됐어야지.”
“벌레보다는 나은 지능을 갖고 있으니까.”
“뭐, 그것도 말이 되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가 있어. 바로 남의 것을 탐내는 끝없는 욕심이야. 그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인간을 초월하게 만들지.”
“욕심.”
탁한 눈동자가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관심이 생긴 듯했다.
“하지만 욕심만 있는 건 아니야. 욕심만 그득했으면 사회란 게 만들어졌었어? 인간은 말이야, 놀랍게도 도덕을 우선시해.”
“도덕.”
유단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배워서 그런 건지 선험적으로 들어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성이 작동하기도 전에 도덕이란 놈이 치고 들어와. 해야 할 이유보다 해선 안 될 이유가 머리를 먼저 건드리지.”
“욕심과는 다른 것인가?”
“늘어놓고 보면 달라 보이지만, 이게 또 같을 때도 있어. 도덕적 허영심에 미쳐서 자기희생만 죽어라 하는 놈들도 있거든. 인간 사회는 욕심만 그득한 놈과 도덕만 그득한 놈, 그 사이에 어중간한 놈들이 환상의 비율을 이루며 이뤄진 거야.”
“침범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
흰색 눈깔이 말했다.
“근데 인간은 더럽게 배타적이라 자기와 닮은 것들한테만 도덕을 발휘해.”
“그들은 날 몬스터, 마수라 부르지.”
“그래.”
“나를 도덕의 대상으로 삼을 가능성은 없는 건가? 공생은 합리적이다. 필요 이상의 자원을 소모할 필요가 없을 텐데, 왜 우리를 침범하는 거지?”
“말했잖아. 넌 인간들 눈에 그저 괴물이라고. 똑똑한 괴물. 위험한 괴물. 치워 없애야 할 대상.”
사방에 흰색 눈깔이 생겨났다. 서로를 바라보며 의구심을 띄웠다.
“개체마다 사상이 다르다. 우리와 공생을 바라는 쪽도 분명 있겠지. 그들이 다수라면 싸움은 무의미하다.”
“다수? 푸하핫. 내기 하나 할까? 마수와 공존하자고 주장하는 인간이 다수면, 내가 자살할게.”
“네가 소멸한다고 해서 내게 득이 되는 건 없다.”
“대충 넘어가. 내가 걸 수 있는 게 내 목숨뿐인데 어쩌겠어? 안 그래?”
유단은 흰 눈깔 위에 손을 얹었다.
“네 작은 친구들에게 도움을 구해보자고. 인간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는지, 엿보는 거야.”
* * *
“오늘 따라 고양이들이 왜 이렇게 난리야.”
샬롯은 저 밑에 있는 건어물 가게를 바라봤다. 아줌마가 얇은 막대기를 휘두르며 고양이를 내쫓고 있었다.
“많긴 하네.”
샬롯은 바람에 실려 온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여기저기, 볼멘소리가 가득했다.
쥐, 개, 고양이.
작은 동물들이 도시를 헤집고 있었다.
비가 오려는 걸까?
아니면 지진?
옥상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할 때였다. 반가운 얼굴이 팩토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가하란! 오랜만이야!”
손을 번쩍 들고 힘차게 인사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