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08화 (281/558)

제308화

재미난 거?

엔엔은 양손을 포개며 가하란이 불러온 누더기 인형에게 집중했다.

공방 시절부터 지금까지 충실한 보조로서 활약해준 인형이다. 32번째 퍼밀리어 인형. 이름도 ‘32’.

“기대해도 되는 거겠죠?”

“조금은요.”

가하란의 ‘조금’은 종종 상상을 초월했다. 엔엔은 기대감에 찬 눈으로 가하란과 인형을 바라봤다.

“모노클을 써주세요.”

엔엔은 왼쪽 눈에 모노클을 얹었다.

“파장 범위를 180b에 맞춰주세요.”

모노클 옆면에 손가락을 얹고 가하란이 말한 옵션값으로 수정했다. 180b. 마나포집을 위한 고유 파장 대역이었다.

희미한 연녹색 마나가 인형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마나포집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32가 마나를 보충하려면 이곳에 머물러야 하죠. 움직이면서 마나를 보급받는 건 안전성이 떨어지니까요.”

가하란이 식탁 옆에 선 채로 말했다.

“설마…….”

엔엔은 살짝 긴장한 채 가하란을 바라봤다.

“엔엔 님이라면 이미 예상하셨겠지만, 실제로 보면 좀 더 재미있어요.”

가하란이 식탁 옆을 벗어났다. 계단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 인형을 들어 올렸다.

파장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특정 위치에서만 효율이 극대화되는 마나포집이 장소 불문하고 효율을 내주고 있었다.

가하란이 이동했다. 계단을 내려간 것이다. 엔엔도 뒤따라 1층으로 향했다.

움직이는 동안에도 안정적으로 마나가 보충되고 있었다.

현관문까지 열고 밖으로 나간 가하란이었다. 모노클로 본 둔의 거리는 복잡하게 얽힌 마나의 흐름으로 난잡한 상태였다.

고유파장마저 간섭받아 마나포집 역시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해야 하는데…….

여전히 변동성을 억제하며 고유파장을 통해 마나를 공급받고 있었다.

“완성한 건가요?”

“아직 다듬어야 할 부분이 있어요. 카트시가 건네준 원안을 현시대에 맞춰 재해석하니 어긋난 곳이 몇몇 생겼거든요.”

“불완전 좌표 변화 중 마나 보충. 이것만으로도 완성 단계라고 볼 수 있어요. 가하란, 해냈네요. 정말…… 놀라워요.”

엔엔은 32를 넘겨받았다.

간섭을 이겨냈다. 휘몰아치는 마나의 소용돌이 속에서 특정 대역을 감지해 마나포집을 유지했다.

이상의 실현이었다.

꿈이 현실에 안착했다.

엔엔은 손바닥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32를 관찰했다.

마법과 마법공학을 접목한 것만으로도 기적의 산물인데, 거기에 안정화된 마나포집이 적용됐다.

엔엔은 상상했다.

작디작은 32가 점점 커지는 걸.

그 끝에 도달한 건 마나 재충전 없이 질주하는 거병의 모습이었다.

상상의 한계점에 도달한 순간 엔엔은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가하란은 몇 걸음을 앞서나가고 있는 걸까.

시대의 지식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결과물. 혁신이란 말로도 부족했다.

엔엔은 저 멀리 우뚝 솟아있는 분배소를 보았다. 이동형 마나포집 기술이 보편화되면 분배소는 존재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배터리 역시 획기적인 구조 변화를 겪을 것이다. 회로에 직접 마나를 공급하는 마나포집이라면 마수의 뼈를 이용한 거대한 배터리는 필요 없을 테니까.

분배소와 배터리 시스템 변화는 시대상이 바뀌는 걸 의미했다. 모든 게 변모할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격변이 찾아오겠지.

“이동형 마나포집이 개발됐으니 마나포집 원론을 공개할까 해요.”

가하란이 말했다.

엔엔도 적당한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혼란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인간들이 결속력을 무기 삼아 안정된 사회를 재구축했다.

옛모습을 어느 정도 되찾았으니 다음 단계로 나아갈 발판이 필요했다.

마나포집은 디딤돌 역할을 충분히 해줄 것이다.

“마나포집이 주변 마나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 대대적인 조사가 필요해요. 저 혼자 할 수는 없으니 학회의 도움을 구하려고요.”

“원론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시스템을 구축하면 되겠네요.”

“네. 모두가 좀 더 편해지겠죠.”

“이동형 마나포집은 언제쯤 발표할 거죠?”

가하란이 어둠에 잠긴 거리를 바라봤다.

“마나포집은 도시 생활의 편의성을 높여주는 선에서 끝날 거예요. 하지만 이동형 마나포집은 다른 방향으로 쓰이겠죠.”

“분명 그렇게 되겠죠.”

“전쟁의 신호탄이 될 수도 있겠죠?”

“둔이 기술을 독점하는 순간, 둔 제국의 탄생을 축하하게 될 거예요.”

가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 대륙에 마나포집이 퍼지고 난 후, 그때 다시 생각해 볼게요.”

“서두를 필요는 없죠. 지금도 버거울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니까요.”

엔엔은 모노클을 벗고 32를 바라봤다. 공학자로서 패러다임 시프트를 목격한다는 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살펴봐도 될까요?”

“안 그래도 부탁드리려고 했어요.”

본다고 해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이번에 제작하는 거병에 마나포집을 적용할 건가요?”

“모듈 조합이 끝난 후 인계받으면 따로 작업해 보려고요. 거병을 기동할 만큼의 마나를 확보할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시도는 해봐야죠.”

인형을 움직이는 것과 거병을 움직이는 것. 난이도는 비교할 수 없었다.

마나응축봉에서 벗어나 배터리를 장착한 거병은 안정성과 경량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마나포집으로 배터리마저 제거 혹은 간소화가 가능하다면?

보급품 문제가 해결된 거병이라.

상상하는 것조차 두려워진다.

엔엔은 작업방으로 들어가 32를 살폈다. 안 그래도 난해했던 마나포집 구조가 더욱 기괴한 형태로 변해있었다.

회로 겹침이 경이적인 수준이었다. 외부기술자가 봤다면 불량품이라 단정 지었을 것이다.

“육안으로 이걸 구별할 수 있는 건 가하란 뿐일 거예요.”

정밀한 모노클로도 겹겹이 쌓인 회로 구조를 구별해내지 못했다. 얼핏 보면 하나의 실선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아래 셀 수 없을 정도의 얇은 회로선이 서로를 휘감고 있었다.

압축의 예술이었다.

기존 마력선 회로로는 구현해낼 수 없는 기술이다.

마력선 짜맞춤.

마나포집에 발을 들이밀려면 마력선 짜맞춤을 겉핥기식이나마 이해해야 했다.

-엔엔의 실력이 나쁜 건 아니에요. 오히려 뛰어난 편이죠. 하지만 짜맞춤은 상위개념이에요. 이건 단순한 이해력으로는 접근할 수 없어요.

어느새 다가온 카트시의 눈이었다.

“구조는 눈에 들어와요. 몇 년을 봐왔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예요. 다른 인간들은 이게 복합구조라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 할 테니.

“가하란은 마나포집 원안을 발표한다고 했어요.”

-네, 들었어요.

“발표한다고 한들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카트시의 눈이 32를 향했다.

-없겠죠. 단언할 수 있어요. 말로 설명하는 개요를 들으면 대강은 이해해도, 실체를 목격한 순간 머리가 하얗게 변하겠죠. 해석할 줄 아는 눈이 필요해요. 뇌가 아닌 눈이.

신기술을 세간에 알려도 적용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사방에서 부탁, 요구, 협박이 밀려들 것이다. 가하란도 예상했을 문제일 테고.

“일단은 분배소 커넥터를 줄이는 쪽으로 움직일 거예요.”

카트시와의 대화를 들었는지, 가하란이 문에 기대면서 말했다.

“분배소를 기점으로 삼아 마나포집을 운영하면 현 시스템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사람들도 금방 적응할 테고요.”

“그다음은요?”

“분배소 역할을 안방으로 옮겨야죠. 개인이 편리하게 마나를 보급받을 수 있도록.”

“그때가 되면 분배소는 사라지겠군요.”

편의성 증대야말로 가하란이 원하는 마나포집의 사용처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을 거예요. 편함을 얻으면 그다음을 생각하죠.”

“조율해야겠죠. 악용하는 사람도 분명 나올 테지만, 억제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그 억제제가 될 거고요.”

원천 기술을 실적용 할 수 있는 건 현재 가하란 뿐이었다. 억제제가 되겠다는 말은 오만한 게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래도 조심해야 해요. 짜맞춤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마나포집은 위험한 쪽으로 쓰일 테니.”

“그건 감수해야 해요. 발전은 다수의 행복을 위해 앞으로 가요. 변하는 동안 특수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죠. 그게 두렵다고 머물면 도태된다고 봐요.”

정론이었다. 가하란의 말은 틀린 곳이 없었다. 모든 걸 고려하면 나아갈 수 없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제 안에서 두 가지 의견이 대립중이에요. 기술자인 전 가하란의 말에 동의해요. 진보는 문제를 불러오죠. 하지만 그걸 두려워해서는 안 돼요.”

엔엔은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었다.

“동시에 칼랑의 후손인 전 급격한 변화에 위기감을 느껴요. 조금 더 참으라고 설득하고 싶어지죠. 인간의 수명이 우리와 비슷했다면 분명 말렸을 거예요.”

인간은 자그마한 몸으로 태어나 짧은 족적을 남기고 떠난다. 그들에게 기다리라고 말하는 건 너무나도 잔인했다.

단축된 삶을 살기에 그들은 과단성을 발휘하고 도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가 할 일은 정해져 있어요.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가하란을 돕는 거예요.”

“고맙습니다.”

“학회에 갈 때 저도 같이 가요.”

“안 그래도 부탁드리려고 했어요. 포럼을 열고 설명회를 진행하려면 도움이 필요하니까요.”

결정은 내려졌다.

마나포집은 머지않아 세상에 공개될 것이다. 아마 수많은 공학자가 머리를 쥐어뜯게 되리라.

무능함에 비탄하고, 절망감에 빠져 손에서 펜을 놓아버릴 지도 모른다.

불가해한 지식을 마주한다는 건 즐거움이자 저주니까.

엔엔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학회에 가는 건 단순히 돕기 위함이 아니에요.”

문 옆에 서 있는 가하란 앞으로 걸어갔다.

“마나포집 이론은 제 이름으로 발표해야 해요.”

“엔엔 님께 폐를 끼칠 순 없어요.”

“아니요. 그렇게 해야 해요. 지식인으로서 가하란은 거인이지만, 육체적으로 봤을 때 가하란은 너무나도 빈약해요. 독점욕에 미친 인간들은 높은 확률로 해선 안 될 짓을 하죠.”

카트시의 눈도 옆으로 다가왔다.

-저도 엔엔의 말에 동의해요. 이론 제창자로 가하란이 전면에 나서는 건 위험해요. 막말로 동네 꼬마들이 셋 이상 덤비면 크게 다칠걸요?

“엔엔 님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엔엔은 가하란의 올곧은 눈을 보며 미소 지었다.

“이 도시에서 절 해할 수 있는 건 몇 없어요. 설령 그런 게 나타난다고 해도 제 다리를 쫓아올 수 있는 건 아예 없고요. 토끼 할머니라면 절 잡을 수 있겠지만.”

두 손을 내밀어 가하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니 전면에 나서지 마요. 동의하지 않으면 발표도 용납할 수 없어요.”

-맞아요, 맞아!

양손에 눌려 엉성한 얼굴이 된 가하란이 이내 소리 죽여 웃었다.

“그렇게 할게요.”

“좋아요.”

엔엔이 손을 뗐다. 가하란 얼굴에 털이 잔뜩 묻어났다. 흠흠, 작게 기침하며 얼굴에 묻은 털들을 떼어냈다. 떼어내면서 또 묻는 게 문제지만.

“학회에는 언제쯤 갈 거죠?”

“고민 중이에요. 웨켄에서 마도사를 찾은 다음에 발표를 할지, 아니면 그 전에 발표를 해놓을지.”

“기술 시연을 하려면 가하란이 제 곁에 있어야 해요.”

“좀 고민해 봐야겠네요.”

“그래요. 당장 발표할 건 아니니.”

엔엔은 슬쩍 32를 바라봤다.

마나응축로에서 분배소와 배터리를 거쳐 마나포집으로 기술전환이 일어난다.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

기대되면서도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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