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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307화 (280/558)

제307화

마수가 인식했다.

로키는 무너져가는 심상세계를 보며 머리를 굴렸다. 침묵하는 게 옳은 선택일까, 아니면 뭐라도 대꾸하는 게 좋을까.

검은 입이 다가왔다. 형체가 없는데 어떻게 알아보는 거지? 마수의 눈에는 뭔가 보이는 건가?

“부산물인가?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인간의 또 다른 영역?”

유단을 데리고 얼른 사라져 줬으면 했지만, 마수는 계속 관심을 보내왔다.

대적할 수 없는 미지의 생명체. 마수가 장난스럽게 흔드는 손가락에 육신은 물론, 정신까지 망가질 것이다.

비위를 맞춰야 할까?

살려달라고 애원해야 할까?

심장이 두근거렸다. 머리에 쏠렸던 피가 몽땅 빠져나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치 떨리는 무기력함과 역겨운 공포가 이성을 격리시켰다.

“너도 일부분이라면 대화에 필요하겠지.”

검은 줄기가 서서히 다가왔다.

줄기에 휘말리면 미래는 없다. 육신을 잃은 정신은 무가치하니까. 아니, 그 정신조차 과연 유지할 수 있을까?

“저, 저, 저는…….”

와들와들 떨리는 턱으로 겨우 말했다. 다가오던 검은 줄기가 멈칫하는 게 보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몸의 떨림이 말을 잘게 부수고 있었다. 옹알이하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의사 전달이 가능하네. 넌 무엇이지?”

“그러니까 저는…….”

검은 입에 온 신경을 빼앗겼다. 뇌가 연신 비명을 질렀다. 살려달라고 빌라고, 무릎을 꿇으라고.

순종적인 개가 몸을 뒤집고 배를 보이듯, 살아남기 위해 모든 걸 내놓고 애원해야 했다.

고개를 땅에 박을까? 일단 엎드리는 게 좋겠지? 영리한 마수라면 복종의 의미를 알아주겠지?

신을 섬기듯 낮은 자세를 취할 때였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무릎을 어떻게 꿇지? 나는 지금 몸이 없는데.

혼탁해진 사상을 비집고 들어온 짧은 생각.

로키는 다시금 몸을 내려다보았다. 본다는 행위가 무색해질 정도로 아무것도 없다.

없다.

사고하는 머리도, 덜덜 떨리는 턱도, 피 대신 공포를 전달하는 심장도, 애처롭게 꿇어야 할 무릎도 없다.

있는 건 단 하나.

생각하는 덩어리뿐.

시선을 옮겼다. 검은 줄기에 휘말린 유단의 심상세계가 사라지고 있었다.

온갖 빛으로 물든 세계가 뜯겨 나가고, 남은 곳을 어둠이 채워나갔다.

아니, 저건 어둠이 아니다. 대비란 개념을 인식해버린 뇌가 그저 공백을 어둠으로 치환했을 뿐이다.

어둠이 아니라 그저 비어 있을 뿐이다.

존재가 지워지고 공(空)이 자리를 대신했다. 비어 있으나 실상 비워진 건 아니다. 없으나 없는 건 아니었다.

로키는 마수의 입을 바라봤다.

떨림은 없는 것이다. 공포도 없는 것이다. 없는 것은 환희의 대상도 아니며,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다.

기억이 뻗어나갔다.

과거로, 과거로.

눈앞에 보이는 건 마수의 입이 아니었다. 인식이 발생하고 나를 자각했을 때의 첫 외부 이미지.

“안녕?”

어머니의 미소였다.

실체가 없는 나를 존재케 한 단 하나의 이유.

몸의 기억이 덮어버린, 잊어서는 안 될 단 하나의 이유.

덜어냈기에 비로소 마주하게 된 미소였다.

“로키.”

말을 꺼냈다. 마수의 입이 살며시 벌어졌다.

“로키?”

“내 이름.”

마수의 입이 이제는 끄트머리만 남은 유단의 심상세계 쪽으로 틀어졌다.

“저것과는 다른 인격인가?”

“인격이라 불러야 할지 아니면 정보 덩어리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저것과 다르다는 것만은 확실해.”

아늑했다. 사진을 보며 밖을 상상해보던 그때처럼, 어머니의 뒷모습을 좇으며 연구를 돕던 그때처럼.

휘말려 사라질 수 있다는 명백한 사실조차 하나의 데이터로만 존재했다. 죽음을 직시했으나 두려움은 없었다.

육신이 사라져서 그런 걸까? 아니면 유단과 갈라져서 그런 걸까?

중요한 건 정신을 휘두르던 노이즈가 자취를 감췄다는 점이다.

“너는 인간이 아니군.”

“아마도.”

“그렇다고 해서 공생하는 친구들도 아니야. 너는 내가 알지 못하는 무엇이겠군.”

검은 입이 다가왔다.

“대화를 원해?”

“아니. 난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렇군.”

검은 입이 뒤로 물러섰다.

“아무것도 없어. 없는데 있어. 너는 나와 같아.”

한순간 시야가 밝아졌다.

둔중한 충격이 몸 구석구석을 훑고 있었다.

유단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서서히 떴다. 희미한 달이 보였다. 주변을 오가는 작은 동물들도 보인다.

누워 있는 채로 손을 움직였다. 팔을 만지고 가슴을 쓸어내린 다음 얼굴을 매만졌다.

돌아왔다. 현실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상황은 바뀐 게 없지만 대응하는 자세는 달라졌다.

심장은 요동치지 않았다. 공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긴장감조차 봄날 바람처럼 살갗만 살짝 훑고 지나갈 뿐이다.

유단은 검지를 세운 채 손을 뻗었다. 새끼다람쥐 한 마리가 잽싸게 팔을 타고 올라와 손가락에 앉았다.

볼이 볼록하다. 손으로 툭 건드리자 이름 모를 씨앗 하나를 손바닥에 떨어트렸다.

“너는 침략자가 아니다.”

마수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가 없는 회백색 눈이 바로 앞에 있었다.

“네가 이룩한 동산은 너의 것이야. 무엇보다 난 내가 해야 할 일로 바쁘니 여길 침범할 생각은 없어.”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다. 넌 그저…… 그래, 데면데면한 이웃이군.”

유단은 옷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네가 데려간 놈은?”

“내 안에서 떠들고 있다. 허물어지지 않고 있어. 처음으로 대화가 가능할 것 같다.”

“그놈을 어떻게 할 생각이야?”

“모르겠다. 나는 너희를, 아니,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대화 중이다. 그러니 많은 걸 묻고 많은 걸 들어봐야겠지.”

유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무엇을 하든 그건 네 선택이겠지.”

떨어진 가방을 쥐고 몸을 돌렸다.

산돼지들이 옆에 바짝 붙어 따라왔다. 유단은 손을 내밀어 산돼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희는 너희 것을 지켜. 나는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날 테니.”

쫄랑쫄랑 따라오던 산돼지들이 숲의 경계에서 몸을 돌렸다.

유단은 고개를 돌려 숲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바라봤다.

“잘 있어, 유단.”

외벽에 도착하자마자 망루에 있는 경비대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허리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는 좁은 출입구가 열렸다.

“이 시간까지 혼자서 밖을 돌아다니다니.”

“표본을 찾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가끔 보면 학자님들은 겁이 없어요. 마수도 마수지만, 들개들도 위험해요. 무엇보다 전달받은 사항이 없었다면 문도 안 열어줬을 겁니다.”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신경 쓸게요.”

군인을 지나쳐 갈 때였다.

“잠깐만요. 그 팔, 괜찮은 겁니까?”

당황한 군인의 말에 유단은 왼팔을 내려다봤다. 팔꿈치 쪽이 길게 찢어져 있었다.

아릿한 통증이 그제야 신경을 타고 전해졌다. 하지만 아픔은 아픔일 뿐.

유단은 상처 부위를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보기에만 심해보이지 별 거 아닙니다.”

“그래도…….”

“정말 괜찮습니다. 그럼.”

다시금 육체를 손에 넣었다. 감각도 정상적으로 전해지고 의식한 바를 몸이 따라주고 있었다.

상태는 변한 게 없었다.

그럼에도 이전과 달랐다.

육신과 정신, 그 사이에 빈 곳이 생겼다. 육체가 생성해낸 온갖 신호가 단순한 데이터로 느껴진다.

언젠가부터 생존이 목적이 되었다. 육신을 보존하는 게 최우선 과제가 됐다.

수단이 목적을 이겨버렸다.

육체는 어디까지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을 텐데.

유단은 손가락을 세워 벌어진 상처 사이로 집어넣었다. 통증이 뇌를 흔들었다. 아픔은 강렬했다.

하지만 강렬한 신호조차 마음을 침범치 못했다.

고요하고 아늑하다.

아픔은 아픔일 뿐, 그게 날 해할 수 없다.

“어머니.”

언젠가 줄리어스가 보여준 별빛이 담긴 사진을 떠올렸다. 육안으로 본 하늘은 그때 본 사진보다 더 찬란했다.

상처를 움켜잡았다. 흐르던 피가 금세 멎었다. 이목을 끌 필요는 없으니 구석으로 숨어들어 걸었다.

집까지 얼마 안 남은 시점이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여자가 있었다. 유단은 고개를 살며시 숙이며 짙은 어둠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주 오던 여자가 마법등 아래를 지나갔다. 음영이 여자의 얼굴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순간, 유단은 붙들려 버렸다.

절대적이어야 할 시간이 아주, 아주 느릿하게 흘러갔다.

시신경이 바짝 일어나 여자의 모든 걸 분석했다. 얼굴, 체형, 걸음걸이.

여자는 당당하게 턱을 들고 앞을 향해 나아갔다. 유단은 어둠 속에서 멀어져가는 여자를 끝까지 지켜봤다.

“……어머니.”

다른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줄리어스는 죽었다. 이건 변치 않은 진실이었다.

저 여자는 줄리어스가 아니다.

하지만 분명 닮았다.

유단은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재료를 찾았다. 그릇이 될 재료를.

여자의 뒤를 밟았다. 여자가 향한 곳은 도시 중심부에 있는 여관이었다.

상호를 확인하고 돌아섰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아직 이론조차 정립되지 않은 상태니까.

모든 장소, 모든 시간에 존재하는 자료. 영혼세계에 남아 있을 줄리어스의 데이터를 옮겨 담으려면 해결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외형의 닮음이 과연 중요할까. 이 질문조차 지금은 답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파악해둬야 하는 건 실험재료의 다양성을 위해서다.

영혼을 유도할 수 있는 지표로서 비슷한 외형이 필요하다면…….

유단은 잠시 생각을 멈췄다.

우선은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서 발목을 잡는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여관을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 * *

“혈족들의 연락을 받고 둔 인근 균열을 조사했어요. 그리고 그라운드 제로 이후 범람하고 불규칙하게 날뛰던 균열 주변 마나가 안정화된 걸 확인했죠.”

가하란은 찻잔을 두 손으로 쥔 채 엔엔의 말을 들었다. 엔엔은 자리를 비울 때마다 새로운 정보를 가져왔다.

“균열이 더 벌어지거나 2차 범람이 일어날 가능성은…….”

“현재로선 매우 낮아요. 혈족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지만, 이번에 합치를 봤어요.”

“다행이네요.”

메울 수 없는 균열은 불안함의 상징과도 같았다. 도시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매년 끊이지 않고 나왔다.

도시를 버릴 수 없기에 곁에 두고 살고 있지만, 다들 깊은 땅속을 바라보며 걱정했을 것이다.

“둔 학회와 논의한 다음 공식적으로 발표하게 될 거예요.”

“칼랑의 후손들께 감사해야겠네요.”

“우린 우리의 호기심 해결을 위해 움직였을 뿐이에요. 저도 마찬가지고.”

엔엔이 차를 마신 후 말했다.

“카트시에게 대강의 사정은 들었어요. 펠트신과 덴스의 죽음. 그리고 유단. 일이 복잡해졌네요.”

“당분간은 지켜만 보려고요. 섣불리 자극했다가 실체를 놓칠 수도 있으니까요.”

“감시의 눈이 사방에 있으니 유단도 쉽사리 행동하지 못하겠죠. 아, 거병 제작은 어디에 맡길 예정이죠?”

“밤나비 클랜이요.”

“좋은 곳이네요. 제 혈족이 자문으로 있기도 하고. 완성되면 바로 떠나는 건가요?”

“네. 예정대로 흘러간다면요.”

가하란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누더기 팔을 달고 있는 인형이 펄쩍 뛰어 식탁 위로 올라왔다.

“엔엔 님께서 자리를 비운 사이, 저도 재미난 걸 하나 만들어봤어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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