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06화 (279/558)

제306화

-어머니. 밀레나는 어머니를 닮았어요. 성격은 아주 다르지만.

어머니?

밀레나는 퀸을 살며시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어머니라면 개발자를 말하는 거겠지?”

-맞아요. 차가운 쇠에 영혼을 불어넣고, 저를 비롯한 우리를 만들어낸 창조주. 밀레나는 어머니를 닮았어요.

창조주라.

“어떤 사람이었어? 아, 물어서는 안 되는 건가?”

-밀레나라면 상관없어요. 이미 제 존재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어지간한 비밀은 비밀이 아니게 되니.

카트시의 눈이 밤하늘을 향했다. 별빛이 잘 보이지 않는, 캄캄한 하늘이었다.

-어머니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기술이 썩 좋지는 않았죠. 그래서 실험실 깊숙한 곳에서 고양이, 그리고 우리와 같이 시간을 보냈죠.

“저번에도 얼핏 들은 거 같은데, 네 수준의 유사정령이 더 존재하는 거야?”

-네. 체스 말의 수만큼 존재해요. 아니, 했었죠. 이 시대까지 살아남은 건 저 혼자일 테고.

“쓸쓸하겠네.”

-가끔은요. 하지만 괜찮아요. 가하란이 있으니까. 물론 밀레나도. 약간 마음에 안 들지만 엔엔도 끼워 줘야겠네요.

카트시가 작게 웃었다. 사람의 목소리를 모방한 기계의 소리. 그런데도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눈을 감고 들으면 사람과 마주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어머니의 이름은 줄리어스에요. 구태의연한 표현을 빌려 쓰자면, 세계를 뒤바꿀 기술자였죠. 참고로 그 성과가 저예요. 모르실 것 같아서.

밀레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커피를 지독하게 사랑했고, 고양이를 끔찍하게 아꼈으며, 읽는 걸 좋아해 잠자는 시간보다 문서를 들추는 시간이 길었던 사람.

-그리고 말이죠!

밀레나는 턱을 괸 채 카트시의 말을 들었다.

어린애 같았다.

부모의 대단함을 동네 친구한테 자랑하는 어린애.

카트시의 기억은 상세했고, 듣고 있으면 머나먼 과거가 눈앞에 그려질 정도로 표현이 풍부했다.

“정말 사랑했구나, 줄리어스를.”

밀레나는 카트시의 눈을 보며 말했다.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쌓아가던 카트시가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리 길지 않은 침묵이었지만, 밀레나는 그 짧은 시간동안 카트시가 많은 생각을 했음을 알아챘다.

-사랑하지 않고 배길 수 있나요? 제게 세상을 준 사람인데. 다들 좋아했어요. 좋아하는 방식이 약간씩 달랐지만, 줄리어스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는 마음은 같았어요.

“보고 싶겠네.”

-보는 거야 지금도 볼 수 있어요. 기억단자를 뒤적거리면 떠올릴 수 있으니까요. 다른 것들은 잊어도 어머니에 대한 건 잊지 않을 거예요.

추억을 곱씹는 것도, 여운에 빠지는 것도 인간 같다. 줄리어스는 대체 무얼 만든 걸까.

아니, 카트시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만든다’라는 단어에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탄생. 그래, 탄생이 어울렸다.

카트시가 말을 이어나갈 때였다. 현관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돌아왔나 보네요.

“누군지 알아?”

-이런 독특한 파장을 지닌 건 엔엔 뿐이에요. 밀레나, 가서 문을 열어줄래요?

기억 속에 묻혀있던 칼랑족의 얼굴을 떠올리며 현관문을 열었다.

문 건너편에 있는 푹신한 늑대 얼굴과 마주하자마자, 엔엔이 입을 열었다.

“……여기 살던 인간이 이사를 간 건가요?”

“아니요. 가하란이라면 잠깐 자리를 비웠어요. 그보다, 저 기억하시나요?”

엔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짓은 고상한데 어쩐지 귀엽게 느껴진다.

“인간족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라운드 제로 이전에 둔을 찾았어요. 스콜라 생도였죠. 이름은 밀레나.”

“밀레나, 밀레나.”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이름을 외던 엔엔이 아, 하는 소리와 함께 한걸음 다가왔다.

“기억나요. 가하란하고도 아는 사이였죠?”

“네.”

복슬복슬한 손이 악수를 요청해왔다. 밀레나는 엔엔의 손을 붙잡았다.

-밖에서 그만 놀고 얼른 들어와요.

카트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엔엔의 표정이 경직됐다.

“저도 카트시에 대해서 대충은 알아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엔엔과 함께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카트시가 난리를 쳤다. 어딜 그렇게 돌아다닌 거냐면서.

“카트시가 걱정할 줄은 몰랐네요.”

-그쪽을 걱정한 게 아니라 가하란을 걱정한 거죠. 뭐, 그래도 다친 곳은 없어 보이니 다행이네요.

카트시는 엔엔이 자리를 비운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쉬지 않고 빠르게 말했다.

단순 보고였다면 잠자코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간중간 사견이 듬뿍 들어간 내용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가하란이 밀레나에게 사랑의 세레나데를…….

“그런 적 없어.”

-……와 비슷한 구애를…….

카트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곧바로 말을 정정하며 있었던 사실만 말하기 시작했다.

“덴스가 죽었군요. 이건 예상하지 못했어요. 가하란은 괜찮은가요?”

엔엔이 물었다.

-밀레나가 없었다면 불안정한 상태가 됐을 거예요. 다행히 지금 가하란은 아주 건강해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밀레나 덕분이죠.

“그 정도는 아니야.”

밀레나는 카트시를 쏘아본 후 엔엔에게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듣다보니 알게 되는 사실이 있었다.

카트시는 여전히 비밀이 많고, 그 비밀 대부분은 가하란과 연결돼 있다는 걸.

특히나 덴스의 죽음 뒤에 무언가 있다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다. 가하란은 사건 이면의 진실을 알고 있는 걸까?

궁금증이 머릿속을 기웃거렸다. 입도 근질거렸다. 하지만 입술을 열지 않았다.

알아야 할 일이었다면 가하란이 말해줬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 이만 가볼게요. 가하란도 늦을 거 같으니.”

-왜 벌써 가요? 저랑 더 얘기하지.

“다음에.”

엔엔과 카트시.

분명 깊은 대화가 필요할 것이다. 눈치껏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

엔엔이 문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밀레나를 못 믿는 건 아니에요. 가하란과 카트시가 믿음을 준 만큼 저도 당신을 믿어요. 하지만 믿음과 별개로…….”

“알아요. 가깝다고 해도 모든 걸 공유하는 건 아니니까요. 엔엔 님께서 저한테 말해줘도 괜찮겠다는 판단이 들면, 그때 얘기해 주세요.”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묵례로 인사를 끝내려고 하는데, 엔엔이 성큼 다가왔다.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촉촉하게 물든 검은 코가 밀레나의 콧등을 툭 건드리고 떨어졌다.

놀라서 굳어버렸다.

“잘 가요.”

엔엔이 집으로 들어갔다. 밀레나는 콧등에 남아있는 기묘한 감촉을 느끼며 실없이 웃었다.

칼랑족의 인사인가?

밀레나는 가하란의 집을 잠시 지켜보다가 걸음을 돌렸다.

* * *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기이하다.

유단은 서슴없이 날아드는 작은 새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발치를 오가는 작디작은 초식동물들도 도망이란 걸 모르는지 계속 쫓아왔다.

얼마나 걸은 걸까.

하늘은 이미 검게 물들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숲을 혼자서 밤에 걷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여기서 끝이라니. 이렇게 시시한 결말은 원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몸의 주인도 이제는 포기했는지 시끄럽게 떠들지 않았다. 대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릴 뿐이다.

숲 어딘가에 있을 불청객을 찾아 연신 걸음을 옮겼다. 희미한 달빛에만 의지할 수 없어 가방에서 마법등을 꺼냈다.

배터리를 연결하자마자 주변이 밝아졌다.

유단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둠 속에 숨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초식동물만 주변을 어슬렁거린 게 아니었다. 흩뿌려진 빛무리의 경계, 아슴푸레한 저 너머에 포식자들이 보였다.

들개인지 늑대인지 분간은 안 되지만, 분명한 건 저것들이 달려들면 한순간에 끝난다는 점이다.

강렬한 공포심에 몸이 살짝 떨렸지만, 오히려 머리는 맑아졌다.

“너희는 날 물지 않을 거야, 그렇지?”

탄드라 교수가 말했던 대로 동물들은 먼발치서 지켜볼 뿐 달려들지 않았다.

기묘한 평화였다.

이게 마수가 이뤄낸 공동체 의식인가?

서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로 단단히 묶인 동물들이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문득 먹이 조달을 어떻게 할지 궁금해졌지만, 사소한 호기심은 묻어두기로 했다.

긴장한 몸을 다시 움직였다. 산돼지 몇 마리가 오른쪽을 지나갔다. 그대로 지나칠 줄 알았는데, 산돼지는 멀거니 서서 기다렸다.

혹시나 해서 산돼지 쪽으로 움직였다. 산돼지들이 숲 깊숙한 곳을 향해 뛰었다.

안내하고 있는 건가?

산돼지의 꽁무니를 쫓아 얼마나 걸었을까.

유단은 손에 들고 있던 마법등을 놓치고 말았다.

저 앞에 있다.

모든 감각이 아우성을 쳤다. 도망치라고, 생존을 위해 몸을 돌리라고.

뒤틀린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여기 죽기 위해 왔다.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미지의 존재와 조우했다.

-도망쳐, 도망치라고!

몸의 주인이 애타게 외쳤다.

유단은 눈을 똑바로 뜨고 앞에 있는 생명체를 바라봤다.

검은 외피 위로 달빛이 미끄러졌다. 온갖 짐승들이 검은 생명체 주변에 모여들었고, 심지어 그 위를 뛰어다니기도 했다.

검은 천국.

유단은 문득 그런 단어를 떠올렸다.

“이전에 찾아왔던 인간들하고는 다르네.”

검은 촉수 한 가닥이 스멀스멀 다가왔다.

“나는…… 당신과 대화를 원합니다.”

“대화?”

“그렇습니다.”

마수가 어떤 방법으로 심상세계, 자아를 뽑아내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닌 결과였다.

“두려움. 아니, 넌 뭔가를 기대하고 있어. 너희들은 쓸데없이 복잡하지.”

“전 그저 대화가 하고 싶을 뿐입니다.”

촉수가 서서히 다가왔다. 다리를 휘감고 올라와 척추를 타더니 목을 한 바퀴 감았다.

촉수의 끝이 목덜미에 닿고 있었다.

“너희들은 내 안에서 형태를 유지하지 못 했어. 이번에도 그렇겠지. 난 인간이란 것에 점점 흥미가 사라져가. 과욕을 부리는 동물들. 숲을 공유할 줄 모르는 파괴자들.”

유단은 눈에 힘을 줬다.

어딜 가든 기다리고 있는 건 최악의 결말이었다.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몸의 주인을 던져주고, 순수한 이성을 되찾는 것뿐이다.

“네가 마지막일 거야. 이런 행위가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목이 따끔거렸다.

그 순간 시야가 역전됐다.

다채롭게 빛나는 세계였다. 보는 순간 깨달았다. 기계는 소유하지 못한, 몸의 주인이 본래 갖추고 있던 심상세계라는 걸.

유단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본다는 행위를 했지만, 보이는 건 없었다.

존재하나 확인할 수 없다.

이게 내 상태라는 건가?

-아니야! 내가 아니라고! 난, 난!

비명이 들려왔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세상을 검은 줄기가 휘감고 있었다.

세상이 뜯겨 나간다.

인간의 안쪽 세계가 볼품없이 사라져간다.

-너! 너 이 개새끼야!

로키는 찢겨나가는 세계를 바라봤다. 성공인가? 이제 이 몸의 온전한 주인인 나인 건가?

환희에 차오를 때였다.

“넌 뭐지?”

눈앞에 불쑥 솟아난 검은 입이 질문을 던져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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