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5화
“아르드헨이 이걸 얻게 된 경위는?”
긴 설명이 끝나자마자 민 교수가 되물었다. 손에 들린 ‘협회’ 배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래, 그렇겠지. 그나저나 욕심 많은 그 인간은 제국이 끝나도 포기하지 않고 뭔가를 또 꾸미고 있구나.”
민 교수가 손을 내밀었다.
“그거, 살펴보고 싶은데.”
가하란은 배지를 넘겼다. 엘리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마법공학품이라면 회로가 반응해야 하는데 그건 아닌 거 같고.”
“주술이에요. 주법이 걸려 있는 게 확실해요.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느낌. 익숙해요. 퀼의 냄새가 나요.”
엘리가 배지를 이리저리 뜯어봤다.
“마도사가 만든 게 확실해?”
“아마 맞을 거예요. 단순해 보이면서도 들여다보기 힘든 주법. 퀼의 방식과 흡사해요.”
엘리의 설명이 끝났다. 민 교수는 배지를 손 안에서 굴리다가 다시 가하란에게 돌려줬다.
“둔을 언제 떠날 생각이니?”
“최대한 앞당겨 보려고 노력 중이에요. 하지만 당분간은 힘들어요. 준비할 게 많거든요.”
민 교수가 안경을 올려 쓰며 물었다.
“웨켄이라고 했지? 어디쯤에 있는지 감이 안 잡히는데.”
“듣기로는 옛 성도 남부, 박새눈 고지 근처에 생긴 도시라고 해요.”
“거기라면 미개척지 인근이잖아. 예전에도 가기 힘든 곳이었는데.”
“자세한건 저도 모르겠어요.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최근 그쪽 지역에서 둔으로 온 사람은 찾지 못했어요. 용병단과 상단 쪽도 알아봤는데 정보가 거의 없어요. 도시가 있다는 것 외에는.”
정보가 없기에 용병단을 꾸려 떠날 수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알아봤지만 역시나 거절당했다.
이런 시기에 안전한 루트도 없이 움직이는 건 자살행위라면서.
“그런 곳을, 아드르헨은 사람 하나 달랑 데리고 돌아다니고 있는 건가? 수호기사도 반쯤 괴물이 됐나 보네.”
민 교수가 중얼거렸다.
가하란은 타챠와 경합을 벌이던 테인을 떠올렸다. 산의 전사를 막아내던 그 검술이라면 어지간한 마수는 가볍게 제압하리라.
“거병 제작이 끝나는 대로 출발할 생각이에요. 민 교수님도 그때 같이 움직이시죠.”
“제작? 그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한 거구나. 근데 제작보다는 완성된 걸 사는 게 낫지 않겠어?”
“사정이 있어서요.”
카트시를 옮겨 담을 그릇이었다. 여기저기 손대야 할 곳이 생길 테니 새로 제작하는 게 바람직했다.
“사정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만,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는 않은데.”
팔짱을 낀 민 교수가 눈을 씰룩였다. 엘리가 종이 다발을 꺼내며 말했다.
“그 배지 잠깐 줘볼래?”
엘리가 종이 위에 배지를 올려놨다.
“만약 이게 퀼의 주법이라면 내가 옮길 수 있을 거야. 아, 옮긴다고 해서 본래 지정된 주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종이 위로 두 손을 포개며 입술을 달싹거린다. 고정된 땅, 빌려낸 힘, 되돌아가는 가지. 그 뒤로도 말들을 쏟아냈는데 어떤 맥락인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주변 공기가 달라졌다. 마나 파장은 없다. 하지만 알 수 없는 힘이 엘리의 두 손을 통해 작용하고 있었다.
가하란은 슬며시 정보의 세계로 들어갔다. 낯선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방의 흩뿌려져 있는 마나의 선 사이로 은빛 실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나를 매개로 삼는 또 다른 힘이자 정보였다.
이게 주술인가.
마나를 이용하는 방법에 한계가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가하란은 대기 중으로 퍼져나가는 은빛 선을 살펴봤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마나를 이용하지만 마나를 자극하지는 않는다. 마나를 지표 삼아 움직일 뿐인가?
배지에서 뻗어 나와 엘리의 손을 타고 대기 중으로 산개하는 은빛 선은 하늘에 맞닿아 있었다.
하늘 너머로 사라진 저 희미한 은빛선 끝에 마도사가 존재하는 걸까?
눈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정보의 세계에서 한걸음 빠져나오려 할 때였다.
마나를 지표 삼아 움직이는 정보.
“연결망.”
무의식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민 교수가 물끄러미 쳐다본다. 가하란은 눈을 슬며시 감았다 뜨며 빙긋 웃었다.
“방금 뭐라고 하지 않았어?”
“주술이란 게 신기해서요. 뭘까, 고민하다 보니까 별생각 없이 말이 튀어나왔어요.”
“하긴. 이 이해 못 할 힘을 마주하면 누구나 다 멍해지지. 마법과는 다른 힘이니까.”
엘리가 긴 숨과 함께 손을 거둬들였다.
“퀼이 남긴 게 맞아요. 조합의 기초주법을 기반으로 만들어서 우리도 이용할 수 있게 해놨어요. 주술방어가 견고하지 않은 것도 퀼의 배려겠죠. 그 남자, 대체 어디까지 내다 본 걸까요?”
“내다봐요?”
가하란은 들뜬 얼굴을 한 엘리에게 물었다.
“퀼은 말이지, 정말 불가사의한 사람이거든. 미래를 내다보는 것 같기도 하고,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 배지가 나한테 전해질 경우의 수도 고려해 놓은 걸 거야.”
그런 게 가능한가?
의구심이 들었으나 곧 수긍했다. 일인군단, 마도사 퀼비언. 상식의 잣대로 판별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가하란. 이제 한정승인만 남았어.”
“……재산권 얘기는 아니겠죠?”
“재산? 아, 그런 거 아니고.”
엘리가 가하란의 손을 붙잡아 종이 위로 옮겼다.
“여기에 대고 승낙해주면 돼.”
“말로 하면 되나요?”
“말로 해도 되고, 의식을 집중해도 되고. 그걸로 주술이전은 끝.”
엘리는 퀼비언과 같은 집단에 속해있었다. 배지의 힘을 빌려준다고 해도 문제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승인할게요.”
입술을 떼자마자 손아귀가 따끔했다. 정전기가 일어난 것처럼,
“됐다!”
엘리다 종이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저걸 ‘부적’이라 불렀었지. 주술과 관련된 도구인 것 같다.
민 교수가 부적을 살며시 쥐었다.
“같이 움직이는 게 가장 좋겠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면 우리가 먼저 떠날게.”
“그게 낫겠네요.”
“먼저 퀼을 찾게 되더라도 특무대령에 관한 건 전할 테니 염려 마.”
“고맙습니다.”
“고맙긴. 네 덕에 방법을 얻게 된 건데.”
볼일은 끝났다. 민 교수 말대로 동행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 일정을 억지로 맞출 필요는 없었다.
민 교수는 민 교수 대로, 나는 나대로 퀼비언을 찾으면 될 뿐이다.
민 교수가 퀼비언을 먼저 찾아 브라인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여행은 떠날 것이다.
보고 듣고 배우고 깨닫고 싶은 게 많았으니까. 아버지가 남긴 노트를 해석하려면 알아야 할 게 산더미처럼 많았다.
근데 여행의 목적이 바뀌어도 밀레나가 동행해 줄까.
퀼비언은 찾는다란 대의명분이 사라지고 나면 남는 건 사적인 이유뿐이다. 누나는 그래도 따라와 줄까?
“그만 가볼게요.”
민 교수의 인사를 받으며 여관을 벗어났다.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미리 고민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그래도 같이…….”
마주 오는 사람이 없는 거리를 걸으며, 가하란은 혼자 조용히 말했다.
* * *
학회 인식표를 보여주자 외벽을 지키는 군인이 친절하게 말했다.
“외벽 주변은 안전하다고 해도 멀리 가면 안 됩니다.”
“표본만 채취하고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유단은 작은 가방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안내자를…….”
“정말 괜찮습니다.”
부드럽게, 하지만 재차 권하지 못하도록 끝맺음했다. 군인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문제가 생기면 소리를 지르세요. 근처에 있는 병력이 움직일 겁니다.”
유단은 고개를 끄덕인 후 외벽 밖으로 나왔다. 나와서 올려다 본 외벽은 안쪽에서 봤을 때보다 더 높아 보였다.
6년 전만 해도 외벽 대신 성벽이 있었다. 성벽이라고 해도 요새방어를 위한 높은 돌담은 아니었다. 그저 아웃라인과 경계를 짓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시선을 돌렸다. 숲을 향해 뻗은 길이 보였다. 포장된 길은 도중에서 끊겼다. 예전에는 아웃라인을 관통하던 대로였는데.
걸음을 뗐다. 곳곳에 보이는 균열을 피해 안쪽으로 이동했다. 숲 근처에도 안 갔는데, 심장이 날뛰었다.
둘 중 하나는 분명히 죽게 되리라. 아니, 둘 다 죽을 지도 모르지.
-미친 새끼. 당장 돌아가! 이런 식으로 끝내고 싶어?
몸의 주인이 아우성쳤다. ‘유단’이 뿜어내는 절망감이 몸 구석구석 퍼져나갔다.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걱정하지 마. 네가 살아남을 확률도 있으니까.”
-논리적으로 생각하라고!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이성의 힘으로 그 다리를 멈춰. 지랄 맞은 기계야, 이대로 가면 다 죽어!
“도시에 남아도 죽어. 너도 봤잖아? 그 인간사냥꾼의 눈을. 이미 날 의심하고 있어. 네 감정이 날 지배하는 한, 그 눈에서 벗어날 수 없어. 결국 모든 게 드러나고 난 끝나겠지.”
-죽지는 않아. 아니,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어! 군부의 끈으로 살아남으면 네가 원하는 걸 얻을지도 몰라.
유단은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를 움직이며 말했다.
“그렇게 살아남는다고 한들, 결국 이 몸은 네 차지가 되겠지. 몸이, 심상세계란 그릇이 본래 주인을 찾고 있으니까.”
-이 개새끼야! 그냥 내 안에서 기생해. 네가 원하는 바를 이뤄줄 테니까 얌전히 따르라고. 기계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 이제 그만 인정하고 내 말을 수행해.
몸이 순간 기우뚱거렸다. 보이지 않는 손이 발목을 붙잡는 느낌이었다.
유단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너한테 고마운 게 하나 있어. 네 덕분에 배웠거든. 감정은 열등한 게 아니야. 이성조차 감정 앞에서 맥을 못 출 때가 있어. 나는 인간의 감정을 이해했다 생각했지만, 아니었어.”
땅에 달라붙는 다리를 억지로 떼어내 앞으로 나아갔다.
“너를 통해 나는 감정의 위험성을 제대로 인식했어. 너로 인해 나는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간 거야.”
-빌어먹을 새끼가 뭐라는 거야.
“낮은 확률의 도박. 예전에 나였다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야. 보다 나은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궁리하는 게 내 바탕이니까. 하지만, 네 덕분에, 네 감정 덕분에 나는 이성을 뛰어넘게 됐어.”
유단은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같이 가자고. 개좆같은 지옥 밑바닥까지.”
* * *
-e4. 나이트.
카트시의 검은 나이트를 움직였다.
-어때요? 막혔죠?
“기다려봐.”
-체스의 왕이 와도 절 이길 순 없어요. 왜냐고요? 제가 바로 체스의 신이니까요!
오만한 기계의 음성에 밀레나는 눈을 찌푸려야 했다.
반격하고 싶었다.
네가 틀렸다고 한 방 먹이고 싶었다.
하지만 카트시의 말대로 방법이 없어 보였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한정된 자원으로 싸우는 게임이에요. 경우의 수는 유한하고, 그런 게임은 제게 무척이나 유리하죠.
“가하란하고 두면 누가 이겨?”
-아쉽게도 가하란과 체스를 둘 생각은 없어요.
“왜?”
-뻔하니까요. 무승부.
“……나도 무승부로 끝낼 수 있어.”
-아닐 걸요? 에베베베.
에베베베? 혓바닥도 없는데 이상한 의성어를 배워왔다. 아니, 대체 누가 가르친 거야?
고심하며 체스보드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카트시의 눈이 불쑥 시야 안쪽으로 들어왔다.
“뭐야? 방해하는 거야?”
-아니요. 지금 막 이해한 게 생겨서 그래요.
“이해해?”
-왜 제가 밀레나에게 친근함을 느꼈을까. 그게 항상 궁금했어요. 왜지? 가하란이 허락했다고 한들 전 한 걸음 물러서서 당신을 경계해야 마땅해요. 그런데 마음이 놓였어요. 이유가 궁금했는데…… 이제 알겠어요.
“내 선한 심성을 알아봤구나?”
-퉤.
침까지 뱉네.
밀레나는 픽 웃으면서 물었다.
“뭔데? 그 이유가.”
-닮았어요. 하나하나 비교하면 닮지 않았는데, 전체적인 인상이 무척이나 닮았어요. 나이를 좀 더 먹으면 더 비슷해지겠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