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04화 (277/558)

제304화

허공용로가 거세게 흔들렸다.

용로의 구조 결합을 돕고 있는 장치가 부서질 것처럼 진동했다. 푸르고 붉은, 가시화된 마나가 허공용로 주변에서 날뛰었다.

가하란은 넋을 놓고 변화하는 쇳물을 바라봤다.

거칠지만 정교한 기술이었다.

허공용로 안에서 바깥으로 튀는 쇳물이 한 방울도 없었다. 놀라운 집중력이었다.

마공장이 양손으로 원을 그렸다. 손에 끼고 있는 두꺼운 장갑에서 마나 파장이 흘러나왔다.

허공용로가 반응했다. 뒤채이던 쇳물이 가운데로 모였다. 응집한 쇳물이 주홍빛을 넘어 강렬한 흰빛을 뿜어냈다.

“내려!”

마공장이 외쳤다. 문하생으로 보이는 남자 셋이 결합 장치를 풀었다.

허공용로가 벌어졌다. 그와 동시에 마공장이 두 손으로 공중을 쓸었다.

쇳덩어리가 느리게 움직였다. 목적지는 검은 모래가 담긴 철제함이었다.

푸식, 모래 위에 안착한 쇠가 끓는 소리를 냈다. 검은 모래가 기름을 만난 물처럼 튀었다.

“안정화 작업입니다. 탈로스의 내구성을 결정짓는 작업이기도 하죠. 저흰 흑사토에 안정수를 배합해 사용 중입니다.”

“이런 건 직접 봐도 노하우를 훔칠 수 없겠네요.”

가하란의 말에 클랜 대표가 미소 지었다.

“어디까지나 장인의 감, 그리고 배합 비율이 중요한 거니까요. 그렇기에 공개하는 거고요.”

밝게 빛나던 쇠가 검은 모래 아래로 가라앉았다. 바글바글 끓던 모래도 점차 얌전해졌다.

“성형은 이다음에 진행하나요?”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받은 후 진행하긴 합니다만, 스탠다드 라인의 완성도가 워낙 좋다 보니 대부분 별도의 주문 없이 완성된 물품으로 받아 갑니다.”

마공장이 다가왔다. 얼굴 전체를 감싸던 보호구를 벗자 서른 초중반의 남자 얼굴이 드러났다.

“작은 선생님이 여길 찾아올 줄이야.”

“절 아시나요?”

“딸애 의수 때문에 몇 번 찾아갔습니다. 안경을 쓰면 기억하시려나.”

마공장이 주섬주섬 안경을 썼다. 안경을 쓰니 거친 인상이 사라지고 푸근한 얼굴이 됐다.

“라안 씨.”

이름이 바로 떠올랐다. 라안이 웃음 지은 후 말했다.

“거병 제작을 맡기러 왔다고요?”

“여러 곳을 알아보는 중이에요.”

“우리 대표는 돈을 밝히는 만큼 깐깐합니다. 밤나비에 맡기면 후회 없을 거예요.”

대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공정을 더 보고 싶은 거죠?”

“가능할까요?”

라안이 대표와 눈빛을 교환했다. 대표는 안내를 부탁한다며 제작소를 떠났다.

“이쪽으로 와요. 성형 중인 탈로스 한 체가 있으니.”

제작소 칸막이를 넘었다. 제작소의 드높은 지붕 아래로 여러 기술공이 쇠를 주무르고 있었다.

“의수 제작에도 그랑겔 툴이 쓰인다죠?”

“예.”

“그럼 익숙하겠네요.”

라안이 걸음을 멈췄다. 두꺼운 쇠정과 날렵한 망치를 든 노인 앞이었다.

“휼렌 큰형님. 좀 보겠습니다.”

“마음대로 해!”

시끌벅적한 소음을 뚫고 나오는 노인의 목소리였다. 어찌나 큰지 가하란이 움찔할 정도였다.

“목청이 좋으시죠?”

“하하, 네. 그렇네요.”

노인, 휼렌이 눈짓하자 사람들이 달라붙었다. 직경 1m정도 되는 원통형 쇠. 검붉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정과 망치가 움직였다. 투박해 보이지만 저건 그랑겔 툴이다. 더는 손댈 수 없는, 아름다운 마나회로가 삽입된 마법공학품.

망치가 정을 때리고, 뭉툭한 정 끝이 쇠를 훑었다. 순간 타격 지점에서 사방으로 기포가 일었다.

쇠로 된 얇은 막이 터지고 수축하며 조금씩 형태를 바꿔나갔다.

“그라운드 제로 이전에는 담금질을 끝낸 쇠를 건틀릿을 이용한 거대한 누름쇠로 형태를 다듬었죠.”

“예전에 본 적이 있어요.”

어릴 적 제철소에서 본 광경을 떠올렸다.

“지금은 많은 게 달라졌죠. 1차 가공까진 옛 방식을 따르지만, 그 뒤로는 전부 기술자가 직접 손을 대요.”

가시화된 마나가 불꽃처럼 튀어 올랐다. 닿으면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되지만, 기술공들은 여유롭게 작업을 이어갔다.

“모노클을 끼지 않아도 마나가 보일 정도네요.”

“마나가 워낙 풍부해졌으니까요. 다루기 버겁던 그랑겔 툴도 이제는 그 능력을 한계치까지 뽑아낼 수 있게 됐고. 덕분에 장인의 솜씨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됐어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드는 자의 취향과 개성이 작품에 녹아나니까요.”

투웅, 투웅, 투웅!

정으로 쇠를 치는데 묵직하면서도 맑은소리가 났다. 원통형 쇠가 익숙한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하부 모듈에 들어갈 부속품이네요.”

가하란이 말했다.

“역시 바로 알아보네요. 학회에서 연 포럼 때 저도 참석했어요. 저기서 발표하는 작은 선생님 모습도 봤고.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부끄럽네요. 모두가 아는 사실을 정리했을 뿐인데.”

“집약회로를 모두가 알진 않을 걸요?”

라안이 웃으면서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위아래로 바삐 움직이는 실린더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바닥에는 굵직한 관이 수십 개 깔려 있었는데, 그 안으로 붉은 액체가 오가고 있었다.

액상근육이다.

“과포화된 마나 덕분에 수용체 선택에도 자유도가 생겼죠. 탈로스나 외장갑은 제작방식이 바뀌었다고 한들 형태나 쓰임은 예전과 비슷하죠. 하지만 액상근육은 달라요.”

가하란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관을 오가는 붉은 액체를 가까이서 관찰했다.

어느 것은 느리게 흘렀고, 또 어느 것은 눈으로 따라잡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움직였다.

기포가 거세게 이는 액체, 불순물이 섞인 것처럼 탁한 액체, 섬유 다발처럼 꼬인 채 흐르는 액체.

“국가사업이었을 땐 액상근육만큼은 통일된 체계 아래 다뤄졌죠. 하지만 지금은 거병 제작자들마다 이 액상근육이 달라요.”

“‘액상근육이 거병의 완성도를 결정짓는다.’ 이런 얘기를 들은 적 있어요.”

“요즘 이 바닥을 관통하는 말이죠. 같은 모델이라고 해도 주입된 액상근육에 따라 성능 차이가 확연해요. 모듈 교체 시기마저 결정지을 정도죠.”

라안이 손을 들었다. 손바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제작소 벽면에 두 개의 쇠기둥이 설치돼 있었다.

나란히 선 기둥 사이에 거병 하부 모듈이 조립된 채 걸려 있었다.

“기동 시범 하는 것 같으니 한번 보시죠.”

청자켓을 입은 여자가 귀에 얹고 있던 펜으로 뭔가를 지시했다.

우측 관을 따라 새하얀 액체가 모듈로 주입됐다.

“173회. ‘골리앗의 피’ 피로도 실험 시작합니다.”

기둥 옆에 있는 사람이 외쳤다.

기둥에 연결된 하부 모듈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왼발, 그리고 오른발. 발의 교차 간격이 점점 더 짧아졌다.

“트레드밀 올려!”

허공을 차던 거병이 발아래 벨트가 깔렸다.

쿵! 쿵! 쿵!

벨트를 박차며 거병이 뛰기 시작했다.

가하란은 무릎 연결부를 지켜봤다. 정교하게 맞물린 부품 사이로 새하얀 액상근육이 오가는 게 보였다.

“여기.”

라안이 모노클을 건네주었다. 안 그래도 부탁하려던 참이었다.

모노클을 얹고 움직이는 하부 모듈을 바라봤다. 액상근육이 지나가는 자리를 따라 정제된 마나 고리가 생성되고 있었다.

마나 파장을 붙들어 주변 마법공학품에 힘을 전달하는 방식.

고리의 형태가 고르고 색상 역시 일정했다. 기초가 튼튼한 액상근육이다.

“5분 경과!”

액상근육이 한순간 붉은빛을 냈다. 일정 범위 내에서 맴돌던 고리가 파장의 형태로 변하더니 대기 중으로 녹아들었다.

에너지 손실이다.

왼쪽과 오른쪽. 두 곳에서 손실이 발생하고 있었다. 대기 중으로 분사하는 마나가 위험수위에 도달했을 때였다.

“그만!”

트레드밀이 아래로 내려갔다. 거세게 움직이던 거병의 두 다리도 점차 느려졌다.

붕괴조짐이 보이던 마나 고리도 안정을 되찾았다.

“열 식히고 손실률 기록해.”

펜을 손에 쥔 여자가 말했다. 뒷모습이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

마침 지휘하던 여자가 몸을 돌렸다. 얼굴을 확인하자 반가움의 미소가 슬며시 나왔다.

“벨솔 교수님.”

“오, 이게 누구야.”

성큼성큼 다가온 벨솔이 가하란 어깨에 팔을 둘렀다.

“여기서 뵙게 되네요.”

“그러게. 한 1년 만인가?”

“그쯤 된 거 같아요.”

“장례식 때 얼굴 볼 줄 알았는데, 엇갈렸나 봐.”

가하란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밤나비 클랜에 계신 줄 몰랐어요.”

“학회 산하에 있다가 작년에 나왔어. 연구비 조성이 어렵다고 하니 나오는 수밖에.”

라안이 옆에 서며 말했다.

“아는 사이인 줄 몰랐네요.”

벨솔이 자켓 단추를 풀며 대답했다.

“어릴 때 종종 봤거든. 호기심이 보통이 아닌 애라 같이 노는 재미가 있었어.”

기록판을 든 남자가 다가왔다. 벨솔이 잠깐, 이라며 자리를 비켰다.

“모시기 어려운 분이셨을 텐데.”

가하란이 작게 말했다.

“대표가 노력했죠. 이 공정 설비도 수석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만든 거고요.”

그라운드 제로 이전부터 액상근육의 권위자로 불리던 벨솔이다. 그녀가 학회에서 나왔을 때 온갖 곳에서 눈독을 들였을 것이다.

“너도 루드에서 나와 이쪽으로 오려고?”

업무가 끝났는지, 벨솔이 다시 다가왔다.

“아니요. 제작 업체를 알아보는 중이에요.”

“거병?”

“네.”

“수집품은 아닐 테고, 도시를 벗어나려고?”

“언젠가는요. 시기를 앞당겨 보려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있어요.”

“밤나비 스탠다드 라인이 좋긴 해. 물론 객관적인 시선에서.”

“공정을 살펴보니까 제 마음에 밤나비 쪽으로 기우네요. 게다가 교수님도 계시고.”

벨솔이 펜을 쥔 손을 격하게 흔들었다.

“교수는 무슨. 여기선 수석연구원이야.”

벨솔이 드럼통을 옮기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그거 B4 라인에 옮겨놔! 오후에 쓸 거니까.”

무척이나 바빠 보인다.

“그나저나 얼굴 좋아 보이네. 마음 정리가 끝난 모양이야?”

“어느 정도는요.”

“그래. 웃고 다녀. 넌 그게 어울려. 내가 할 일이 있어서 더는 못 놀아주겠다. 나중에 시간 내서 와. 연구 성과를 제대로 보여줄 테니.”

살펴 가라며 등을 거세게 치는 벨솔이었다. 등이 쓰라리다. 손이 매운 건 여전했다.

작게 웃던 라안이 다음 장소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이 외장갑을 조형하는 설비에요. 구동계 시뮬레이션 설비도 옆에 갖춰져 있죠.”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뗐다.

* * *

“다른 곳도 알아보고 오세요. 저흰 자신 있으니까.”

대표의 배웅을 받으며 제작소를 벗어났다. 사회적 지위가 왜 중요한지, 이런 상황을 겪다보면 깨닫게 된다.

루드 팩토리란 명함이 없다면 설비 견학 같은 건 꿈도 못 꾸리라.

“밤나비.”

마공장 라안의 솜씨를 보는 순간 결정을 내렸다. 게다가 벨솔 교수도 있었다. 원하는 기체를 만드는데 이보다 좋은 선택지는 없으리라.

생각을 정리하며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르완 용병단이 머무는 여관.

“밀레나 보러 온 거야?”

여관 문을 열자마자 엘리와 마주쳤다. 양손은 물론 겨드랑이에도 술병을 끼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보지 마. 내가 다 마실 건 아니니까. 지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냥 조금…….”

주절주절 떠들던 엘리가 씩 웃었다.

“아무튼 밀레나라면 지금 여관에 없는데.”

“오늘은 민 교수님 뵈러 왔어요. 물론 엘리 씨도.”

“씨는 좀 그렇다. 누나라고 해.”

엘리가 계단을 가리켰다.

“민이라면 위에 있어. 가자.”

엘리를 따라서 2층으로 올라섰다. 복도 끝 방을 여니 무언가 기록 중인 민 교수가 있었다.

“밀레나라면 여기 없는데.”

가하란의 얼굴을 보자마자 민 교수가 한 말이었다.

“……제가 항상 누나를 찾았었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대충 그런 느낌? 근데 말하는 걸 보니 날 보러 온 거네. 무슨 일이야?”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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