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3화
소변을 보던 네스는 인기척에 바지를 올렸다. 사냥꾼인가? 작전 지역 내로 들어간 민간인은 없을 텐데.
경계하며 앞을 살필 때였다.
“살려……주세요.”
피 칠갑을 한 남자가 숲길에서 빠져나왔다. 네스는 젊은 남자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학회에서 나온 마법사. 한쪽 손목이 잘려 있었다.
네스의 시선은 마법사가 둘러멘 군인 쪽으로 향했다.
“루곤?”
이름과 동시에 욕지거리가 나왔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 * *
“전멸에 가깝다라.”
디온은 루카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예상한 바였다. 쉽게 갈 수 없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비보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생존자는?”
“4명의 생존자 중 둘은 의식불명입니다.”
“의식불명. 외상으로 인한 혼수상태인가?”
“좀 더 알아봐야겠으나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마수의 힘이겠군. 일단 보러가지.”
루카와 함께 군병원 지하로 향했다. 학회에서 나온 탄드라 교수도 도착한 상태였다.
“어떻습니까?”
탄드라 교수에게 물었다.
“의술사의 소견으로는 외상이 없다고 하네요. 그래서 저희가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어요.”
디온은 나란히 누워 있는 병사들을 바라봤다. 루곤, 프레린. 유능한 군인이었다. 과거 마수전담팀에 배정될 정도로.
“시간이 걸리겠군요.”
“네. 심상세계를 엿보는 거니까요.”
디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불명인 두 병사를 확인했으니, 이제 남은 둘을 살펴볼 차례였다.
흥미롭게도 생환한 두 사람 모두 마법사였다. 손목이 잘리고 귀가 날아갔지만, 살아서 돌아온 것이다.
“흥분 상태라 진정시키고 있어요.”
탄드라 교수가 유리창 너머를 보며 말했다. 손목이 잘린 젊은 마법사가 맞은편 벽을 보며 멍하니 있었다.
“들어가 보죠.”
디온이 문을 열었다. 안쪽에 있는 마법사가 발작하듯 놀라며 의자에서 떨어졌다.
첫 전투에 참가한 마법사라 들었다. 충격이 컸겠지. 이해는 하지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미그벨. 자네 이름이 맞나?”
나자빠진 채 굳어 있는 젊은 마법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잔뜩 굳어 있던 마법사가 천천히 손을 잡았다.
“힘든 거 아네. 머릿속에 잔상이 계속 남아 있겠지. 그 손도 아플 테고. 하지만 말일세, 지금 우린 정보가 필요해. 자네 입을 통해 나올 말이 다른 희생자들을 구할 열쇠가 될 거야.”
물을 따라 미그벨에게 쥐여주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입이 열렸다. 디온은 의자에 앉아 미그벨을 바라봤다.
“천천히 말해도 좋으니 상세하게 당시 상황을 설명해보게.”
의무감을 자극했으니 젊은 마법사는 집중해서 말할 것이다.
미그벨이 떨리는 목소리를 꺼냈다. 작전 투입 후 마수와 만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세밀하게 설명해 주었다.
“언제 어떻게 손이 잘렸는지 모르겠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잘려져 있었어요.”
“그렇군.”
“통증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루곤 씨가 제 앞을 막았어요. 그리고 말했죠. 대화가 하고 싶다고.”
“마수는 어떻게 반응했지?”
“대화를 하자고 했어요. 하지만 그 뒤에…… 루곤 씨가 쓰러졌어요.”
“쓰러져? 공격당한 건가?”
미그벨이 눈을 찌푸렸다.
“그게 공격인지,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 마수의 몸체라 생각되는 검은 색 촉수가 루곤 씨 목 뒤에 붙었다가 떨어졌어요. 그게 전부였어요.”
“붙었다가 떨어져? 가격한 게 아니라?”
“네. 정말 손가락을 살짝 대듯, 가볍게 붙었다가 떨어졌어요. 근데 루곤 씨가…….”
신경독을 주입한 건가?
아니면 경추를 자극해 무언가를 일으킨 건가?
“루곤 씨는…….”
“회복 중이네.”
“괜찮은 건가요?”
“희망적인 말을 할 수는 없겠군.”
상황은 파악했다. 외상이 없는 게 당연했다. 마수는 특수한 방법으로 유능한 병사를 무력화시켰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왜 죽이지 않은 걸까?
생존한 다른 마법사의 말에 따르면, 마수는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해 모든 군인을 죽였다고 한다.
돼지를 도축하듯 반으로 갈라서.
디온은 밖으로 나와 탄드라와 마주했다.
“마수가 대화를 원했다는 건 거짓이 아니겠죠.”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서쪽의 불청객은 지성을 지녔다. 이번에도 모든 인간을 사살할 수 있었는데, 대화란 말을 꺼내며 살려뒀다.
“교수님!”
두 병사가 누워 있는 병실에서 누군가 애타게 탄드라를 찾았다. 탄드라가 먼저 움직였고, 디온도 그 뒤를 따라갔다.
루곤을 살피던 마법사가 병상 옆에 주저앉아 있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없습니다.”
마법사가 말했다.
“없다니요?”
탄드라가 곁으로 다가섰다.
“심상세계를 살피는 건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타인의 껍질 안쪽을 들여다보는 것은 들여다보는 자 또한 노출됨을 의미하죠. 일반적이라면 심상세계를 건드리는 건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또 시간을 들여…….”
횡설수설하는 마법사였다. 과정 설명을 듣고 싶은 건 아니었다. 중요한 결과니까.
디온이 말을 꺼내기 직전, 탄드라가 주저앉은 마법사의 어깨를 붙잡았다.
“결론부터 말해요. 나는 마법적 소양이 뛰어나지 않으니 불필요한 설명은 제거하고.”
“……쉽게 말하자면 집에 주인이 없습니다.”
“주인이 없다?”
“예. 심상세계가 망가져도 그 안에 주인이 있어야 합니다. 다친 상태든, 잠든 상태든 껍질 안에 세계의 주인이 있어야 해요. 하지만 저 군인 몸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텅 비었어요. 그저 숨만 쉬는 고깃덩이입니다.”
말을 끝낸 마법사가 날붙이에 찔린 것처럼 움찔하더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라며 난처한 얼굴을 했다.
고깃덩이란 적나라한 표현을 사과하는 것 같았다.
디온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틀린 말도 아닐 테니. 그보다는 마법사가 발견한 사실에 집중했다.
군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별별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하지만 심상세계가 텅 비었다는 말은 칠십 평생 처음 듣는 말이었다.
영혼과는 다른 자아나 이성, 존재를 증명케 하는 것들의 총체.
심상세계는 한 인간의 모든 것이었다. 어그러지고, 망가지고, 깨질지언정 그게 사라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껍데기란 건가.”
디온은 누워 있는 병사의 손을 잡았다. 온기가 남아 있다. 근육 반응도 있다. 하지만 이 몸의 주인은 이곳에 없다.
“이쪽 군인도 똑같은 상태입니다. 비어 있어요.”
두 병사의 자아는 어디로 간 건가?
디온은 미그벨의 말을 상기하며 탄드라에게 턱짓했다.
밖으로 나왔다. 주변에 있던 부관들을 물리고 탄드라와 조용히 대면했다.
“마수가 병사들에게 접촉했을 때 뭔가 일어난 거군요.”
“단편적인 정보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자아가 뽑혀 나간 것 같아요.”
탄드라가 탁한 신음과 함께 말했다.
디온은 멀리 있는 부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자리에 있다 보면 듣기 싫어도 들리는 얘기들이 있죠. ‘케아’를 기억합니까?”
“성도에 있는 싱크탱크라면…… 네, 기억하죠. 가장 비밀스러운 연구소.”
“그곳에서 인간을 정신체로 만드는 실험이 있었습니다. 뭐, 케아뿐만 아니라 다른 싱크탱크에서도 진행됐겠죠. 만약 성공해서 인간의 자아를 뽑아낸다면, 지금 쓰러져 있는 제 병사들처럼 안이 비어 있겠죠?”
“이론적으로는요. 하지만 성공사례는 없는 걸로 알아요.”
“……서쪽의 불청객은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위험하군요. 인격만 사라진 거라면 별 문제없지만, 심상세계가 뜯어져 나간 거라면 그 인간의 모든 정보가 들어 있으니까요.”
학습하는 마수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의 모든 걸 파악한 괴이한 생물체가 무슨 짓을 할 것인가.
“동부 토벌 건은 중지해야겠군요. 총력을 서쪽에 투입해야 합니다.”
의견을 구하고자 말한 건 아니었다. 이건 통보였다. 학회도 협조하라는 가벼운 압박이기도 했다.
“조만간 회의를 소집하죠.”
“네.”
복잡한 표정을 짓던 탄드라가 비틀거리며 복도를 빠져나갔다.
“껍데기라.”
디온은 손수건을 꺼내 입을 가리고 기침했다. 그라운드 제로의 마나폭발도 이겨낸 몸이지만, 역시 시간 앞에서 장사는 없었다.
늙어가고 있고, 죽어가고 있다.
몸은 착실하게 무덤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빈껍데기.
디온은 그 단어가 이상하게 끌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고깃덩이’가 된 병사 앞에 있었다.
“루곤, 자네는 참 유능했지.”
이제는 대답할 수 없게 된 부하.
건장한 육신. 노화란 끔찍한 저주에서 아직은 자유로운 몸뚱이.
디온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뽑아내서…… 이식한다?”
디온은 주름진 자신의 손과 루곤의 손을 번갈아 보다가 문득 유리창에 시선을 던졌다.
미소를 짓는 자신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 * *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보고 말았어. 그래, 이건 현실인 거야.”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술잔에 손을 뻗는 탄드라였다. 유단은 말없이 잔에 술을 채웠다.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몬스터를 점차 늘어날 거야. 우리 그것들을 대비할 수 있을까?”
“교수님이라면 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히죽 웃는 탄드라였다. 나이 차이 나는 술친구는 오늘도 비틀대다가 푹 쓰러졌다.
육체적 관계를 요구해 올 거라 생각했지만, 지난 몇 년간 탄드라는 욕구를 내비치지 않았다.
정말로 술친구가 필요했던 것이리라.
“고맙습니다, 교수님.”
유단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법이,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방법이 생겨났다. 터무니없이 위험 하나 현 상태를 방치는 것보다야 나았다.
정신체 이론이야 이미 실험을 통해 증명했다. 뽑아내서 이식하는 건 가능하다.
물론 문제도 남아 있었다.
한 몸뚱이 안에 있는 두 개의 의식.
마수가 거두어가는 건 어느 쪽일까?
만약 유단이 아닌 로키의 의식을 뽑아간다면…….
“끝.”
극단적인 방법이었으나 괜찮았다. 이미 절벽에 몰린 상태였다. 심상세계의 본래 주인은 점점 의식을 침범하고 있었고,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유렐이 이빨을 들이밀며 추적하고 있었다.
감정에 휘둘리는 상태에서 벗어나 온전했던 기계의 의식을 되찾지 못한다면, 곧 죽게 될 것이다.
“서쪽의 마수.”
유단은 술을 마셨다.
대화 상대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던져주지.
* * *
“탈로스 제조 방식도 다양해졌어요. 틀을 사용해 정형화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기본 구조부터 손을 대는 것도 좋죠.”
가하란은 클랜 대표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서 붉게 달아오른 쇳물이 춤을 췄다. ‘허공용로’ 안쪽에서 원을 그리며 정제되던 쇳물이 마공장의 손짓에 따라 바깥으로 뽑아져 나왔다.
“가까이서 봐도 될까요?”
“네. 대신 이 안경을 써요. 눈이 시리니까.”
보안경을 쓰고 마공장 옆으로 걸어갔다. 열기가 대단했다. 춤추는 쇳물이 섬세한 손길에 따라 형태를 바꿔나갔다.
“인간의 손만큼 완벽한 도구도 없죠. 과거에는 그랑겔 툴을 기반으로 한 제작 기구가 있어야 했는데, 지금은 마공장들의 손만 있으면 어느 정도 해결돼요.”
젊은 남자가 다가와 마공장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문하생인 것 같다.
“뒤쪽으로 오시죠. 좀 위험하니까.”
대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개울물처럼 얌전히 흐르던 쇳물이 사납게 날뛰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