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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302화 (275/558)

제302화

여름 햇빛이 따갑다.

루곤은 시야를 가리는 커다란 잎을 꺾었다. 예전에는 이런 식물이 없었던 거 같은데.

10m 간격을 두고 이동 중인 2팀을 바라봤다. 별문제는 없어 보인다.

질척이는 땅을 밟으며 전진할 때였다. 윽,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발을 헛디뎠는지 마법사가 나자빠져 있었다.

“괜찮아?”

루곤은 손을 내밀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작전구역이라고는 하나 랍파에게서 소식이 없었다. 안전한 상황이니 소음이 난다고 해도 문제도 큰일은 아니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지?”

“네.”

긴장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마법사였다. 마수 처리는 베테랑 군인만 참가하는 위험한 작전일 텐데, 어쩌다 세상이 이리 변했을까.

“긴장 풀라고 말 붙이는 거야. 바짝 언 채로 마수와 만나면 손도 못 쓰고 당할 테니까. 여유를 가져야 그 손으로 한 방 먹이지.”

젊은 마법사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그걸 나한테 물으면 쓰나. 윗분들은 널 믿고 여길 보냈을 텐데.”

“연습에서는 잘했어요. 하지만…… 연습은 이런 환경이 아니었죠.”

마법사는 팔뚝에 붙은 벌레를 쳐내며 말했다.

“처음이 언제나 버겁지. 전투든 연애든 사업이든. 말 나온 김에 사귀는 애 있어? 아니면 결혼했나? 요즘은 일찍들 하더라. 늙은이들이 다 나자빠져서 그런지.”

얼빠진 표정을 짓던 마법사가 배시시 웃었다.

“청혼한 애는 있어요.”

“오, 그래? 곧 결혼하겠네.”

“이번 일 잘 마치면요.”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일찍 하는 게 좋긴 해. 나이가 몇이지?”

“저요? 열일곱이요.”

“좋을 때네.”

루곤은 마법사의 표정을 살폈다. 긴장해서 갈피를 못잡던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았다.

“긴장 좀 풀린 거 같아?”

“예, 덕분에요.”

“순서가 바뀌긴 했지만, 이름이 어떻게 돼? 난 루곤. 널 위한 고기방패지.”

“……어감이 안 좋네요. 고기방패라니.”

“조크야, 조크.”

마법사가 긴장이 풀린 웃음을 지었다.

“미그벨. 제 이름이에요.”

이름을 기억하며 마법사의 얼굴을 봤다. 전쟁, 전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얼굴이다.

특유의 독기도, 집념도 없는…… 그야말로 백지나 다름없는 상태.

마수라는 위험한 적을 상대하기에는 부적합해 보인다. 과거였다면 상관에게 머리를 들이받았을 것이다. 인원 배치를 개똥으로 했다고.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미그벨은 흔히 말하는 ‘신인류’였다.

그라운드 제로 이후 과포화된 마나에 완벽히 적응한 자.

“마법은 어떻게 써?”

“마법이요?”

“혹시 물으면 안 되는 거야? 학회에서 관리하는 마법사는 사실 처음 보거든. 말하기 껄끄러운 거라면 말하지 않아도 돼.”

마법사, 미그벨이 고개를 저었다.

“숨길 건 없어요. 보면 바로 알 수 있기도 하고.”

“보면 바로 알아?”

미그벨이 자그마한 책을 꺼냈다. 제본할 때 고생깨나 했겠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작은 책이었다.

“이게 제 매개체이자 루틴이에요.”

“매개체? 루틴?”

주변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마법에 대해 어느 정도 아세요?”

“예전에, 그러니까 그라운드 제로 이전에 마법사들과 몇 번 작전을 나간 적이 있어. 그들은 디데이에 가까워질수록 신경질적으로 변했지. 스크롤을 준비하느라 바빴거든.”

“네, 스크롤. 맞아요. 과거의 방식이죠. 저도 처음 마법을 배울 때는 그렇게 배웠고요.”

“마법사들이 열심히 준비한 스크롤은 다양했어. 양피지, 나무껍질, 거북 등껍질. 그러한 스크롤을 찢거나 접거나 혹은 태워서 마법을 실현했지.”

루곤은 직접 본 마법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마법은 실망스러웠어. 마법공학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게 대부분이었으니까. 물론 엄청난 마법도 있었어. 반경 2km 내에 폭우를 불러온 경이로운 마법이었지. 준비 기간은 상당했지만.”

“대규모 마법은 지금도 놀라운 경지에요.”

주억이던 미그벨이 말을 받았다.

“여전히 스크롤은 사용해요. 예전 방식이 익숙한 사람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불편하죠. 특히 저희처럼 적응한 사람들한테는.”

“그래서 새로 고안된 게 매개체와 루틴이다?”

“네. 매개체는 스크롤과 비슷한 역할을 해요. 마나를 감응하기 쉽게 만들죠. 하지만 이전 스크롤처럼 형태를 파괴할 필요는 없어요. 자신에게 어울리는, 혹은 사용하기 편한 형태로 제작하면 끝이에요.”

“그거 좋네. 이제는 스크롤을 준비하느라 쩔쩔맬 필요가 없는 거잖아?”

“맞아요. 물론 규모가 큰 마법을 준비하려면 아직 스크롤의 도움이 필요해요. 한 명이 한 번에 가용할 수 있는 마나 양은 한계가 명확하니까요.”

“매개는 이해했고, 루틴은?”

“마법을 보다 쉽게 사용하기 위한 방법이에요. 필요한 마법을 필요한 순간에 꺼내기 위해 일련의 과정을 형식화해 두는 거죠.”

미그벨이 책을 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저 같은 경우는 이런 식으로 가슴 높이에서 책을 직선으로 뻗고, 연습해둔 말을 내뱉어요. 저희는 이걸 주문이라 불러요.”

“그 주문이란 걸 알면, 나도 마법을 쓸 수 있는 건가?”

호기심이 생겨 되물어봤다. 미그벨이 연한 미소를 지었다.

“주문이라 거창하게 말했지만 대단한 건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마법 발현을 돕기 위해, 심상세계를 일깨우는 과정을 간략화하기 위해 정해둔 키워드니까요. 제 동기 중 하나는 주문이 딸기에요.”

“일반인이 알아봤자 별 도움은 안 되겠네. 근데 주문이 딸기면…… 마법을 쓸 때마다 ‘딸기’를 외치는 건가?”

“소리를 직접 내면 집중하기가 편하잖아요? 그래서 말할 때도 있고, 제어가 잘 되는 환경이면 입을 다물기도 해요. 루틴은 어디까지나 발현을 돕기 위한 과정이니까요.”

재미난 마법이라고 생각하며 질문을 더 하려고 할 때였다.

산돼지 가족이 앞을 지나갔다.

루곤은 발소리를 신나게 내며 숲길로 사라지는 돼지들을 바라봤다.

분명 시선이 마주쳤다. 산짐승은 인간을 경계하기 마련이다. 아니, 인간뿐만 아니라 자기보다 덩치 큰 생물을 발견하면 경계하는 게 본능이었다.

게다가 새끼와 함께 움직이는 상황이라면 더욱 조심해야 할 텐데…….

산돼지는 태연하게 네 발을 움직여 사라졌다. 더없이 평화로운 광경이지만, 그 아늑함이 경각심을 울렸다.

루곤은 고개를 들었다.

산비둘기 소리가 났다. 짧게 두 번, 길게 한 번. 랍파가 보내는 신호였다.

“미그벨. 이제 넘어지지 마. 놈이 가까이 있으니까.”

서쪽의 불청객.

작전 개요를 들었을 때 루곤은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었다.

지성이 있는 마수.

중앙군부 시절, 마수전담팀으로 활동했을 당시 인간을 농락하는 마수를 수없이 만나왔다.

지능을 갖추고 전략을 세우며 군대와 맞서는 놈들.

하지만 ‘서쪽의 불청객’은 지능이 아닌 지성이라고 했다.

공격해 오지도 않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며 공생을 요구해온 기이한 괴물.

1팀에게 내려진 임무는 마수의 지적 능력을 파악해 보는 것과 그 외의 능력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물론 가능하다면 토벌하는 것도.

어디선가 날아온 작은 새가 미그벨 어깨에 앉았다. 미그벨은 신기해하면서 부리를 건드렸다.

위화감이 다시금 들이닥쳤다.

또 다른 새가 날아와 루곤의 머리 위에 앉았다. 작은 토끼가 튀어나와 발치 앞을 지나가고, 새끼 노루가 총총걸음을 떼며 토끼 뒤를 따라갔다.

나무를 타고 뛰어오르던 다람쥐들이 루곤의 머리를 다리 삼아 옆 나무로 건너갔다.

작고 연약한 생물들이, 숲에서 마주치면 소리조차 내지 않고 숨어버리는 생물들이 대놓고 주변에 맴돌았다.

“얘네들 겁이 없네요.”

미그벨이 작게 말했다.

겁이 없다.

루곤은 마른침을 삼켰다. 대상은 들개무리를 순식간에 포섭했다고 들었다. 설마 이것들도?

경계하며 한 걸음 뗄 때였다.

눈앞으로 스멀스멀 기어오는 게 보였다. 처음에는 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내 뱀이 아닌 다른 무엇임을 깨달았다.

뱀이라면 꼿꼿이 세운 몸뚱이에 입이 달려있진 않을 테니까.

“나는 이곳에 있을 뿐이다.”

말했다. 어눌하지 않은 공통어로 분명한 의사를 전달해왔다.

루곤은 즉시 반응했다. 거리를 두고 미그벨을 보호했다.

“정말로 말을 하는군.”

놀라움과 그 놀라움을 상회하는 위험을 느꼈다. 이 앞에 있는 놈을 조심하라고, 직감이 난리를 쳤다.

“나는 대화가 효율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작은 친구들은 다치는 걸 싫어하고, 나 역시 그렇다. 하지만, 너희는 말보다는 다른 방법을 택한 것 같군.”

조금 떨어진 곳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2팀이 있는 방향이다. 떨어져서 재진입, 엄호를 해야 할 부대에서 먼저 전투가 벌어진 건가?

“호전적인 성향.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다 다른 생각을 품고 있어. 너희는 쓸데없이 복잡하고 위험한 개체다.”

또다시 날카로운 소음이 터져 나왔다. 저 반대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나는 저들에게도 대화를 권했다. 하지만 묵살 당했다. 너 역시 그러한가?”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다른 팀원들의 기척이 사라졌다.

남아있는 건 전투에 처음 투입된 마법사와 나 뿐인가.

언제?

대체 언제?

“루곤 씨.”

미그벨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손에 쥔 책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마법을 위한 루틴.

공포에 휘둘리는 눈이었다.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하는 상태였다.

마법이란 편리하고도 놀라운 수단에 기대 이 상황을 해결해 보려는 건가?

루곤은 입을 열려고 했다.

그만두라고. 베테랑 군인들이 소리조차 못 내고 사라졌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이 젊은 마법사는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니, 팀원이 사라졌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겠지.

“발산…….”

미그벨의 입이 떨어지고 짧막한 단어가 나오는 순간이었다.

잘렸다.

책을 쥔 미그벨의 손이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기이할 정도로 매끄러운 단면이 루곤의 망막을 헤집었다.

“아아악!”

절단된 손목을 움켜쥐며 미그벨이 쓰러졌다. 루곤은 미그벨 앞을 막았다.

무엇이 공격해온 건지, 어디서 공격해온 건지 보지도 못했다.

결과는 정해진 것이다.

살아나갈 수 없다.

“미그벨, 이걸 상처에 발라.”

“으으…… 으으.”

“정신 차리고 어서!”

알고 있다. 극단적인 육체의 고통을 처음 맛봤겠지. 머리가 하얗게 변했을 것이다. 그저 상처에 몰두해 아무것도 생각 못 하겠지.

그럼에도 움직여야 한다.

연이어 다그치자 미그벨이 울먹이며 연고가 담긴 통에 손을 뻗었다.

“난 공격할 의사가 없다.”

루곤은 마수를 보며 말했다. 가능하다면 토벌하란 명령을 받았지만, 이건 가능의 영역을 벗어나 버렸다.

살아남아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

“공생을 원한다고 들었다. 우릴 돌려보내 줄 수 있나?”

“너는 대화를 바라는군.”

“그래, 대화를 원한다.”

“그렇다면 초대하겠다. 나도, 너희를 좀 더 알아보고 싶으니까.”

초대?

의문을 품을 때였다. 머리 뒤쪽이 따끔했다. 동시에 어둠이 찾아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혼란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였다.

몸을 휘감는 불쾌한 감각.

루곤은 몸에 달라붙는 이상한 촉감을 떨쳐내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이내 눈을 떴다.

“일단 들어보겠다. 네가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면.”

수많은 눈이 주변에 있었다.

숲이 아니었다.

여긴 어디지?

눈들과 마주하는 순간, 루곤은 머리가 멍해지는 걸 느꼈다.

멍해지고, 희미해지고, 그렇게…… 그렇게…….

루곤은 자신의 몸이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아무래도 좋았으니까.

“대화는 못 하겠군.”

마지막 목소리와 함께 보인 건, 즐겁게 뛰어가는 산돼지 가족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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