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1화
좀먹히고 있다.
정신이, 육체가 조금씩 갉아 먹혀 사라지고 있다.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유단은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수년간 이 육체를 다뤄왔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몸뚱이가, 오늘따라 낯설게 보였다.
떨리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두피가 뜨거웠다. 스며 나온 땀이 끓는 물 같았다.
기계로 된 몸을 버리고 인간의 껍데기를 입은 순간 정신적 문제는 예견돼 있었다.
하지만 제어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오래전 인간을 정신체로 만들었을 때 충분한 데이터를 쌓아놨고, 빈껍데기가 된 몸을 강탈하는 건 쉬운 일이라고 여겼으니까.
“해결해야 해.”
몸의 본래 주인, ‘유단’의 정신이 날뛰고 있었다. 무의식 말단에서 꿈틀대야 할 놈이 거침없이 부상해 말까지 걸어왔다.
공생하는 거라면 차라리 나았다. 문제는 의식이 섞이고 있다는 점이다.
프레나를 살려둔 것도, 감정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도, 덴스 앞에서 겁을 먹은 것도.
유단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인간의 형태를 취했기에 발생한 결과라고 여겼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몸의 주인이 권리 행사에 나선 것이다.
유단은 벽에 손을 대며 일어섰다.
더 늦기 전에 몸 안에 기생 중인 정신체를 제거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설비는 물론 제반 지식마저 사라졌다. 기계 몸 안에 잠들어 있을 방대한 정보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아니, 설령 모든 게 갖춰져 있다고 한들 제거 작업은 순탄치 않으리라.
실험 환경이 바뀌었으니까.
하나의 몸뚱이에 두 개의 정신.
엉키기 시작한 정신을 분단해 말끔히 제거해야 하는데, 정신의 경계는 무엇으로 구분 짓는단 말인가?
-더 노력해봐. 그래야 내가 돌아갔을 때 누릴 게 많아지잖아?
모기의 날갯짓처럼 듣기 싫은 소리가 귀에서 맴돌았다. 유단은 주먹 쥔 왼손으로 벽을 쳤다.
통증과 함께 목소리의 잔향이 사라졌다.
“마법공학으로는 안 돼.”
로키가 아닌 유단의 심상세계를 완벽하게 지워내야 했다. 마법공학으로는 손댈 수 없는 영역이었다.
마법, 혹은 주술. 그 외의 도식화 할 수 없는 신비로운 힘이 필요한 때였다.
유단은 서재에 들어갔다. 심상세계와 영혼, 자아를 다루는 서적을 찾아내 쉼 없이 읽었다.
“오빠?”
서재 문이 열리며 프레나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유단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설마 여기서 밤샌 거야?”
안으로 들어온 프레나가 커튼을 젖혔다. 지겨운 햇살이 창틀을 훌쩍 넘어 들어왔다.
“무슨 일 있어?”
프레나가 걱정스럽게 묻자, 유단은 널브러진 책을 바라봤다.
“좀 찾을 게 있어서.”
“내가 도와줄까?”
“아니야. 여기 없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혹시나 해서 찾아본 거니까.”
두통이 밀려들었다. 이를 악문 채 책을 정리했다. 쭈뼛쭈뼛 곁으로 다가온 프레나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아무 일 없어. 그러니 걱정하지 마.”
“정말이야?”
“어.”
반복되는 질문에 짜증이 훅 치고 올라왔다. 왼손에 쥐고 있던 책으로 주둥이를 후려치고 싶을 만큼.
……후려쳐?
유단은 인상을 찌푸렸다. 프레나를 때리는 건 감정적인 처사였다. 보살펴야 할 이유가 있는 아이고, 건드려서도 안 될 아이였다.
감정이, 불필요한 감정이 견고해야 할 이성을 무너트리고 있었다.
“좀 자야겠어.”
책을 놓으며 프레나 옆을 지나쳤다. 그때 유단은 보고 말았다. 잔뜩 경계하며 뒤로 반걸음 물러서는 프레나를.
“유단 오빠…… 맞지?”
많은 걸 깨닫게 해주는 말이었다.
절대적인 아군으로 남아 있어야 할 프레나가 거리를 두었다. 신뢰에 금이 생긴 것이다.
미움 받아서는 안 될 인간에게, 그토록 공을 들여온 인간에게 의심받고 있었다.
위험하다.
말도 안 되게 위험한 상황까지 몰린 것이다.
유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닌 거 같아?”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미안해. 사실 고민거리가 생겼어. 하지만 내가 결정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라 말할 수가 없었어.”
프레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한테 말할 수 없는 문제는 누구나 갖고 있는 법이니까.”
“티를 안 내려고 했는데 내가 평소와 많이 달랐나 보네. 나도 모르게 신경질을 냈었지?”
“아니야, 그런 건 진짜 아니야. 난 그저 오빠가 걱정돼서…….”
반보 물러났던 프레나가 다시 앞으로 다가왔다. 몸은 말보다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가까워진 거리만큼 의심도 사그라졌을 것이다.
“금방 해결할게. 믿고 기다려 줄 수 있겠어?”
“응. 난 오빠를 믿어.”
유단은 손을 뻗었다. 평소처럼 연하게 웃는 프레나였다. 프레나의 어깨를 살며시 쓰다듬고 뒤로 돌아섰다.
표정이 붕괴할 조짐을 보였다. 얼른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미소를 유지하는 것도 힘들 지경이다.
“정리해야 할 게 남았어. 점심은 혼자 먹어야 할 거 같은데.”
“알겠어. 나도 약속 있어서 나가야 하니까.”
“그래.”
유단은 도망치듯 지하실로 내려와 문을 잠갔다.
“빌어먹을!”
기분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통제되지 않는 감정은 이리도 끔찍한 것이었나.
-그래, 딱딱하게 살지 말고 자유롭게 굴어. 기계처럼 살면 재미없잖아?
“닥쳐.”
-프레나 말이야. 데리고 놀기에는 아직 어리잖아? 그리고 걔가 필요한 건 덴스의 자산 때문이고. 적당한 여자 하나 잡아서 노는 건 어때? 너도 성욕은 있잖아. 어? 즐기는 김에 나도 같이 즐기고.
유단은 양손으로 귀를 막은 채 쓰러졌다. 귀를 막는다고 사라질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것 외에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결국 넌 정보덩어리일 뿐이야. 자아? 인간을 이해해? 웃기지 마. 너한테는 영혼도 없고, 심상세계도 없어. 그러니 육체가 날 원하는 거지. 고철은 고철로 돌아가.
주절대는 목소리를 무시했다.
설전을 벌이는 것조차 손해였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유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운 것처럼 머리도 멍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성이 끈이 끊어지고 정신체계가 엉클어지는 순간 육신의 지배자가 바뀔 것이다.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심할 때였다. 누군가가 지하실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나가니 가정부가 살갑게 웃으며 말했다.
“손님이 오셨어요. 군에서 나온 유렐이란 분인데…….”
다른 방문객이었다면 가정부를 시켜 돌려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군, 그리고 유렐이란 이름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제가 나가보죠.”
현관을 열자마자 선한 얼굴의 유렐이 보였다.
“오랜만이군. 그간 잘 지냈나?”
“예, 소장님.”
덴스가 쓰러진 후 보호를 가장한 조사를 위해 군에 수없이 들락거려야 했다.
유렐도 그때 몇 차례 만났다. 최근에도 몇 번 보았고.
유단의 기억에 의거하면, 둔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인간이 눈앞의 남자였다.
유렐은 가면 너머를 볼 줄 아는 인간이었다. 인간사냥꾼. 허점을 보이면 집요하게 파고들어 결국 물어뜯을 것이다.
“안색이 안 좋은데.”
“정리할 게 있어서 밤을 지새웠습니다. 조금 피곤하긴 하네요.”
“이런. 내가 안 좋을 때 찾아왔군.”
이대로 물러나줬으면 좋겠지만, 유렐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럴 땐 은은한 차가 제격이지. 이번에 들여온 찻잎인데 아주 좋아. 어떤가? 같이 한잔하는 게.”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유렐이 현관 안으로 들어왔다. 속이 뒤틀린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웃음을, 그리고 분노를 억눌렀다.
가정부를 시켜 차를 내리게 했다.
차가 준비되는 동안 응접실로 유렐을 안내했다. 소파에 앉은 유렐은 별다른 말없이 유단을 바라보았다.
침묵이 길어지는 건 좋지 않았다.
유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야 뭐 별거 있겠나. 매일 같은 일하며 지내고 있지.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들여다보고, 사람을 분해하고.”
분해라는 말에 목구멍이 콱 조여들었다. 머리 안쪽이 불붙은 숲처럼 혼란스러워졌다.
꼬투리를 잡힌 건가?
무언가 찾아낸 건가?
아니면 그냥 떠보는 건가?
통제에 따라야 할 몸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입안 가득 침이 나다가 바싹 말랐고, 허벅지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태연함을 연기해야 하는데 신경 써야할 게 너무 많았다. 유단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군모에 손을 뻗던 유렐이 멈칫했다. 빙긋 눈웃음을 짓고 턱수염을 매만졌다.
“자네 정말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군.”
“예, 뭐.”
“그래, 그렇단 말이지.”
똑똑, 응접실 문을 두드리며 가정부가 들어왔다. 카트를 밀고 들어와 찻주전자와 먹을거리를 내려놓았다.
달그락거리는 자기 소리가 바늘처럼 귀를 찔렀다. 유단은 유렐의 눈동자를 보며 뱀을 떠올렸다.
가정부가 문을 닫기 무섭게, 유렐이 말했다.
“학회장님은 그렇게 가실 분이 아니었지. 학회장님이 만났다던 정체 모를 소녀는 그림자조차 못 잡고 있고.”
“뭐라도 단서가 나와서 해결됐으면 합니다.”
“해결. 좋지, 해결.”
눈이 마주쳤다. 망막 안쪽을 헤집는, 뇌의 주름 사이사이를 훑는 눈빛이었다.
유렐이 진한 웃음을 짓더니 찻주전자를 들었다.
“이 찻잎은 펄펄 끓는 물에 우려내야 제맛이지. 다른 차와 달리 말이야.”
김이 오르는 찻잔을 단숨에 꺾는다. 입안이 헐 정도로 뜨거울 텐데, 유렐은 웃는 얼굴로 마셨다.
“차를 마셨으니 이만 가봐야겠군.”
유단은 앉은 채로 일어선 유렐을 오려다봤다.
“우리 자주 봐야겠어, 그렇지?”
인사를 남기고 유렐이 떠났다.
유단은 멀거니 닫힌 응접실 문을 바라봤다.
-째깍째깍, 사냥꾼이 다가오고 있어요. 목덜미를 잘 간수하는 게 좋을 거야. 그 몸, 내가 돌려받아야 하니까.
맴도는 목소리를 무시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심받고 있다. 나올 증거는 없지만 문제는 불안정한 정신 상태였다. 심문을 당하게 되면 실수를 저지를지도 모른다.
“어서 빨리…….”
유단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응접실을 벗어났다.
하루라도 빨리 기생충을 제거해야 한다. 그게 예상치 못한 위험을 동반한다고 해도.
* * *
“위험한 임무다. 생존율이 얼마나 될지, 나도 모른다.”
“우리가 뭐 그런 거 따지고 일했나요. 두둑이 챙길 수 있으면 그만입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마. 중앙은행에서 귀빈 대접을 해줄 정도로 두둑하게 준다고 했으니.”
루곤은 대장의 말에 픽 웃었다.
어차피 다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었다. 푼돈을 벌며 안전하게 사느냐, 막대한 금을 만지기 위해 목숨을 거느냐의 차이일 뿐.
기왕 몸을 쓸 거면 큰돈을 버는 게 낫다. 다들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접근은 1팀이 한다. 15m 간격을 두고 관찰. 문제가 생기면 팀원을 챙겨 이탈한다.”
“시체라도 잘 챙겨줘요.”
루곤은 실없는 말을 꺼내며 옆에 있는 젊은 마법사를 바라봤다. 실전에 투입되는 건 처음인지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친구.”
“예, 예?”
“너무 걱정하지는 마. 몸 대는 건 우리니까. 너는 그냥 뒤에서 보다가 한 방 시원하게 날리면 돼.”
마법사의 등을 두드린 후 앞을 보았다.
“그럼 가겠습니다.”
작전명 서쪽의 불청객.
정체 모를 마수에 대해 알아볼 시간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