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0화
“그래.”
대답이 쉽게 나왔다.
오늘 날씨가 어때, 점심에 뭘 먹었어, 차 마실 건데 어떤 게 좋아.
고민이 필요 없는 질문을 받았을 때처럼, 매끄러운 대화를 위한 덧없는 물음에 답할 때처럼 머리보다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고마워.”
가하란이 찻잔을 내밀었다. 노을빛으로 우러난 차에서는 상큼한 향이 났다.
밀레나는 향과 맛을 음미하며 창밖을 보았다. 말갛게 갠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지금 뭐라고 대답한 거지?
한 박자 늦게 아차 싶은 감정이 찾아왔다. 카트시와 대화했을 때 분명 이렇게 말했다.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제안이라고.
이것저것 따져보고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 도시를 떠난다는 건 그런 거였다.
찻잔을 쥔 손끝이 살짝 떨렸다.
지금이라도 정정해야 할까? 잘못 들었다고 대답해야 할까?
차를 입에 물고 가하란을 바라봤다. 흐린 하늘을 닮은 눈동자가 보였다.
……상관없으려나.
시고 단 차의 첫맛 뒤로 쌉싸름한 끝맛이 혀끝에 퍼져나갔다.
“선물 받은 건데, 어때?”
“좋네.”
“갈 때 가져갈래? 혼자 먹기에는 많거든.”
“조금만 받아갈게.”
밀레나는 찻잔을 기울이며 슬쩍 카트시를 바라봤다. 반질거리는 기계안구가 여봐란듯이 시선을 날리고 있었다.
“왜?”
밀레나가 툭 말했다.
-아니에요.
카트시의 음성은 무미건조했으나, 이상하게 웃음기가 스며 있는 것 같았다.
밀레나는 한마디 더 하려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대신했다.
드잡이할수록 손해 보는 건 나니까.
“계획은 잡아놨어?”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아직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어. 준비해야 할 게 많으니까.”
“도시를 떠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이래봬도 경험으로 얻어낸 지식이 꽤 있거든.”
“막히는 게 있으면 상담하러 갈게.”
“네가 오는 것보단 내가 여길 찾는 게 편해. 겪어봐서 알겠지만, 우리 아저씨들 수다쟁이잖아. 붙들리면 골치 아파.”
잔을 기울였는데 흘러나오는 게 없었다. 빈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가하란이 찻주전자를 가져왔다.
“좋네.”
밀레나는 잔에 차오르는 차를 보며 말했다.
-뭐가 좋을까요?
카트시가 옆에서 작게 말했다. 밀레나는 찻잔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카트시 입도 막을 수 있는 건가?”
-그런 위험한 발언은 하면 안 돼요. 가하란도 왜 갑자기 절 보죠? 기계도 자유를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요!
소리 지르는 카트시였다.
* * *
배웅하겠다는 가하란에게 됐다는 말로 응수하고 떠나는 밀레나였다. 가하란은 2층으로 돌아와 멀어져 가는 밀레나는 바라봤다.
누나는 땅을 보며 걷다가 고개를 쳐들더니,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깊숙이 찔러넣어 사정없이 흔들다가 다시 땅을 보며 걸었다.
뒷모습만으로도 복잡한 심정이 전해진다.
“괜한 말을 꺼낸 걸까?”
-아니요. 그렇진 않아요. 정말 쓸데없는 말이었다면 밀레나가 그 자리에서 거절했을 거예요. 밀레나는 그런 성격이니까요.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누나 성격을 파악했어?”
-그럼요. 저는 사람 보는 눈이 좋거든요. 그나저나 다행이네요.
카트시의 눈이 가하란을 향했다. 가하란은 모른 척하며 식탁에 놓인 그릇에 손을 뻗었다.
“무슨 소리야.”
-가하란이 막 태어난 송아지처럼 바들바들 떨었다는 거, 안 들켰잖아요.
“……그렇게 보였어?”
-네. 저한테는요. 밀레나는 눈치 못 챈 거 같지만. 하긴, 눈치 못 챌만 하죠. 그쪽도 그쪽 나름대로 생각할 게 많았을 테니.
긴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가까스로 참아냈던 긴장감이 뒤늦게 해방되며 온몸을 휘감았다.
“성급했나?”
-아니라니까요.
“지금이 아니면 왠지 말할 타이밍이 없을 거 같아서 말해버렸어. 누나가 많이 당황했겠지?”
갑자기 후회가 찾아들었다.
얼마나 어이없었을까. 예고도 없이 도시를 떠나자는 말을 들었으니.
-하나만 알아둬요. 저한테 빚졌다는 걸.
카트시가 사전에 말해둔 게 있었나? 그렇다면 누나의 반응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래도 그렇게 쉽게 승낙할 줄은 몰랐어.”
-그건 의외였어요. 아마 대답한 당사자도 놀랐을걸요?
가하란은 다시 창밖을 보았다. 밀레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말은 꺼내놨으니 이제 준비만 제대로 하면 되겠네.”
자꾸만 씰룩거리는 입을 다잡으며 카트시를 바라봤다.
-그래야죠. 근데 일은 잘 해결하고 온 거예요?
“브라인 님께 사정을 설명해놨어.”
-도움을 준대요? 자기 기억을 찾는 거니까 당연히 주겠죠?
가하란은 고개를 저었다.
“흥미를 보이셨지만 둔을 떠나는 건 고려사항이 아니라고 하셨어. 이곳에 남아 기록을 이어가는 게 자신의 책무라면서.”
-바라라의 딸들은 그런 식이죠. 한곳에 정착하면 나무처럼 뿌리를 내리고 꿈쩍도 안 해요. 인근 문화가 어떻게 변하는지, 그것만 죽어라 관찰하죠.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행해 주신다면 큰 힘이 됐겠지만, 거절하신 이상 어쩔 수 없지.”
-가하란도 포기해 버려요. 어차피 선의로 하는 일인데.
“그러긴 싫어. 방법도 알고 수단도 갖출 수 있는데 손 놓고 있을 순 없어. 무엇보다 내가 브라인 님을 돕고 싶어.”
-사람이 적당히 착해야 해요.
“착한 건 아니야. 어릴 때 받은 게 많으니 돌려드릴 뿐이지. 그리고 나한테 있어 브라인 님은…… 가족이나 다름없으니까.”
-저도 가족 맞죠?
“아마도?”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 치고, 지금부터 체계적으로 준비해야 해요. 일단 시간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것부터 시작하죠.
“안 그래도 탈로스 제작 쪽을 알아보고 있어. 밤나비, 아일린, 한드르켄. 이쪽 클랜의 제작자들과 자리를 만들어 보려고.”
-직접 보고 싶네요. 제가 살던 시대와 제작 환경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궁금해요.
“격변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바뀌었어. 특히 그라운드 제로 이후 모든 게 달라졌지. 그랑겔 건틀릿을 보조 장치 없이 다루는 세상이니까.”
-그랑겔, 그랑겔.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안 돼요. 그 꼬마가 야장의 신이라 불린다는 게.
야장의 신.
가하란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예전에 말했었지? 줄리어스의 작업을 돕던 사람의 이름이 그랑겔이었다고.”
-네. 어린 꼬마였는데 손재주가 남달랐어요. 줄리어스가 일을 맡겼을 정도니 말 다 했죠.
“그랑겔에 관한 정보는 없다고 했지?”
-전혀요. 무엇보다 지금 시대에 통용되는 그랑겔이 제가 활동하던 시대의 그랑겔인지는 확신할 수 없어요.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동일 인물일까.
“오토마타와 그랑겔 툴. 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거병 역시 지금과는 많이 달라지겠지?”
-그렇겠죠. 하지만 원천 기술을 안다고 해서 꼭 발전하는 건 아니더라고요. 시대의 명백한 한계점이 틀어막고 있는 한 인간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은 한정적이니까요.
“한계점.”
거대했던 거병이 소형화를 이루었다. 경이적인 변화였다. 하지만 줄리어스가 생존해 있던 시절에도 거병 소형화는 실현돼 있었다.
현시대의 마법공학은 아직 과거의 유산을 훑을 뿐이었다.
카트시가 말한 시대의 한계점을 돌파해 이전과는 다른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연결망과 마나포집. 그리고 마력선 짜맞춤. 어머니는 도중에 연구를 포기했지만, 가하란이라면 이 세 가지로 온전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예요.
“까마득한 미래의 일이겠지?”
-글쎄요. 혁신은 종종 예상치 못하게 찾아오니까요. 어머니가 시대를 앞당겼듯이.
“난 줄리어스가 아니야.”
-분명 지금은 모자라죠. 하지만 마력선 짜맞춤을 겉핥기식으로나마 이해한 건 가하란이 유일해요. 그것만으로도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하고요.
가하란은 머릿속에 잠들어 있는 마력선 짜맞춤과 연결망의 개요를 떠올렸다.
이해 불가한 공식 안에 세상이 담겨 있었다. 들여다보고 있으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버지는 종종 이런 말을 했다.
모두가 힘을 합치면 못 할 일이 없다고.
하지만 줄리어스가 설계해놓은 세상을 보고 있다면 의구심이 든다. 절대적 다수의 노력이 한 개인의 창조성 앞에서 빛을 잃어버리니까.
가하란은 성도 시장이 남기고 간 배지를 꺼내 들었다. 아르드헨의 말에 따르면, 모든 운명이 한 사람에 의해 바뀌었다고 한다.
-무슨 생각해요?
카트시가 말했다.
“내가 무슨 노력을 한들 쓸모없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들어서.”
-그럴지도 모르죠. 노력이 꼭 값진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니잖아요? 같은 시간을 투자해도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오기도 하고.
카트시의 눈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렇다고 해서 회의감에 빠질 필요는 없어요. 노력해서 달라지지 않을지도 몰라요. 세상이란 게 그렇잖아요? 하지만 그것조차 안 하고 바뀌길 바라는 건 정신병이에요. 결과를 원한다면 노력해야죠. 설령 태양처럼 밝게 빛나지 못하는, 반딧불 같은 결과물이라도.
가하란은 입을 씰룩인 다음 말했다.
“반딧불보다는 좀 더 밝았으면 좋겠는데.”
-걱정하지 마요. 가하란이라면 촛불보다는 클 테니.
“촛불이라. 그 정도면 나쁘지 않네. 적어도 밤길은 밝힐 수 있으니까.”
가하란은 배지를 손에 쥔 채 미소를 지었다.
* * *
꿈을 꿨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목덜미에 땀이 흥건했다.
프레나는 서랍장 위로 손을 뻗었다. 물이 담겨 있어야 할 물병이 텅 비었다.
심한 갈증이 일었다. 식은땀을 닦아내며 1층으로 내려왔을 때였다.
희미한 마법등 아래 유단이 서 있었다. 양손을 늘어트린 채 그저 멍하니 벽만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프레나는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오빠 거기서 뭐 해?”
유단이 고개를 돌렸다. 기이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마주하는 순간 공포심에 입이 다물어졌다. 누구지? 이 사람은?
다가온다. 유단의 얼굴을 한 낯선 사람이.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움츠릴 때였다.
발소리가 멈췄다. 프레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안 자고 왜 내려왔어.”
피곤해 보이는 유단의 얼굴이 보였다. 아까와는 다른, 낯선 사람이 아닌 자신이 아는 오빠였다.
“오빠?”
이상했다. 조금 전 그 느낌은 뭐였지?
걱정스럽게 손을 뻗었다. 유단에게 닿기 직전, 유단이 부드럽게 손을 밀어냈다.
“올라가서 쉬어. 얼굴이 안 좋네.”
유단이 몸을 돌렸다. 프레나는 멀어져가는 오빠를 향해 간신히 말을 꺼냈다.
“괜찮은 거야?”
유단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얼른 올라가.”
괜찮다는 대답은 해주지 않았다. 프레나는 지하실로 걸어가는 유단을 끝까지 지켜봤다.
* * *
지하실 문을 닫았다.
유단은 곧바로 거친 숨을 내뱉었다.
-아쉽네.
목소리가, 지겨운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유단은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몸의 주인이 이쪽을 바라보며 비웃고 있었다.
-덴스의 죽음을 기점으로 내 활동 반경이 넓어진 거 같아. 기계란 것도 결국 틀이 바뀌니 엉성해지네.
“얌전히 있어.”
-얌전히 있고 싶어. 근데 자꾸 샛길이 보이잖아. 그나저나 프레나…… 잘 컸네. 응?
“얌전히 있으라고!”
거울을 붙잡으며 외쳤다. 비웃던 목소리가 사라졌다.
유단은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