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9화
밀레나는 멍하게 카트시를 바라봤다.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다른 사람한테 들리지 않을까? 저렇게 모습을 드러내도 괜찮은 걸까?
아니지. 기계인형은 이제 흔해졌으니 의심받을 일은 없나?
아니야, 아니야. 입력된 언어를 반복할 뿐인 기계인형과 달리 저건 의사소통이 가능한 유사정령이잖아?
무엇보다.
세상에 드러나면 안 된다는 위험한 기계가 조심성 없이…….
-얼른요! 문은 열려 있어요.
밀레나는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가져다댔다.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던 카트시도 안쪽으로 들어갔다.
현관을 열고 2층으로 올라갔다. 창가에 있는 카트시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괜찮아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했으니까요.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야. 너 들키면 안 되는 거잖아.”
-만약 들키더라도 바보처럼 연기하면 돼요. 안녕하세요, 사과 맛있어요, 저렴해요.
카트시가 뚝뚝 끊어지는 기괴한 어조로 말했다.
“요즘 기계인형은 매끄럽게 말해.”
-그래요? 몰랐어요. 이 방을 벗어난 적이 없어서.
쓸쓸함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대화하고 있으면 실감하게 된다. 인간의 감정을 깨달았다는 건 거짓이 아니구나.
밀레나는 카트시 옆에 앉았다. 창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매일 같은 풍경만 보는 거야?”
-엄밀히 말해서 같지는 않아요. 현실 세계에서 ‘같음’은 희귀한 현상이거든요. 지금도 저기 봐요. 저 여자가 왼발을 먼저 떼는 순간, 어제와는 다른 풍경이 되는 거죠.
나무상자를 든 여자가 왼발을 뗐다.
-저렇게.
카트시의 눈이 멀어져가는 여자를 쫓았다.
-저 여자는 어디로 가는 걸까요?
“글쎄.”
-몸이 자유롭다면 따라가서 정답을 알아냈을 텐데, 아쉬운 일이에요.
몸. 밀레나는 카트시의 본체를 바라봤다. 청철로 만들어진 자그마한 유사정령.
“바깥 구경 가고 싶어?”
-당연하죠.
“가하란한테 말해보지 그랬어.”
-제 즐거움을 위해 보안책임자를 곤란하게 할 순 없죠. 게다가 그런 말을 꺼낼 상황도 아니었어요. 밀레나도 알고 있겠지만, 가하란은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었으니까요.
“……지금은 괜찮아.”
-네, 그런 것 같아요. 밀레나 덕분이에요.
기계가 하는 칭찬은 난생 처음 듣는다. 기묘하면서도 머쓱했다.
“가하란은?”
-나갔어요. 브라인 특무대령을 만나러. 아, 이제는 대령이 아니죠.
“브라인 님도 네 존재를 알아?”
-아니요. 절 아는 사람은 세 명 뿐이에요. 가하란, 엔엔, 그리고 당신.
카트시의 안구가 밀레나를 바라봤다.
-자랑할 게 생겼어요.
“갑자기?”
-자랑은 혼자서 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밀레나를 발견했을 때 기뻤어요. 자랑할 수 있게 돼서.
풋, 밀레나는 작게 웃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좋아. 어디 실컷 해 봐. 들어줄 테니까.”
-몸이 생길지도 몰라요.
“응?”
뜬금없는 말에 머릿속 한가득 물음표가 생겨났다. 몸이 생긴다고?
“거기 있는 게 네 몸 아니야?”
-이것도 몸이긴 하죠. 하지만 움직일 수 있는 몸은 아니잖아요.
“움직일 수 있는 몸이 생긴다는 거야? 그건 설마…….”
유사정령을 이용한 움직이는 몸.
강철의 육신.
거병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곧 둔을 떠나게 될 지도 몰라요.
“……그렇겠네.”
-알고 있었어요?
“아니, 자세한 건 몰라. 하지만 그럴 것 같은 느낌은 들었어. 아마 브라인 님과 관련된 일이겠지?”
민 교수와 가하란이 만난 날을 떠올렸다. 브라인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마도사가 필요하다고 말했었다.
둔을 벗어난다면 분명 마도사를 찾기 위함이리라.
“떠난다라. 언제쯤?”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조만간이겠죠. 들어보니 탈로스 주조 방식도 발달해서 틀을 짜는 건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하네요.
“그랑겔 툴도 발전했으니까. 예전에는 거대한 제철소에서 장인들이 달라붙어 겨우 골격을 짜냈는데, 이제는 마나의 힘으로 쇠를 주물러. 나도 몇 번 봤는데 신기하더라.”
무른 쇠를 두들겨 형태를 만드는 방식은 여전하지만, 과정이 극단적으로 축소됐다.
예전에는 장인의 손끝에서 다듬어지던 작업도 정밀화된 회로학이 대신하게 됐고.
막대한 마나를 퍼부어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던 그랑겔 건틀릿도 이제는 우수한 마법사 한 명이면 작동 가능한 수준이었다.
-인간 하나하나가 강력한 병기가 되는 세상이네요. 어쩌면 도시국가란 형태조차 잃어버릴지도 몰라요.
“그런 끔찍한 소리는 하지 말아줘. 세상이 또 변한다면 난 적응 못 할지도 몰라.”
말은 이렇게 했지만, 징조는 곳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둔조차 옛 명성을 이어받은 건 군부뿐이었다.
상인연합회와 학회.
새롭게 등장한 세력이 둔의 기둥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다른 도시는 클랜이 주축이 돼 사회망을 이뤘다고 들었다.
집단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시대라 다들 뭉치고 있지만, 이 개념이 붕괴되면 어떤 현상을 불러올까?
“막강한 무력을 지닌 개인이 늘어나는 세상.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해.”
-강자들이 도덕에 집착하길 빌어야겠네요. 재미있죠? 결국 윤리관에 기대야 한다는 게.
카트시가 밖을 바라봤다. 무리를 지은 새들이 하늘을 덮으며 날아가고 있었다.
철새들인가?
-근데 생각해보면 큰 탈 없이 적응하게 될지도 몰라요. 인간은 외로움을 인식하니까요.
“혼자 살 수는 없으니까. 인간이나 동물이나.”
대열을 이탈한 새가 허공에서 방황하자, 후발주자로 따라오던 새가 부리로 쪼았다.
이끌고, 이끌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겠지.
-그래서 말인데, 밀레나도 같이 갈래요?
“내가?”
-가하란은 밀레나 곁에서 안정된 상태를 보여요. 곁에 있으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너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좀 이상하네.”
-전 보안책임자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책임져야 하거든요.
밀레나는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밀레나?
“네가 가하란을 걱정하는 건 이해해. 하지만 이런 부탁은 네가 아닌 가하란이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가하란은 아무 말 안 할 테니까요.
그럴 지도 모르지. 아니, 가하란의 성격을 생각하면 작별을 고하고 홀로 떠날 것이다.
애초에 품고 있는 고민을 여기저기 떠벌리고 위로받는 성격이었다면, 지난 5년간 혼자 끙끙 앓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가하란이 결정할 일이야.”
-만약 부탁한다면요? 같이 가주실 건가요?
“글쎄.”
즉답하기 어려운 주제였다.
세상이 바뀌었다. 도시를 떠난다는 건 목숨을 내거는 행위가 됐다. 그렇기에 클랜 단위로 혹은 거대 상단을 꾸려 안전을 도모하는 게 당연한 일이 됐다.
하지만 가하란은 마도사를 찾아 떠나야 하고, 그건 비밀스러운 일일 것이다. 응당 함께 움직이는 사람도 적을 테지.
목적성은 분명했다. 하지만 온전한 결과를 낼 수 있을까?
그라운드 제로 이후 마도사를 본 사람은 없었다. 설령 찾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한들, 이 넓은 땅을 돌아다니려면 막대한 준비가 필요하다.
짐 가방 하나 둘러매고 길을 떠날 수 있는 시대가 아닌 만큼 장거리 여행은 고심을 많이 해야 했다.
“그래도 말을 꺼내온다면…….”
밀레나는 중간에 입을 닫았다. 카트시의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거리고 있었다. 표정이 없으나 왠지 미소 짓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인지 알 것 같네.”
-뭐가요?
“여기서 확실히 정하자. 가하란한테 이 얘기를 꺼내는 거 금지야. 네가 부추기는 것도 안 돼.”
-죄송한데, 전 기계라 밀레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걸요?
“다 알아들었으면서.”
은근히 얄미운 기계였다.
-알겠어요. 아무 말 안 할게요.
“생각이 깊은 애야. 합당한 선택을 할 애니까 괜한 말 할 필요도 없고.”
만약 가하란이 제안해 온다면 어떻게 할까? 아니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있나?
실력 좋은 용병을 구하는 거라면 둔에도 인재가 많았다. 어쩌면 브라인과 함께 움직일지도 모른다.
기억을 잃었다고 한들 바라라족의 전투 능력까지 사라진 건 아닐 테니까.
산의 전사들도 바라라의 딸 앞에서는 긴장한다고 하니 특무대령과 함께라면 다른 호위 용병은 필요 없을 것이다.
마음도 추슬렀고, 재능도 갖췄으며, 뛰어난 지식도 있다. 가하란이 나와 여행해야 할 이유가 있나?
“없지.”
도출해낸 결론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뭐가 없어요?
“아니야, 아무것도.”
괜한 고민이었다.
만나면 헤어지는 게 당연한 이치였다. 둔에서 이별한다고 영영 못 보는 것도 아니고.
다른 도시에서 또 마주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별일 아니었다.
별일 아니긴 한데…….
-음, 인간들 표현 중에 이런 게 있죠. 떫은 감 씹은 표정이라고.
“떫은 감 먹어본 적 있어?”
-없지만 먹게 된다면 지금 밀레나처럼 뚱한 표정을 짓게 되겠죠. 후후.
“웃음소리가 이상해.”
-바보 기계 연기 중이에요.
카트시의 안구가 가까이 다가왔다.
-맞다, 저번에 블루아이란 친구에 대해 말했었죠?
“얘기를 꺼내긴 했었지.”
-지금 어디 있어요? 가하란한테 부탁해서 만나러 가고 싶은데. 현시대의 유능한 오토마타는 어느 정도 수준인지, 직접 보고 싶거든요.
블루아이. 어릴 적 격납고에서 수도 없이 봐온 거병.
밀레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쉽게도 블루아이가 어디에 있는지는 나도 몰라.”
-왜요?
“사라졌거든. 스스로 움직여서.”
-완전 자립형 오토마타가 구현된 건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었어. 게다가 마나응축봉도 제거된 상태라 연료도 없었고. 시동키가 있어도 제한장치를 풀려면 시간이 꽤 걸리는데, 그런 과정 없이 혼자 움직였어. 미스터리지.”
그라운드 제로가 블루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친 게 분명했다.
-자립형 오토마타였다면 좋은 대화 상대가 됐을 텐데.
“나중에 찾게 되면 우리 엄마가 애타게 찾고 있다고 말해줘. 만난다면 말이지.”
블루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세상을 방황하고 있을까, 아니면 아무도 찾지 않는 오지에서 정지한 채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까.
어쩌면 균열 사이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저기, 가하란이 오네요.
카트시가 말했다. 창밖을 내다보니 땅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걸어오는 가하란이 보였다. 뭘 저렇게 고민 중인 거지?
-숨어 있다가 놀라게 해줄까요?
“재미없어.”
잡담을 나누는 사이 문이 열렸다. 가하란은 여전히 바닥만 보고 걸었다.
이윽고 창가 가까이 다가왔다.
“깜짝이야.”
가하란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앞도 안 보고.”
“이런저런 생각. 근데 어쩐 일이야?”
질문을 받자마자 입술을 딱 붙어버렸다. 딱히 용무가 있어 찾아온 건 아니었다.
그냥 며칠 동안 엇갈리다 보니 오기가 생겼고, 어쩌다 보니 집에서 기다리게 된 거니까.
“……그냥?”
“그냥?”
얼떨떨한 얼굴로 보던 가하란이 옅게 웃음을 지었다.
“차 마실래?”
“주면 좋지.”
가하란이 찬장에 손을 뻗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카트시가 길게 늘어진 커넥터를 배배 꼬며 쳐다본다. 이 기계, 개구쟁이 기질이 다분했다.
“아, 맞다. 누나.”
“응?”
가하란이 차를 우려내며 툭 말했다.
“나한테 시간 내줄 수 있어?”
“시간? 시간이야 내줄 수 있지. 뭐 부탁할 거 있어?”
“응. 근데 시간을 좀 많이 내줘야 해.”
“……무슨 뜻이야?”
가하란이 찻잔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언젠가 둔을 떠날 건데, 그때 같이 가줄 수 있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