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8화
아침 공기를 사랑한다. 새벽녘 이슬을 품고 있는 아침 공기는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다.
브라인은 느긋하게 걸음을 뗐다.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지면의 거친 감촉을 음미했다.
같이 사는 인간족 여자가 본다면 신발을 신어달라며 잔소리하겠지만, 지금은 곁에 없으니 괜찮다.
“토끼 할머니!”
물동이를 들고 바삐 움직이던 아이가 브라인 앞에서 멈춰 섰다. 물동이가 흔들리며 물이 바닥에 튀었다.
“지겹게도 인사하는구나.”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뭐라고 하시잖아요.”
아이가 방긋 웃었다.
지난 5년간 수도 없이 봐온 웃음이었다. 각기 다른 얼굴들이 각기 다른 웃음을 지었다.
처음에는 징그러웠다. 이상하고 역겨운 느낌도 들었다. 꼬물대는 자그마한 생물이, 덧없이 스러져갈 안타까운 목숨이 뭐 그리 좋다고 웃어댈까.
“일 봐라.”
“안 그래도 그럴 거예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을 걸면 얼어붙던 놈이 이제는 대꾸도 넙죽한다.
“할머니, 내일 또 봐요!”
빙긋 웃으며 돌아서는 아이를 향해 브라인은 머쓱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같이 사는 인간족 여자, 셀베이아의 말에 따르면 기억을 잃기 전 ‘브라인’은 인간족 꼬마를 질색했다고 한다.
지금도 썩 좋은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싫은 것도 아니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음이었다.
인간족 꼬마 하니 한 아이가 떠올랐다. 종종 집을 찾아와 빗질해주는 아이.
남에게 털관리를 맡기는 건 끔찍한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그 아이는 싫지 않았다.
나불나불 입을 열 때면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가볍게 발을 굴렀다. 맞은편 건물 지붕을 밟고, 반쯤 무너진 시계탑을 차고 올라 새롭게 올린 종탑 위에 섰다.
도시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5년의 시간이 폐허를 도시로 바꿔놓았다.
바퀴벌레처럼 부단히 움직이는 인간들 손에 도시는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수첩을 꺼내 들었다. 켜켜이 쌓인 기억을 끄집어내 비교하고, 달라진 점을 적어나갔다.
기록의 의무를 지닌 자로서 이런 사소한 것들도 놓칠 수 없었다.
보수공사가 끝난 도로에 관해 적을 때였다. 브라인은 펜을 앞주머니에 찔러 넣고 눈을 갸름하게 떴다.
물동이를 든 아이가 보였다. 무너진 담벼락을 끼고 골목으로 들어가는데, 아이 옆으로 불쾌한 것이 보였다.
재미난 일이었다. 처음 보는 것이 불쾌감을 선사하다니.
안개처럼 희뿌연 놈이 아이의 뒤를 밟았다. 아이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촐싹대며 걸을 뿐이었다.
브라인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다가 몸을 날렸다. 습한 공기가 얼굴을 할퀴었다. 털이 엉망이 되겠군.
지면으로 내려와 두어 번 바닥을 찼다. 풍경이 뒤로 휙휙 넘어간다.
시야에 꼬마가 들어왔을 때 그 허연 놈이 꼬마를 덮치려 했다.
브라인은 펜을 꺼내 가볍게 던졌다. 날아간 펜이 안개 같은 놈을 꿰뚫었다.
놈의 형태가 잠깐 흔들렸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저게 대체 무엇일까?
기록해둘 가치가 있어 보인다.
“할머니?”
아이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신경 쓰지 말고 빨리 집으로 가라.”
“네?”
“얼른.”
눈에 힘을 주고 다그쳤다. 꼬마는 주눅이 든 채 좌우를 살피다가 냅다 집을 향해 뛰었다. 물을 죄다 흘리고 있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바는 아니다.
“인간족은 이걸 못 보는 건가.”
희뿌연 안개가 스멀스멀 움직일 때였다. 허공에 균열이 생겼다.
뿌연 놈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 겁에 질린 고양이처럼.
균열이 조금 더 벌어지더니, 이내 뿌연 놈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브라인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괴현상을 관찰했다. 주변 사물에 변화는 없었다. 마나가 요동치는 것도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힘.
뿌연 놈이 균열 사이로 반쯤 빨려 들어갔다. 브라인은 거침없이 걸음을 떼 균열 가까이 다가갔다.
벌어진 틈 안으로 손을 넣어 보려 했는데, 벽에 막힌 것처럼 나아갈 수 없었다.
쇠도 우그러트릴 만한 힘을 줬지만 소용없었다.
이내 뿌연 놈도, 균열도 자취를 감췄다. 힘의 잔향을 탐지해보려 했으나 느껴지는 것도 없었다.
“기괴한 놈일세.”
브라인은 바닥에 나뒹구는 펜을 집어 들었다. 펜촉이 벌어져 있었다. 이건 더 이상 못 쓰겠군.
펜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앞주머니에 넣을 때였다. 인기척이 났다.
고개를 왼쪽으로 틀었다. 좁은 길목에 인간족 여자가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종이 쪼가리를 들었고, 다른 한 손에는 나무로 된 작은 새를 쥐고 있었다.
“토끼…… 바라라족…….”
혼자 중얼거리던 인간족 여자가 해맑게 웃으며 다가왔다.
“혹시 브라인 님이신가요?”
“이 도시는 날 아는 인간이 참 많네. 미리 말해두겠는데 기억을 잃어서 옛일은 떠올리지 못해.”
“괜찮아요. 전 오늘 처음 뵙는 거니까요. 근데 여기 있던 도깨비는 직접 처리하신 건가요?”
“도깨비? 그 괴상한 걸 도깨비라 부르나 보지?”
“……아. 그것도 잊으셨겠군요. 퀼비언도 잊으셧나요?”
“퀼비언? 마도사를 말하는 거라면 알고는 있다. 서적을 통해 정보를 접했으니까.”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몰라도 상관없겠죠. 기억을 되찾으시게 된다면…….”
“그럴 일은 없을 거다. 규율을 어긴 대가로 내 모든 걸 내놨으니까.”
“가하란은 꽤 희망적이던데요? 기억을 되찾을 수도 있을 거라고.”
가하란?
“그 꼬마와 아는 사이인가 보네.”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조금 친해요. 아! 전 엘들리아에요. 편하게 엘리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업무 선배이실 테니.”
브라인은 자신을 엘리라 소개한 인간족 여자를 위아래로 쓸어봤다.
입이 가볍다. 쓸데없이 친근하게 굴기도 하고. 귀찮은 성향인 게 분명하다.
“너.”
“네?”
“도깨비와 퀼비언, 그리고 내 과거에 대해 아는 것을 모두 적어서 가져와.”
“가, 갑자기요?”
“시간 날 때 해도 좋으니까 가져오기만 해. 인간의 시간법으로 1년이든, 10년이든, 100년이든 상관없어.”
“100년이면 전 죽고 없을 텐데요.”
“자식에게 시켜. 난 자료만 모으면 되니까.”
인간한테 흥미는 없지만, 엘리가 쥐고 있는 종이는 제법 흥미로워 보였다.
“그건 뭐지?”
종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요? 부적이에요.”
“부적? 제사 때 쓰이는 것 같지는 않은데.”
“용도가 살짝 다르죠. 이건…….”
브라인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것도 문서화해서 가져와.”
“네? 그냥 말로 하면 편한데. 브라인 님은 알아도 상관없고요.”
“시끄러운 건 질색이야. 그리고 시간이 없어. 늦게 돌아가면 그 아이가 잔소리를 늘어놓거든.”
뭐라 외치는 엘리를 뒤로 한 채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매끈하게 빗어놓은 털들이 보풀이 잔뜩 인 스웨터처럼 변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는 털 관리에 신경 써야 할 것이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브라인은 손님과 마주해야 했다.
“아침부터 너로구나.”
가하란이었다. 조잘조잘 떠들어댈 저 작은 입이 탐탁지 않지만, 입이 아닌 손은 쓸모가 있었다.
“들어와라. 마침 시킬 일도 있고.”
집으로 들어오니 아침 준비를 마친 셀베이아가 보였다. 푸릇한 채소가 제법 먹음직해 보인다.
“아침을 먹는 동안 내 털 좀 빗어놔라.”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포크를 내줘야 할 셀베이아가 뚱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털 관리는 같이 식사한 후에 하세요. 그게 예의에요.”
“인간의 예법따윈…….”
“아침은 제가 준비했어요.”
브라인은 입맛을 다셨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 이 아이한테는 기를 펴지 못하는 걸까.
기억을 잃었다. 물론 눈앞에 아이가 ‘소중했던 인간’이라는 건 인지하고 있다. 규율을 어질 정도면 어지간히 소중했겠지.
하지만 그건 과거에 내가 저지른 짓이다.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과거의 난 어긋난 선택을 한 것이다.
인간족 하나를 살리려고 심상세계를 망가트려 버리다니.
역정을 내고 후회감에 몸서리 쳐야 하건만, 말갛게 웃는 저 아이를 보고 있으면 어처구니없게도 평화가 찾아온다.
“그래. 먹고 하자.”
부단히 손을 움직여 음식을 절반쯤 비웠을 때였다. 가하란이 입을 열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미덥잖은 어투로 서두를 뗀 가하란이었으나, 설명이 이어질수록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변했다.
브라인은 심드렁하게 말을 듣다가 ‘언어능력’이란 대목에서 관심을 보였다.
가하란이 설명을 끝마쳤을 때 브라인은 자신의 머리를 매만져야 했다.
“내 안쪽 세계에 마도사가 있었다?”
“네. 정신체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어요. 누나도 기억나죠?”
가하란의 물음에 셀베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기록보관서 안에 계셨어. 가하란. 네가 말한 대로라면 마도사님이 주소가 돼줄 수도 있겠네.”
“아직은 가설에 불과해요. 하지만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어요.”
브라인은 호들갑 떠는 두 인간족을 바라봤다.
“분명 흥미로운 이야기야. 내 머릿속에 군식구가 들어있다는 것도 재미있고. 하지만 그 마도사란 인간을 찾지 못한다면 허황된 이야기일 뿐이지.”
“그래서 찾아가 보려고요.”
“뭐?”
가하란이 주머니에서 끈을 꺼냈다. 자세히 보니 끝에 배지가 달려 있었다.
“이게 마도사가 있는 곳까지 인도해 줄 거예요.”
“이건…… 꽤 재미난 물건이야.”
마나와는 결이 약간 다른 힘.
엘리가 쥐고 있던 종이와 나무 새가 풍겼던 기이한 힘의 흔적이 배지에서도 느껴졌다.
“가능성이 있다는 거군.”
브라인은 가하란을 바라봤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원하는 거요?”
“내 기억을 찾아주는 대가. 거래를 위해 이런 말을 꺼낸 거 아니야?”
대답을 기다렸으나 가하란은 눈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말하라니까.”
“없어요.”
“뭐?”
“원하는 건 없어요.”
없다니까 더 의문스럽다. 코를 씰룩거리며 가하란을 노려봤다.
“전 브라인 님께 많은 걸 받았어요. 그러니 거래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돼요.”
가하란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빗은 2층에 있죠? 올라오시면 제가 잘 빗어드릴게요.”
그릇을 정리하고 2층으로 올라가는 가하란이었다.
브라인은 멀뚱하게 계단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차를 우려내던 셀베이아와 시선이 마주쳤다.
“저거 무슨 꿍꿍이냐?”
“그런 거 없어요.”
“인간족인데?”
“인간이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셀베이아는 말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자요. 가하란 기다리게 하지 말고 얼른 올라가세요. 차도 들고 가시고.”
등을 떠밀렸다. 양손에 찻잔을 들고 계단 앞에 섰다.
“인간들은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러운 머리와 달리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건 왜일까.
브라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단을 밟았다.
* * *
“얘는 왜 이렇게 만나기 힘든 거야.”
밀레나는 가하란의 집 앞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며칠 안 보인다 싶더니, 이제는 찾아가도 만날 수가 없었다.
루드 팩토리에 가도 자꾸 나갔다고만 하고, 옆 공장에 슬쩍 찾아가도 없다고 하고.
어느 날은 학회, 어느 날은 이름 모를 클랜, 또 어느 날은 제철소.
엇갈려도 이렇게 엇갈릴 수가 있나?
2층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틀 때였다.
-밀레나, 밀레나. 올라와요!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음성.
밀레나는 몸을 홱 돌려 2층을 올려다봤다. 카트시가 기계 안구를 바깥으로 살짝 뺀 상태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