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7화
“인간의 문제이니 인간이 알아서 해라.”
도마뱀 전사가 거대한 창을 들고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남아 있던 에단이 멀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 아저씨도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니까 이해해 주세요.”
하하, 맹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지키는 에단이었다.
젊은 친구가 고생깨나 하겠군. 디온은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랍파의 눈으로 봤을 때 그 마수는 어느 정도로 위험해 보이던가?”
“식견이 짧아 정확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아저씨가 언급한 대로 전투하려면 단단히 준비해야 할 겁니다.”
젊은 랍파가 이어서 말했다.
“마수와 조우했을 당시, 마수는 인근 들개와도 소통했어요.”
“들개?”
“예. 들개들은 마수를 보며 짖어대고 경계했지만, 마수가 손을 내미니 금방 얌전해졌죠.”
디오는 보고서 귀퉁이에 ‘동물’이라고 적었다.
“마법적인 작용이었나? 정신 조작을 했다든가.”
“마수가 말하길, 뜻이 같으니 다툴 필요가 없다고 했어요. 그 짧은 시간에 들개들이 마수에게 친밀감을 보이며 오히려 저희를 적대시했죠.”
에단이 말을 끝내자마자 탄드라 교수가 끼어들었다.
“마법이 아닌 특수한 방법으로 세뇌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술처럼 판단력을 흐리는 물질이 마수 몸에서 흘러나올지도 모르죠.”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만약 그런 방법을 쓸 수 있었다면 저희한테도 사용했겠죠?”
에단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지능이 낮은 동물만 통하는 걸지도 몰라요. 아니면 우리를 안심시키려는 수작일 수도 있고요. 지성을 갖춘 마수라고 했으니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해봐야 해요.”
디온도 탄드라 말에 동의했다.
마수와 맞닥뜨렸는데 전투도 없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점에서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수고했네. 필요한 게 있으면 다시 부를 테니 이만 물러나지.”
젊은 랍파가 인사를 남긴 후 회의실을 떠났다.
디온은 주먹 쥔 손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 번 쳤다. 시선을 모은 다음 입을 열었다.
“타린족의 경고를 무시하는 건 도박수라고 생각됩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계속 미룰 수도 없는 일이죠. 동부 토벌은 예정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서쪽 마수 건은 특별 팀을 구성해 조사를 맡기죠.”
“만약 마수가 공격해오지 않고 평화를 요구해 온다면 어떻게 대응하실 겁니까?”
탄드라 교수가 물었다.
“괴물에게 안방을 내줄 생각이라면 타협해도 좋겠죠. 나중에는 도시 안에서 살게 해달라고 할테니, 마수를 위한 거리도 만들고요.”
“비꼬진 말아주세요. 그냥 학자로서 궁금했을 뿐이니까요.”
“가능하다면 생포, 힘들다면 표본을 채취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죠. 토벌은 기정사실입니다. 몬스터와 공생은 있을 수 없어요.”
디온은 회의실 바깥으로 보이는 야트막한 도시 외벽을 가리켰다.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그라운드 제로 이후 저 벽을 쌓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민이 마수에게 죽었는지.”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썩어가는 시체를 치우다 보면 숲에서 슬렁슬렁 기어 나온 마수들이 도시를 침범했다.
일반인은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완력과 체력, 속도로 무장한 괴물들.
육체만 강한 놈들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살아남은 군인을 모집해 대응하면 됐으니까.
문제는 병장기로도 어찌할 수 없는 특수한 마수들이었다.
마법사들처럼 강렬한 마나 파장을 뿌리며 기괴한 능력을 쓰는 마수들.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고막을 터트리고, 헛구역을 나게 하는 별의별 마수들과 싸워야 했다.
마법공학의 발전과 프리핸드로 마법을 쓰게 된 어린 마법사들이 아니었다면, 도시 재건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여러분 중 단 한 명이라도 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공생해야 한다고 발언할 수 있다면 전 그 뜻을 따르겠습니다.”
디온이 눈을 얇게 뜨며 말했다.
학회의 대표도, 상인연합회의 대변자도 씁쓸한 표정으로 눈을 돌렸다.
“마수와 함께 살아야 하고, 마수야말로 인간이 도달해야 할 이상향이라 말하는 미친 자들이 거리에서 시위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빌미를 줄 순 없죠. 평화로운 마수 같은 건 상상으로만 남겨둡시다.”
마법공학을 기피하며 자연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설파하는 무지렁이들, 마수가 위대한 생명체라며 섬겨야 한다는 머저리들.
질타받고 음지로 스며들었으나 그들은 분명 둔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다른 몇몇 도시는 세력을 규합해 기득권 자리까지 꿰찼다고 들었다.
미쳐버린 세상이라 그런지 미친놈들이 득세한 것이다.
지성을 갖춘 마수가 세간에 공표되면 정신병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거리에서 외칠 것이다.
‘대화를 해야 한다! 마수와 같이 살 길을 도모해야 한다!’
상상만으로도 이가 갈린다.
“태스크포스는 누굴 주축으로 구성할 겁니까?”
롱캣의 세잔이 질문했다.
“과거 제국 시절, 마수전담팀에서 활동했던 부하들이 몇 있습니다. 그들을 주축으로 팀을 구성할 거고, 지휘관은…….”
디온은 옆에 앉아 있는 루카를 가리켰다.
“이 친구가 맡게 될 겁니다.”
“루카 중령이라면 나쁘지 않군요.”
다들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특이 사항이었던 서쪽 마수 건이 마무리되니 회의 진행에도 속도가 붙었다.
“오늘은 이렇게 마무리하죠.”
디온이 자리를 정리했다. 회의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차례차례 빠져나갔다.
남은 건 디온과 세잔, 그리고 탄드라뿐.
세잔이 넌지시 말문을 열었다.
“교수님. 차기 학회장은 누가 될 것 같습니까?”
탄드라 교수가 안경을 벗었다.
“이런 자리에서 할 만한 얘기는 아닌 것 같네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안면이 있는 우리 교수님께서 차기 학회장이 되신다면 모두가 편할 텐데요.”
세잔의 말에 디온도 동의했다.
“덴스라는 걸출한 분이 계셨을 때야 잡음이 안 났지만, 지금 학회는 꽤나 시끄럽다죠? 듣자 하니 동백독서회을 중심으로 한 파벌이 차기 협회장 자리를 탐내고 있다던데.”
정말 걱정된다는 얼굴로 말하는 세잔이었다. 탄드라의 입술이 살며시 올라갔다.
“서장님께서 저희 학회를 이리도 생각해주실 줄은 몰랐네요.”
“이런 게 동료애 아니겠습니까.”
“걱정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학회 일은 학회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일어서는 탄드라 교수였다.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군부, 시의회, 학회, 상인회. 공통된 목적을 위해 이 자리에 모였지만, 찢어지고 나면 앙숙 아닙니까?”
세잔이 풀어둔 은팔찌를 손에 찼다.
“동부 토벌이 진행되고 타 도시와의 통행이 수월해지면 지난 몇 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변화가 찾아올 겁니다. 그때도 우리끼리 둔 하나를 놓고 으르렁대야 할까요?”
몸을 반쯤 돌렸던 탄드라 교수가 다시 세잔을 바라봤다.
“달라진 마법공학을 보세요. 제약 없이 마법을 휘갈기는 마법사들을 보세요. 지금이야 옛 방식에 물들어 있어 체제로 사람을 다스릴 수 있지만, 그들이 날뛰기 시작하면 우리 자리는 금방 뒤집힐 겁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뭔가요?”
세잔 쪽으로 몸을 완전히 튼 탄드라가 팔짱을 꼈다. 디온도 흥미롭게 세잔을 바라봤다.
“까놓고 말해서 우린 통치하고 싶어서 위로 올라선 겁니다. 아득바득 말이죠. 그러니 신인류에게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합당한 준비를 해야죠.”
“어떤 준비요?”
“제국이 운영했던 스콜라와 스토아처럼 둔을 위해 희생해줄 인간들이 필요합니다. 명예든 돈이든, 아직 여물지 않은 친구들을 잘 모아서 우리 색으로 물들여야죠.”
세잔이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닐 겁니다. 학회에서도 특수한 마법사들을 모집 중일 테고, 군부 역시 신체술 사용이 자유로운 젊은 병사를 발굴 중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돈은 모든 곳을 비집고 들어간다더니, 롱캣은 제법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솔직해진 김에, 저 역시 롱캣 내부에서 입지를 굳히기 위해 힘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버겁죠. 개인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디온은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버팀목이 되어줄 친구가 있다면 세상 살기 한결 수월해지겠군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사령관님. 보세요! 그라운드 제로 당시 수많은 사람이 저승길로 떠났습니다. 이런 말 하면 좀 그렇긴 하지만, 사령관님 연령대에서는 생존자를 찾기가 힘들 정도죠.”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인간은 살 확률이 높았으니까요. 그렇기에 군부의 군인들은 생존율이 높았고.”
세잔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그런 이유들이 하나하나 모여 살아남고, 우리를 이 자리로 이끌었죠. 다시 말해 우린 운명에게 혜택을 받은 겁니다. 행운의 신이 등을 떠밀어주고 있는데, 이대로 얌전히 있기에는 너무 아쉽지 않습니까?”
세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의했으니 선택은 두 분이 하시죠. 대답을 듣기 위해 조만간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시의회는 곁다리니 필요 없지만 나중에 의사 정도는 물어보겠습니다.”
세잔은 여유로운 웃음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디온은 남은 탄드라를 바라봤다.
“교수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자리에 욕심이 없었다면 이런 곳에 있지도 않았겠죠. 연구실에 틀어박혀 연구만 했을 테니.”
“경박한 친구지만 능력이 없는 건 아닙니다. 설득력도 갖췄고요. 우리에게 모자란 젊은 피를 저 친구가 대신해 줄지도 모릅니다.”
“사령관님께서는 이미 결정하신 듯하네요.”
“틀린 말이 없으니까요. 사람은 변했어요. 법망으로 묶어둘 수 있는 자들이 대다수지만, 법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자들도 분명 있습니다. 힘은 인간을 그렇게 만들죠.”
그라운드 제로 이전의 마법사들은 한 번의 마법을 위해 온갖 준비를 다 해야 했다.
심상세계를 도식화해 스크롤로 옮기고, 부족한 마나를 끌어 오기 위해 부가적인 장치도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법의 형태부터 달라졌다. 스크롤 없이, 프리핸드로 마법을 부리는 자들이 나타났다.
심상세계에 타격을 입지 않고 권능을 부리는 자들.
인류가 쌓아온 법이 그들을 구속할 수 있을까?
지금이야 버릇처럼 따라준다고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거병의 사유화도 제국 시절에는 논의조차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클랜이 제작하고 운영하고, 심지어 개인이 보유하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디온의 말에 탄드라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마나가 날뛰는 시대가 됐을 때 우린 은연중 이런 미래를 예상했죠. 조직화한 군인보다 강력한 개인. 그게 현실화하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개인이 막대한 힘을 소유하게 된다면, 체제는 작동할 수 있을까요?”
“법의 수호자가 필요하겠군요.”
“예, 그런 겁니다.”
그럴싸한 말이었다. 법의 수호자. 법을 수호하는 김에 자리도 보전하면 좋고.
“안 그래도 학회에서 마나 유도장치를 연구중입니다. 뿌리에서 올라오는 마나를 특정 구역으로 유도해 공백 상태로 만드는 거죠.”
“도시 전역에 설치된다면 정말 안전해지겠군요.”
“하지만 자원 수급에 문제가 있어요.”
“모든 건 돈이죠. 그리고 그 돈을 롱캣이 해결해줄 수 있고요.”
“위험한 일에 필요한 인력은…….”
“군부의 자원이 있죠.”
탄드라는 복잡한 눈빛으로 테이블을 바라보다가 일어섰다.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결정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동부 토벌이 시작되면 따져야 할 게 많아지니까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