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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296화 (269/558)

제296화

디온은 청록색으로 빛나는 도자기를 들여다보았다. 얼마 전부터 이런 사치품이 거래되기 시작했다.

식수를 구할 수 없어 비가 내리기만을 기도하던 게 몇 년 전인데, 이제는 도자기의 때깔을 보며 품평하는 시기가 오다니.

5년. 아니, 6년.

인간의 자생력은 정말이지 놀라울 뿐이다.

“사르심.”

수석부관을 불렀다. 문을 열고 들어온 부관에게 턱짓으로 도자기를 가리켰다.

“버리게.”

“예.”

도자기가 눈앞에서 치워졌다.

디온은 식은 커피를 마시며 문건을 들췄다. 불필요한 정보들을 넘긴 끝에 관심을 둘 만한 서류가 나왔다.

“덴스, 그리고 유단.”

검지로 책상을 긁었다.

군부, 롱캣 상인연합회, 그리고 덴스 학회. 삼파전으로 정치 구도를 확립했던 둔에 균열이 생겼다.

“조사1부장 들어오라고 하게.”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와 함께 루카가 들어왔다.

“앉지.”

군례를 마친 루카가 의자에 앉는 동안 디온은 커피를 내렸다.

“설탕을 넣던가?”

“예.”

“단게 좋긴 하지. 요즘 같은 시대에는 더욱더.”

루카 앞에 잔을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학회장의 장례식은 잘 마무리됐는가?”

“별문제 없이 어제 끝났습니다.”

“그 양반도 참 불꽃처럼 살다 갔군. 젊은 나이인데 안타까운 일이야.”

손짓하자 루카가 잔을 들어 올렸다.

“슬하에 딸이 하나 있었지?”

“예. 이름은 프레나. 학회 관련된 사업에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

“마냥 어리다고 할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비를 잃었으니 마음고생이 크겠지. 자네가 신경을 좀 쓰게.”

“알겠습니다.”

디온은 엄지손톱을 바라봤다. 거스러미가 눈에 들어온다. 떼어내기에는 짧아서 안 잡히고, 내버려 두자니 이름처럼 거슬린다.

“학회 운용 자금은 어찌 처리될 것 같나?”

“기존과 차이가 없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학회장의 유지를 이어간다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습니다.”

“주인 잃은 돈은 눈이 없어 멋대로 굴러다니기 마련인데.”

“학회 재정부에 연줄이 닿아 있어 몇 가지 알아봤지만, 올해 예산 집행에서 특이 사항이라 부를 만한 건 하나뿐이었습니다.”

“하나?”

루카가 품에서 반으로 접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곧 공시될 사안이라 정식으로 요청해 미리 받아 왔습니다. 학회 쪽에서 특별 예산으로 배정될 목록입니다.”

디온은 예산안을 빠르게 훑었다. 상당한 금액이 사회 환원이란 목적으로 편성돼 있었다.

“일회성인가?”

“학회 측에서는 앞으로도 이어갈 것이라고 했습니다만, 신임 학회장이 선출된다면 또 달라지겠죠.”

“공석으로 있는 동안은 지키겠다는 거군.”

둔에 거주하는 지식인들의 수장.

탐나는 자리겠지만, 당장 오를 수 없는 자리기도 했다. 덴스를 대신한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니.

“차기 학회장으로 거론되는 인물들은…….”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좀 깊게 알아봤으면 좋겠는데.”

디온은 커피잔에 입술을 대며 루카를 응시했다. 곧은 자세로 앉아 있는 루카는 그 올바른 몸가짐만큼이나 심지 있는 목소리를 냈다.

“공식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은 전부 알아 오겠습니다.”

“자네도 여전하군. 그래서 좋은 거지만.”

루카는 선을 넘지 않는다. 법과 규율이 허락하는 경계에서만 활동한다.

은밀한 일을 맡기기에는 충성심이 부족한 친구이나, 공적인 일을 맡기기에는 이보다 유능한 부하가 없다.

“큰딸이 곧 생일이라지?”

디온은 준비해둔 선물을 건넸다. 루카는 포장지로 둘러싼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손대지는 않았다.

“자그마한 거니 부담 가질 필요 없네. 예쁘장한 브로치니까. 정 신경 쓰이면 여기서 먼저 보고 가져가도 되고.”

루카가 살짝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디온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오후에 일정이 있나?”

“없습니다.”

“그러면 2시 회의 때 자네도 참석하게. 골치 아픈 얘기가 나올 테니 자네 머리를 좀 빌려야겠어.”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루카가 물러났다. 적당히 단 초콜릿을 입에 넣고 멀거니 밖을 바라보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28분.

슬슬 올 시간이었다.

분침이 틱 움직이기 무섭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게.”

문을 열고 유렐이 들어왔다. 흐트러짐 없는 군복과 말끔한 외관. 강직하나 수더분한 맛이 있는 루카와 달리 이쪽은 야심으로 속을 가득 채운 까다로운 친구였다.

“사령관님의 휴식을 방해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그 거추장스러운 인사는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나?”

“제 진심은 변하지 않으니 인사 역시 변함없을 겁니다.”

“진심이라. 자네나 나나 그런 게 있던가?”

유렐이 선한 웃음을 지었다. 보는 이의 경계심을 풀어버리는 인상. 루카와는 다른 방면으로 유능한 친구다.

“유단 쪽은 알아봤나?”

“수사기관의 자료를 토대로 재조사를 시행했지만, 의심되는 구석은 없습니다.”

“정황은 정황으로 끝날 뿐인가. 아무리 봐도 이번 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건 그놈일 텐데.”

덴스의 갑작스러운 죽음. 시기가 시기인 만큼 급발성 오블리비언이라는 편리한 병명이 신경 쓰였다.

“재산권 변동 사항을 살펴봤지만 유단의 이름으로 돌아간 것은 없었습니다. 권리도 학회 내규대로 처리될 예정이고요.”

“지분도 잃고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겠군.”

“행정처 쪽도 완전히 손을 뗐습니다.”

“시체에서도 나온 게 없고, 유서 역시 특별한 게 없으니.”

학회장이 쓰러지던 당일, 거리에서 꽃을 줬다던 소녀는 그림자조차 잡아내지 못했다.

암살 시도였다면 지금쯤 반응이 와야 할 텐데, 너무나도 조용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손을 뗄 시기입니다. 더 파고들면 군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현 상황에서 학회와 척지면 롱캣에게 기회를 주는 꼴입니다.”

“현장 사람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일단 마무리하고…….”

유렐의 눈빛이 변하는 걸 보았다. 디온은 흠, 하고 작게 소리를 냈다.

“군인이 아닌 개인적으로 알아보고 싶은 게 있나 보군.”

“군 명예에 누가 되지 않는 선에서 알아보겠습니다.”

“어떤 게 켕기나?”

“최근 몇 차례 유단을 만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봐왔기에 어떤 인간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유단은 마치 사람이 바뀐 것 같더군요.”

“바뀌었다?”

“아직은 직감일 뿐입니다. 명시적으로 보고할 내용은 없습니다. 사령관님께서 손을 떼라고 하시면……”

“아니. 계속해보게. 두 달 정도 휴가를 내줄 테니까.”

“한 달이면 충분합니다.”

취조부장 시절의 눈빛이다. 사람의 밑바닥을 누구보다 잘 알아보는 친구니 맡겨두면 뭐라도 건져 올 것이다.

“선물은 마음에 드셨습니까?”

“자네였군. 아침에 도자기를 보내온 게.”

“예. 신비로운 색상이라 마음에 드실 것 같았습니다.”

“음, 그거라면 버리라고 했네.”

웃으면서 말하자 유렐 역시 환하게 웃었다.

“제가 부족한 게 많습니다. 오랫동안 사령관님을 보필해 왔지만, 여전히 모르는 게 많군요. 다음에는 좀 더 괜찮은 걸 준비하겠습니다.”

루카와 정반대에 있는 인간.

둔에서 얼굴이 가장 두꺼운 인간. 그래서 루카만큼이나 마음에 드는 부하였다.

“수고했네. 다음에 볼 땐 근사한 얘기를 기대하지.”

인간 사냥꾼이 냄새를 맡았다.

뭔가 있는 것이다. 덴스에서 유단으로 이어질 학회의 중심을 흔들 수 있다면, 둔의 정치 구도는 흥미롭게 변할 것이다.

집무실이 조용해졌다.

열어둔 창문으로 초여름의 훈풍이 들어왔다.

오랫동안 품에 지니고 다니는 단검을 손에 든 채 창밖을 보았다.

도시는 안정화를 끝내고 비축해둔 힘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풍족함을 넘어 과포화된 마나와 마법공학 혁신이 가져온 결과였다.

도시 밖 마수들도 소형화를 이룩한 거병이라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디온은 칼날에 손가락을 댔다. 작은 성에서 만족하던 성주들이 옛 영광을 꿈꾸며 날개를 펼 날이 머지않아 오겠지.

지난 5년보다 더 빠르게 세상이 변모할 것이다. 변화에 치이지 않으려면 기민하게 움직여야 한다.

“우선 동쪽.”

인간들끼리 치고받기 전에 끔찍한 괴물들을 처리해야 했다.

마수 토벌에 관해서는 인근 몇몇 도시의 수장들과 얘기를 끝마친 상태였다. 저 멀리 스파우에서도 연락해온 건 의외지만.

길을 재정비해야 한다.

마수들 때문에 막힌 물자 이동을 해결했을 때 인간은 옛 생활을 되찾게 될 것이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부관이 말했다.

어느덧 회의 시간이었다. 디온은 정복을 갖추고 회의실로 내려갔다.

“다들 오셨군요.”

롱캣, 학회, 그리고 군부의 수뇌가 한자리에 모였다. 시의회에서도 관료가 나와 있었다.

디온은 회의실 구석에 서 있는 타린족 전사를 바라봤다. 따분한 얼굴로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사르심입니다.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앞에 있는 보고서를 읽어 주십시오.”

다들 군말 없이 문서를 들었다.

디온도 다시금 서류를 살폈다.

“다른 도시와의 연계성을 확보하기 위해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둔 동부는 이전 조사와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서부에서 특이 사항이 발생했습니다.”

지성을 갖춘 마수.

안건이 오르고 논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롱캣의 세잔이 손을 들었다.

“머리를 굴릴 줄 안다고 해도 금수는 금수일 뿐입니다. 괜히 문제 삼지 말고 예정대로 처리하죠.”

토벌 작전이 지체될수록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게 롱캣이었다. 신중을 기하자는 말을 가장 싫어할 것이다.

“2년입니다. 우리가 2년간 공을 들여 지역 조사에 나섰고, 몇몇 특이점을 발견했지만 큰 문제 없이 처리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이제는 움직여야 할 때입니다.”

다들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디온 역시 반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정보를 물어온 게 타린족 전사라는 점이 신경 쓰였다.

“발언해도 될까요?”

도마뱀 옆에 서 있던 청년이 손을 들었다. 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인다. 발언권을 얻은 청년이 말했다.

“에단입니다. 동부 조사7팀 랍파고요. 7팀이라고 해봤자 옆에 있는 아저씨랑 단둘이지만.”

스파우에서 온 친구들이로군. 군부에서 간간이 언급되는 ‘아리엘’ 시장을 떠올리며 에단을 바라봤다.

“그 마수는 단순히 말이 통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와 비슷한 사고 수준을 지녔습니다. 공격 성향도 없었고, 저희를 위협하지도 않았죠.”

“특이한 마수라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작전을 미뤄야 할 근거는 안 됩니다. 특별한 마수는 곳곳에 있으니까요.”

롱캣의 세잔이 말을 꺼냈다.

“생포해서 연구 자료로 쓰면 좋긴 하겠군요.”

학회의 탄드라 교수가 말했다. 여전히 깐깐해 보이는 얼굴이다.

지성을 갖춘 마수에 대해 설전이 오갔다. 생포와 토벌, 이득과 손해. 약간의 견해차가 있었지만 작전은 예정대로 시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전사의 땅을 침범하려면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겠지.”

묵직한 목소리가 회의실을 휘어잡았다. 디온은 도마뱀 전사를 바라봤다.

“내가 자네를 뭐라 불러야 하지?”

“이름 교환은 영혼의 얽힘을 뜻하지. 전사만이 서로의 이름을 알 자격이 있다.”

“너희는 몰라도 된다는 뜻이로군. 알겠네, 도마뱀 친구. 그 상응하는 대가가 정확히 무엇인가?”

디온은 깍지를 끼며 되물었다.

“말 그대로 대가다. 침범하면 침범당할 것이고, 휘두르면 휘둘림당할 것이고, 피를 흘리고 싶다면 목을 내놔야겠지.”

“그토록 강대한 몬스터인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놈은 지는 싸움을 하지 않을 것이다. 피하고 도망친 다음 단련해서 돌아오겠지.”

“당장은 위협이 되지 않겠군.”

“그 또한 모른다. 붙어본 게 아니라 정확한 힘을 모르니.”

디온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일단 찔러 봐야겠군. 사람 몇을 던져야 생채기를 낼 수 있는지, 견적을 내보면 다음 작전이 수월해질 테니.”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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