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5화
진자 운동을 하던 배지가 멈췄다. 가하란은 손바닥 위에 배지를 올려두었다.
“배지와 끈. 둘 다 있어야 작동하니까 잃어버리지 마.”
아르드헨이 말했다.
“마나 파장이 없는 걸 보면 마법은 아닌 것 같은데, 원리가 무엇인가요?”
“‘주술’이라고 하는데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 괴짜 마법사를 찾게 되면 물어보든지.”
의외의 만남이 해결책을 가져다주었다. 아니, 의도된 만남이었으니 필연적이라고 해야 하나.
운명은 사라졌다. 대체할 단어가 필요한데, 마땅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가하란은 끈이 달린 배지를 움켜쥐었다.
“감사합니다.”
“근데 퀼비언은 왜 찾는 거야?”
황제라면 바라라의 딸인 브라인을 알고 있을 것이다. 브라인의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조합과 연이 닿아 있다면 퀼비언도 나서주겠지.”
아르드헨이 쪽지에 무언가를 써서 건네줬다.
“배지가 길을 인도해 주겠지만, 혹시라도 못 찾게 된다면 웨켄에 있을 데옹에게 이걸 보여줘. 널 도와줄 거다.”
쪽지에는 아르드헨의 서명이 담겨 있었다.
“만나서 반가웠다. 나중에 또 보자고.”
아르드헨과 악수를 나눴다. 테인과도 눈인사를 교환했다. 두 사람이 떠나는 동안에도 타챠는 식탁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인사 정도는 해주시지 그랬어요.”
“악운이 낀 놈들과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다. 이지를 상실한 정령들조차 저놈 근처는 얼씬도 안 한다. 지독한 냄새가 나거든.”
정령.
가하란은 타챠 맞은편에 앉았다. 수북이 쌓인 채소볶음을 한 점 집어 입에 넣었다.
“그라운드 제로 이후로 정령들이 눈에 안 보여요. 수다스러운 친구들도 사라졌고요.”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네 머리가 그것들을 걸러낼 뿐이다. 익숙해진 거지. 그나저나 그 눈, 더 기괴해졌구나.”
타챠가 긴 손가락을 혀로 핥았다.
“제 눈이야 언제나 말썽이죠.”
“말하는 걸 보니 뭔가 알아낸 것 같구나. 예전에 네 눈은 ‘뜨인 자’ 전 단계로 보였는데, 이제는 알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됐어.”
“이것저것 듣기는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이 눈이 정확히 뭔지는 여전히 알아내지 못했어요.”
“감춰진 게 많은 세상이지. 너무 알려고 애쓰지 마라. 그때도 말했지만 이해하려 들지 말고…….”
“흘려보낼 건 흘려보내라. 아저씨가 그때 했던 말이 어떤 뜻인지 이제는 알아요.”
가하란은 타챠의 말을 받으며 미소 지었다.
“전사로서 잘 커가고 있군. 하지만 몸뚱이는 여전히 허약하다. 올곧은 정신이 제 뜻을 발휘하려면 강철 같은 육신이 필요한 법.”
“강철 같은 육신을 얻긴 했어요.”
가하란은 바지 밑단을 살짝 들어 올렸다. 오른쪽 의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흠, 제법 괜찮은 언어유희였다.”
두툼한 고기를 으적으적 씹어먹던 타챠가 조용히 물었다.
“아프지 않았냐?”
“걱정해 주시는 거예요?”
타챠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둔에는 어쩐 일로 오신 거예요?”
“호위 겸 잔심부름 몇 개를 하러 왔다.”
“심부름도 하세요?”
“안 하면 옆에서 계속 칭얼대니까. 위대한 전사의 부탁이 있으니 들어주긴 해야지.”
위대한 전사. 몇 번이고 타챠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가하란은 타챠와 테인의 대련을 떠올렸다. 대기를 뒤흔들던 힘의 파장. 상식으로 재단할 수 없는 둘의 경합은 짧았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몸에 붉은 증기를 두르고 공격을 준비하던 타챠는 그야말로 위대한 전사처럼 보였다.
“아저씨가 말하는 ‘위대한 전사’는 대체 어떤 분이에요?”
감이 잡히질 않았다. 타챠가 공경심을 담아 말하는 상대라니. 옛 황제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않는 아저씨가 위대한 전사를 입에 담을 때면 자신을 낮추었다.
“그걸 지니고 다니면 언젠가는 만나게 될 거다. 협회에 수장으로 활동 중이니.”
타챠가 손가락을 들어 배지를 가리켰다.
“배도 찼으니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군.”
제구를 움켜쥐며 일어서는 타챠였다.
“떠나시는 건가요?”
“당분간 둔에 머물 거다. 인간들이 그 마수를 어찌 처리할지, 판단을 듣고 난 뒤에 움직여도 늦지 않으니까.”
“마수요?”
“일단은 마수라 불러야겠지. 내 눈에는 신념을 지닌 전사로 보였지만.”
타챠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인사는 없었다.
변치 않은 그 모습이 오히려 정겨웠다. 워낙 많은 게 변해버린 세상이니까.
떠돌아다니는 옛 황제, 조합, 협회, 시간을 잃어버린 민 교수, 신념을 지닌 마수, 그리고 외계.
둔을 중심으로 무수한 사건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유단 형. 형은 뭘 바라고 있는 거야?”
가하란은 공동묘지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복잡하게 얽힌 사건 속에서도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유단의 향후 행동이었다.
펠트신이란 독약을 얻게 된 경위, 덴스를 살해한 이유, 그것으로 얻게 되는 이득과 이득이 불러올 결과가 무엇일지.
만약 카트시의 친구 중 하나가 유단과 연결돼 있고, 사람을 대상으로 한 모종의 실험이 진행 중이라면…….
가하란은 배지를 만지작거렸다.
미지의 존재들보다 코앞에 있는 사람이 더 껄끄러웠다.
무탈하게 지내고 싶었다. 사소한 고민을 나누며, 몇몇 문제를 같이 해결하고, 과정에서 얻은 즐거움을 공유하며 결국 웃게 되는 정겨운 미래를 항상 그려왔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결말이 슬픈 이야기는 누구도 꿈꾸지 않을 테니까.
생각을 정리하며 걷다 보니 집 앞이었다. 현관을 열고 들어가 창가에 놓인 카트시를 바라봤다.
축 늘어져 있던 카트시의 눈이 슬그머니 움직였다.
-장례식은 어땠어요?
“떠들썩하기도 하고 차분하기도 했어.”
-지금 기분이 어때요?
가하란은 의자를 끌고 와 카트시 옆에 앉았다.
“모르겠어.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까 생각이 많아져.”
-악인도 선인도 아닌 그냥 인간이었으니까요.
“그런가?”
카트시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유단을 만났나요?
“얼굴만 봤어. 따로 얘기는 안 했고.”
-어때 보이던가요?
“슬퍼 보였어. 그렇게 연기하는 건지, 아니면 그런 감정이 정말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중 하나가 유단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면 이대로 끝날 리 없어요.
“그렇겠지. 친부나 다름없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어. 그보다 더한 짓도 서슴지 않겠지.”
-사전에 싹을 자르는 것도 방법이에요.
가하란은 귓불을 매만졌다.
“……프레나가 걱정돼. 그리고 지금 당장 밝힌다고 해도 양상이 달라지지 않을 거야. 교수가 침묵한 채 눈을 감았으니까.”
피해자가 진실은 은폐하고 살인자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수사기관에 재수사를 요구해도 증거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덴스는 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포기했다. 설욕의 감정마저 안으로 집어삼키고 입을 굳게 닫은 채 떠나가 버렸다.
“교수의 성격상 모든 정리를 끝냈을 거야. 어쩌면 희생양으로 쓰일 범인을 준비해놨을지도 몰라. 유단에게 화살이 겨눠지는 순간 구하기 위해서. 유단이 무너지면 프레나가 불행해질 테니까.”
-끔찍한 사랑이네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돼요. 저도 줄리어스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거든요.
카트시의 눈이 가하란을 향했다.
-물론 가하란을 위해서도.
“카트시가 바라는 걸 해. 날 위해서 뭔가를 하지 말고.”
-가하란이 원하는 게 제가 원하는 거예요.
카트시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유단을 어떻게 할 거예요?
“일단은 지켜보려고. 유단도 알고 있을 거야. 진실을 아는 자가 적어도 한 명 이상 존재한다는 걸.”
-교수가 말했겠죠? 유단을 제어할 필요가 있으니까.
“그렇겠지.”
-영악한 사람이네요. 가하란을 이용하는 거잖아요.
“그건 상관없어. 내가 어느 정도 바란 결과니까.”
창문을 활짝 열었다. 스며든 공기가 제법 시원했다.
-유단이 몸을 사리는 동안은 뾰족한 수가 없네요.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가하란에게 피해가 올 수도 있고.
“적당한 거리에서 계속 지켜볼 거야. 그러다 보면 네 친구에 대해서도 알게 될 테고.”
-솔직히 말하자면 유단은 파트너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간이에요. 과단성을 갖춘 인간. 욕심에 솔직한 인간. 실험 재료로서 완벽하죠.
“무서운 말이네. 만약 카트시가 나 말고 유단 형을 먼저 만났다면, 카트시도 형에게 힘을 실어줬을까?”
-흥미는 보였겠지만 전 거절했을 거예요. 그 사람은 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요.
가하란은 미소 지으면서 카트시의 본체에 손을 올렸다.
-유단 건은 보류하고, 앞으로 뭘 할 거죠?
“집에 오기 전에 재미난 사람들을 만났어.”
가하란은 시장에게 들은 이야기를 카트시에게 전했다.
-외계라.
“뭔가 아는 게 있어?”
-전혀요. ‘층’이란 개념은 제 안에 들어 있지만 그 상위 개념은 존재치 않아요.
“줄리어스도 몰랐던 걸까?”
-어머니는 분명 뛰어난 분이었지만,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었어요. 뜨거운 우유에 차갑게 식은 커피를 붓는 이상한 짓도 종종 하는…….
“그게 이상한 거야?”
-오, 세상에. 이 세계는 종말을 맞이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예요. 뜨거운 우유에 식은 커피라고요!
진심으로 화를 내는 듯하니 얼른 화제를 바꿨다.
“지난 5년간 주변 분들이 날 도와줬어. 지탱해줬고. 그러니 이제 내가 그분들을 도와야 해.”
-둔을 떠날 생각이군요.
“응. 브라인 님을 도우려면 웨켄으로 가야하니까.”
-당연히 저도 데려갈 거죠?
가하란은 카트시의 본체를 바라봤다. 등에 인다면 어찌어찌 데리고 다닐 수 있지만, 내 체력으로 버틸 수 있을까?
-잊은 거 같은데, 이건 어디까지나 그릇이에요.
“그랬었지.”
가하란은 정보의 세계로 진입했다. 카트시를 이루는 마력선의 집합체가 보였다. 타원형에서 원형으로 꾸물꾸물 변하는 신비로운 회로.
“옮겨 담을 수 있을까?”
-가하란이라면 가능해요.
집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병로를 통해 이동 중인 거병이 보였다. 큼지막한 바퀴를 양손에 들고 성큼성큼 다리를 내뻗고 있다.
“카트시를 기반으로 오토마타를 제작한다면…….”
-거병용으로 창조된 건 아니지만, 필요하다면 거병 서포트도 수행할 수 있어요. 대신 엉성한 몸체는 싫어요. 자존심이란 게 있으니까.
“최대한 신경 써볼게.”
가하란은 작은방으로 들어가 서랍장 앞에 섰다. 두 번째 서랍을 꺼낸 뒤 안쪽에 파놓은 홈에 손가락을 걸고 위로 들었다.
숨겨놓은 아버지의 노트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가 구상해둔 디자인이 있는데…….”
-싫어요. 구닥다리에요. 모듈 설정은 마음에 들지만, 외관은 정말 구려요.
단호한 말에 웃음부터 나왔다.
“나도 이대로 쓸 생각은 없어.”
아버지의 미적 감각은 난해한 부분이 있었으니까.
“오토마타를 제작하게 되면 일반 회로 위에 널 담아야 하는데, 문제없을까?”
-상관없어요. 마력선 짜맞춤은 회로에 영향을 받지 않아요. 물론 개판이면 안 되겠지만, 연결성만 갖춰 놓으면 절 담아내는 건 문제 없어요. 지금 제 본체 역시 단순 회로 위에 심어져 있으니까요.
“그렇긴 하네.”
회로는 평면이지만 마력선 짜맞춤은 입체다. 회로의 층과 층을 연결하는 마력선의 실체를 보는 자만이 카트시의 존재를 눈치챌 것이다.
“다시 바빠지겠어. 해야 할 것들이 많아.”
-오랫동안 쉬었으니 이제 움직여야죠.
가하란은 길게 뻗은 둔의 도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