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94화 (267/558)

제294화

“말 많은 설명꾼이요?”

“너도 아는 인간이야. 언제 찾아올지는 모르겠지만.”

가하란은 배지를 만지작거렸다.

정보량이 많아 처리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의구심을 버리고 모든 걸 진실이라 여긴다면 이 세상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방대한 이야기에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당장 다 받아들이고 우리와 함께하자는 건 아니니까 머릿속에 남겨두기만 해.”

“전 제 앞가림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요.”

“다들 그래. 그래서 연대가 필요한 거고.”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 말을 다 했으니 미련 같은 건 없다는 듯이.

“가시는 건가요?”

“가야지. 둔 관광을 조금 하다가 연합왕국 쪽으로 넘어갈 거야. 마음 편히 놀고 싶지만, 고생하는 협회장을 생각해서 조금만 놀려고.”

말을 끝낸 아르드헨이 여전히 식사 중인 타챠를 노려봤다.

“저저, 염치도 모르는 도마뱀 같으니라고.”

“혹시 타챠 아저씨도 협회 사람인가요?”

“아니. 추천이 있다고 해도 내가 결사반대할 거야. 나랑 너무 안 맞아.”

테인이 손을 들었다. 다가온 종업원과 몇 마디 나누더니, 말끔한 얼굴에 구김이 생겼다.

“예산 초과입니다.”

테인이 말했다. 아르드헨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재미없는 농담 그만해.”

“저도 농담이었으면 좋겠습니다만…….”

테인이 손가락을 들었다. 가하란도 시선을 옮겼다.

타챠가 앉아 있는 식탁 밑, 고풍스러운 와인 병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병목에 새겨진 마크가 눈에 익었다. 라벨에도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라운드 제로 이후 구하기 더욱 어려워진 브랑드 지역의 와인. 게다가 올드 와인이었다.

“이런 미친.”

아르드헨이 단어 하나하나에 감정을 꾹꾹 담아 말했다.

가하란은 테인이 받은 계산서를 슬쩍 바라봤다. 와, 소리가 절로 나오는 가격이 새겨져 있었다.

타챠가 아르드헨을 보며 활짝 웃었다. 찢어진 입꼬리가 눈에 닿을 정도로.

저렇게 환하게 웃는 아저씨는 처음 본다.

“풍미가 제법 괜찮더군.”

타챠가 말했다.

“괜찮겠지. 돈이 얼만데.”

아르드헨이 미간을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낼 수는 있는 거지?”

“치를 수는 있지만, 경비가 모자라게 될 겁니다. 마구간도 힘들 정도로요.”

테인과 말을 주고받던 아르드헨이 슬그머니 가하란을 바라봤다.

“혹시 말이야, 정말 미안한 얘기인데…… 돈 좀 빌릴 수 있을까?”

돈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 때문일까. 다른 세계니, 외계인이니 했던 말들이 무게감을 잃어버렸다.

작게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말했다.

“제가 계산할게요. 타챠 아저씨에게 대접한 셈 치고.”

“정말 고마운 말인데, 날로 먹으면 꼭 배탈이 나더라고. 빌려주는 것만으로도 괜찮아.”

“저도 괜찮아요.”

“아니, 내가 안 괜찮다니까?”

아르드헨이 눈을 씰룩였다.

뭔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한없이 가벼워 보이기도 하고, 거대한 산 같기도 하고.

“좋아! 이렇게 하자. 내가 돈에 상응하는 정보를 팔게. 뭐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값어치에 맞게 대답해줄 테니까.”

“……전 쉽게 얻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리고 궁금한 건 그걸 풀어내는 재미가 있어요.”

“세상 피곤하게 사는 놈일세.”

팔짱을 끼며 눈을 굴리던 아르드헨이 다시 테인을 바라봤다.

“마구간도 힘들다고?”

“며칠 일하다가 가시죠. 아니면 둔의 시장을 만나 빌리는 것도 괜찮고요.”

“지금 시장하고는 연줄이 없고, 둔 군부의 수장은…….”

“디온 사령관이 여전히 맡고 있습니다.”

“그 영감 아직도 살아 있어? 아이고, 질기기도 해라. 가는 길에 인사나 해볼까?”

“갔다가는 독이 든 식사에 온갖 고문을 당하실 텐데, 그래도 가시겠습니까?”

“역시 안 좋은 생각이지? 날 그리 좋아하진 않았으니까.”

디온 사령관과 사이가 안 좋은 걸까. 과거 중앙군부와 황가의 정치 구도 같은 건 잘 모르기에 한 귀로 듣고 흘려넘겼다.

“정말 궁금한 거 없어?”

집요한 시장이었다.

가하란은 창문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석의 기원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아쉽게도 그건 몰라. 우리 정보망으로도 떠다니는 돌덩어리가 뭐에 쓰는 건지, 어떻게 생겨난 건지 파악하지 못했어.”

“그라운드 제로가 일어난 정확한 원인은요?”

“그것도 협회에 정식으로 가입하고 몇 가지 절차를 거치면 알 수 있지만 지금은 어렵겠네. 엮인 문제가 많아서 말이야.”

조급한지 입술을 툭툭 건드리는 아르드헨이었다.

“그거 외에는 딱히 궁금한 게 없어요.”

줄리어스나 줄리어스가 만든 유사정령에 대해 물을 수는 없었다. 시장이 감추는 게 있듯, 가하란도 숨겨야 할 것들이 있으니까.

“그냥 제가 계산할게요.”

“얻어먹는 거 싫다니까 그러네. 그러지 말고 돈만 빌려줘.”

“시장님도 이상한 고집이 있으시네요.”

그때였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주변을 훑던 아르드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걸로 정하는 건 어때?”

아르드헨이 가리킨 곳에는 가게 구석에서 체스를 두고 있는 두 노인이 있었다.

“체스요?”

“내가 이기면 군말 없이 돈 빌려주는 거고, 네가 이기면 재미난 얘기 몇 개 더 해줄게. 근데 체스 둘 줄은 아니?”

“둘 줄은 알아요.”

“남자 대 남자로, 깔끔하게 체스 한 경기. 괜찮지?”

어디선가 들어본 멘트인데.

가하란이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아르드헨이 일어섰다. 구석에 있는 노인들에게 다가가더니 동전 몇 개를 식탁에 내려놓는다.

무슨 대화가 오가는 중인지 대충 짐작이 된다. 체스보드를 챙긴 아르드헨이 자리로 돌아왔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차용증을 써놔. 이건 내가 이길 테니까.”

“체스를 잘 두시나 봐요.”

“내가 일반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그랜드 마스터로서 이름을 날렸을걸?”

“그렇게 유리한 게임을 남자 대 남자라고 표현하는 건…….”

“게임 테이블에 앉았으면 잡소리는 금지야.”

검은색과 흰색이 교차하는 전장 위에 기물들이 우뚝 섰다.

“앞면? 뒷면?”

아르드헨이 물었다.

“백을 양보해 주시는 거 아니었어요?”

“경기는 정정당당해야지. 얼른 말해봐. 앞면? 아니면 뒷면?”

“전 앞면 할게요.”

공중으로 던져진 동전이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뒷면이었다.

“행운의 여신께서 내 승리를 응원해주고 계시는군.”

“신은 사라진 거 아니었나요?”

“창조주인 설계자만 사라진 거지, 창조주가 만들어낸 다양한 신은 여전히 존재해. 아, 이건 서비스로 알려주는 거야. 어차피 내가 이길 테니까.”

체스보드가 반 바퀴 돌았다. 아르드헨 앞으로 백색 말들이 도열했다.

“승부는 언제나 처절하지. 압도적으로 패배한다고 해서 실망하지는 마.”

기품 있는 웃음을 지으며 손짓하는 아르드헨이었다.

“네, 실망하지 않을게요.”

가하란은 느긋하게 폰을 내밀었다.

* * *

“게스트들이 주절주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지만, 이건 답이 없는 건데.”

“이쯤 되면 놓아주는 게 매너지.”

뒤에선 노인들이 한마디씩 했다.

가하란은 똑똑히 보았다. 아르드헨의 볼살이 씰룩이는걸.

아르드헨도 알고 있을 것이다. 대세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기울었고, 앞으로 세 수 후면 체크라는 걸.

침묵한 채 보드만 보던 아르드헨이 조용히 말했다.

“그놈이 너에 대해 말했을 때 체스에 관한 건 한 마디도 없었다.”

그놈?

“아니, 둘 줄 안다는 뉘앙스만 풍겼지. 그래, 그런 거였어. 그놈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망할 자식.”

아르드헨이 킹을 움켜쥐었다.

“가하란. 너 칼리고와 체스 둔 적 있지?”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양한 경험을 선사해준 사람.

당시에는 특이한 아저씨라고만 생각했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칼리고란 이름에는 일반인이 감당 못할 책임이 실려 있다는 걸.

특수감찰단 단장.

황제였던 아르드헨이 칼리고를 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칼리고에게 감투를 씌우고 권력을 쥐여준 게 황제였으니까.

말투로 봐서는 최근에도 만난 것 같다. 칼리고 역시 협회 사람인 걸까?

“네. 그때도 칼리고 아저씨가 시장님하고 똑같은 말을 했어요. 정정당당하게 사나이 대 사나이로 경기해 보자고.”

“당연히 그놈이 졌겠지.”

“음, 그건 말할 수 없어요. 약속했거든요. 승패에 관해 말하지 않기로.”

“네 웃는 얼굴만 봐도 그놈이 손도 못 쓰고 졌다는 걸 알 수 있어.”

아르드헨이 킹을 눕혀서 내려놓았다.

“이 더럽게 정직한 기풍. 내가 가장 껄끄러워 하는 선생님을 떠올리게 하네.”

졌다 졌어, 아르드헨이 입을 비죽 내밀며 패배를 선언했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재미있었다며 가하란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리고 돌아갔다.

“자! 뭐든 물어봐. 잔소리 들을 각오하고 너한테 세상의 비밀을 누설할 테니까.”

“그러면…….”

가하란은 식탁에 놓인 계산서를 들었다.

“제가 계산하게 해주세요.”

“그건 내기 조건이 아닌데.”

“이긴 사람의 말을 따르라. 누가 그러더라고요.”

가하란은 가게 주인에게 가서 루드 팩토리의 명함을 주었다. 주인과 안면이 있기에 대금은 내일 치르기로 했다.

자리로 돌아오니 아르드헨이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얼른 아무거나 물어봐. 뭐든 대답해줄 테니까.”

“내기는 제가 돈을 낸 것으로 끝났으니 괜찮아요.”

“사람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얼른 아무거나 물어봐! 어때? 제국의 뒷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아? 비밀스러운 스토아의 근황이나 사다리 정무관들의 실체, 뭐 이런 건 어때?”

“알아도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요. 그러니 됐어요.”

“젠장. 이대로 한심한 어른으로 남을 순 없어.”

인상을 팍 쓴 채 무언가를 고민하는 시장이었다. 내버려 두면 정말 세상의 비밀을 제멋대로 떠벌릴 것 같았다.

“궁금한 게 하나 있긴 해요.”

“뭔데? 뭐든 물어봐.”

“마도사 퀼비언의 행방이요. 그분을 만나 뵙고 부탁드릴 일이 있거든요.”

기대감을 갖고 말한 건 아니었다.

퀼비언과 친분이 있는 엘리조차 행적을 파악하지 못했는데,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옛 황제가 마도사의 현재 위치를 알 리가…….

“그 양반이라면 지금쯤 웨켄에 있지 않나?”

그 양반?

아르드헨이 테인을 슬쩍 보며 말했다.

“당분간 그곳에서 머물 겁니다. 처리해야 할 문제가 꽤 있다고 했으니.”

처리할 문제?

가하란은 눈을 깜빡거렸다.

“마도사가 어디 있는지 아시는 건가요?”

“대강은. 워낙 바쁜 양반이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통에 만나긴 힘들지만, 지금 웨켄에 가면 볼 수는 있을 거야.”

“어떻게 그분의 위치를…….”

“‘조합’은 ‘협회’와 협력 중이니까. 지금 퀼비언 옆에 누가 있지?”

잠시 생각하던 테인이 입을 열었다.

“데옹이 있을 겁니다.”

“맞네, 개고생 중인 우리 불쌍한 단장.”

아르드헨이 상의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가느다란 끈 하나를 꺼냈다.

“아까 준 배지 있지? 거기 보면 작은 홈이 있을 거야. 거기에 이 끈을 달아.”

아르드헨의 설명대로 배지에 끈을 달았다. 시계추처럼 좌우로 조금씩 움직이는 배지였다.

잃어버리지 말라고 끈을 단 건 아닐 테고.

“그게 나침반이 돼줄 거야.”

아르드헨이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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