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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293화 (266/558)

제293화

멀거니 아르드헨을 바라보다가 반쯤 식은 커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제대로 들었고 곡해할 여지도 없는 단순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중간에 박혀 있는 ‘외계인’이란 단어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외계인이요?”

“그래, 외계인.”

“제가 아직 모르는 게 많아서요. 그 외계인이란 게 뭔지 이해가 되질 않아요. 일단 사람을 가리키는 거겠죠?”

외계. 외부를 뜻하는 단어였다. 잘 쓰이지는 않지만 종종 도시 밖을 외계라 칭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외계인은 무엇인가?

외지인을 뜻하는 거라면 독특한 표현법이었다. 굳이 저런 식으로 말할 필요도 없고.

“사람일지 물건일지 아니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그 무엇일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어. 단지 잡다한 걸 많이 아는 어떤 사람의 추천으로 ‘외계인’이란 명칭을 사용했을 뿐이야.”

대화를 나눌수록 의문만 커졌다.

“만찬이 좋은 의미는 아닐 테니…….”

“그 또한 아직 알 수 없는 상태야. 즐거운 연회가 될 수도 있고, 달갑지 않은 만남이 될 수도 있지. 미지와의 조우. 우린 그걸 대비하고 있거든.”

“미개척지에서 무언가 오는 건가요?”

알지 못하는 곳에서 오는 존재. 가장 먼저 미개척지가 떠올랐다. 어쩌면 특이한 마수가 발견된 것일지도 모른다.

“‘계’는 좀 더 큰 개념이야.”

“크다고요?”

“정확히 표현하기가 어렵네. 부피로 설명할 수도 없고, 위치로 말할 수도 없어. 나도 알아. 뭔지도 모르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게 이상하고 웃긴다는 걸.”

아르드헨이 컵을 끌어당겨 앞에 두었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건 어디까지나 개념 이해를 돕기 위한 엉성한 설명이야. 그러니 너무 따지진 말아줘.”

검지를 튕겨 컵을 건드리는 아르드헨이었다. 맑은 소리와 함께 컵이 살짝 흔들렸다.

“이게 우리가 사는 곳이야.”

“도시를 뜻하는 건가요?”

“아니.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곳.”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곳이라면…… 정령세계나 영혼세계도 포함하는 건가요?”

“그렇지. 그 외에도 다양한 ‘층’이 있을 거야. 층이란 말을 들어 봤으려나?”

“네, 몇 번이요. 정령세계를 다른 층이라고 했어요.”

“그럼 이해하기 쉽겠네. 이 컵이 다양한 층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세계야. 이 안에 우리가 인식한 모든 게 담겨 있지.”

아르드헨이 손을 뻗었다. 컵 두 개가 나란히 놓였다.

“왼쪽에 있는 게 우리가 인식한 세계. 그러면 오른쪽에 있는 이놈은 뭘까?”

“……그게 외계라는 건가요?”

“정답.”

가하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거죠?”

“쉽게 말하면 그런 거지.”

가하란은 식당 창문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에 가려진 태양이 뿌연 빛을 내뿜고 있었다.

“혹시 별을 뜻하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아직 우리도 정확하게 파악한 건 아니야. 이건 시간과 차원의 개념일 수도 있고, 그걸 넘어선 다른 무엇일 수도 있어.”

아르드헨이 손을 뻗어 오른쪽 컵을 쥐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저 바깥쪽에, 우리처럼 사고하는 존재가 있다는 거야.”

“진지하게 말씀하시는 거죠?”

농담이길 바랐으나 아르드헨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인식 바깥의 존재.

가하란이 말을 곱씹으며 생각할 때였다.

“가하란, 너는 신을 믿는 편이냐?”

“신이요?”

“그래, 신.”

얼마 전 산카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한때는 운명이라 불렸지만, 지금은 사라진 창조주의 규율.

“위험한 발언일 수도 있지만, 저는 믿지 않아요.”

“어째서? 신의 권능은 분명 존재하잖아. 신의 힘을 받들어 기적을 행사하는 자들도 있고.”

“누가 그러더라고요. 신은 사라졌다고. 없는 걸 믿을 순 없으니 믿지 않기로 했어요. 그리고, 있다고 해도 의지하지 않을 거고요.”

“신이 사라졌다라.”

아르드헨이 빙긋 웃었다.

“그 얘기를 해준 건 산카 님인가?”

가하란은 처음으로 경각심을 느꼈다. 산카는 비밀스러운 존재였고, 심상세계에서 나눈 대화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경계의 눈초리로 대하자 아드르헨이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노려볼 필요 없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일이니까. 샬롯이 여기 와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샬롯을 아시나요?”

“알지. 한때 보호하던 입장이니까. 아니, 보호가 아니라 구속이었나? 아무튼 과거 일이니 연연하지 말자고.”

선인과 악인.

사람은 선악의 중간 어디쯤을 헤매는 게 보통일 텐데, 마주하고 있는 남자는 선악의 양극단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느낌이었다.

보호와 구속이란 단어에서 그걸 감지했다.

하긴, 이제는 사라졌다고 한들 제국의 황제였다. 둔의 하급 관료조차 부정행위를 저지르며 문제를 일으켰는데 황제라면 어땠을까.

상상하기도 힘든 일에 엮여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은연중 거부감이 들었다. 더는 대화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사람은 말이야, 모를 때 더 친절하고 편안한 법이지. 그렇지?”

아르드헨이 말했다. 가하란은 부정하지 않았다.

“난 내가 한 일을 치장하고 싶은 생각 없어. 일반적인 도덕관에 비추어 봤을 때 내가 벌인 짓들은 지탄받아 마땅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 선택을 후회하진 않아.”

잔을 들어 올리는 아르드헨이었다.

“날 존중하거나 인간적으로 대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 거야. 그런 건 필요도 없고. 내가 제안하는 관계는 어디까지나 다가올 위협을 같이 대비하는 직장 동료. 사이좋게 지내자는 건 아니야.”

“친목회라고 하지 않았나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다양한 사람들이 협회에 모여들고 있어. 개중에는 앙숙인 자들도 있고.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지는 사이지만, 그래도 협회에 몸담고 있어. 이유는 단 하나.”

말을 멈추고 살며시 웃는 아르드헨이었다.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에 가하란은 입술을 뗐다.

“다가올 미지와의 조우를 대비하기 위해.”

“그렇지.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라고 한들 결국 인간이야. 한 테두리 안에 묶이는 공통된 존재지. 하지만 외계인은 달라.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어떤 존재야. 그들이 우리에게 호의를 보인다면 더할 나위 없기 좋겠지만, 잉크보다 피를 좋아한다면…….”

아르드헨이 왼쪽 컵을 툭 밀었다. 좌우로 흔들거리던 컵이 무력하게 쓰러졌다.

“우리는 우리가 인식한 모든 걸 잃게 되겠지.”

“그런 중차대한 문제라면 공론화하는 게 낫지 않나요? 다수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데.”

옛 황제가 말한 것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가정했을 때, 이건 개인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네 말도 옳아. 많은 사람이 돕는다면 수월해질지도 모르지. 예전의 나였다면 네 말대로 공론화했을 거야.”

아르드헨이 손깍지를 끼고 다리를 꼬았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내 상식이 깨져버렸어. 다수를 압도하는 소수가 존재할 수 있고, 그 소수 중에서도 몇몇은 운명이란 놈도 바꿔 버린다는 걸.”

“운명을 바꿔요?”

“협회에 들어와서 협조하다 보면 차차 알게 될 일이야. 아마 처음 듣게 되면 헛웃음만 나올걸?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근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그놈이 해냈어.”

아르드헨이 검지를 폈다.

“또 하나. 머릿수가 많아지면 잡음이 생겨. 아까도 말했지만 협회는 끈끈한 정 같은 걸로 유지되는 게 아니야. 뛰어난 인재들이 하나의 목적성을 띠고 모인 거지. 사람이 많아지면 그 목적성 자체에 흠집이 갈 수도 있어. 그러니 검증된 소수로 운명을 바꿀 만한 준비를 해나가는 게 편하지.”

충분히 납득 가는 이유였다. 사람이 많아지면 혼란에 빠지고, 난잡해진 집단은 와해하기 마련이니까.

“지금까지 하신 말씀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사실이야. 진실이기도 하고.”

“네, 그렇다 치고. 한 가지 의문점이 드네요.”

질문을 내뱉기도 전에 아르드헨이 말했다.

“어째서 널 찾아왔느냐, 그리고 누가 널 추천했느냐. 이거겠지?”

“네. 시장님께서 말씀하신 그 협회는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 모여 있겠죠.”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윤활유 역할을 하는 사람들도 몇 있으니까. 어쩌면 나도 그중 하나일 수도 있고.”

제국의 황제였던 사람이 대단한 게 아니면 대체 무엇이 대단한 걸까?

사소한 의문이 들었으나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 네 재능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 그 나이에 둔 학회에서 주목을 받았고, 루드 팩토리에서 제작된 물건들은 하나 같이 고품질이었으니까. 거기에 거병 모듈 제작에도 관여했으니 말 다 했지.”

“저는 회로 설계만 했을 뿐 제작은 공장 쪽 장인들이 맡아 주셨어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청사진은 중요한 법이야. 설계도가 없으면 나올 수 없는 것들이니까.”

“더더욱 의문이 드네요. 그런 기준이라면 저 말고도 더 훌륭한 분들이 계실 텐데요.”

“물론 현시점에서 추천이 없었다면 널 만나러 오지는 않았겠지. 네 말대로 둔에는 뛰어난 지식인들이 많으니까.”

추천. 가하란은 머리를 굴려봤다. 황제와 연이 있으면서 동시에 나를 아는 사람.

민 교수가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그녀는 지난 5년간 틈새를 헤매고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증조부께서 저에 대해 말씀하신 건가요?”

“증조부?”

모르는 눈치였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뭐, 증조부에 대한 건 나중에 내가 알아보기로 하고. 일단 널 추천한 사람은 눈이 아주 아름다운 여자야.”

눈이 아름다운 여자?

짚이는 게 하나도 없었다.

“너도 만나서 기억하고 있을 텐데. 초록빛 눈이 아주 아름다운 분을 말이야.”

구체적인 설명을 듣는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산카와 대화할 때도 언급된 이름이었다.

“주술사님도 그 협회란 곳에 계신 건가요?”

“가담한 건 아니지만, 선이 닿아 있기는 해. 더는 보이지 않는 미래를 알기 위해 그분도 개인적으로 노력 중이거든.”

더는 보이지 않는 미래.

산카가 말했던 ‘한때는 존재했던 운명’과 맞닿은 문장이었다.

신은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운명 역시 증발했다.

그 말인즉.

“확정된 미래가 없어진 건가요?”

말하자마자 아르드헨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사고가 유연하네. 결론을 도출하는 것도 빠르고. 네가 말한 대로 우리는 이제 진실된 의미로 앞날을 알 수 없게 됐어. 그렇기에 더욱 준비를 해야 하지.”

아르드헨이 배지를 앞으로 밀었다. 가하란은 코앞으로 온 배지를 바라봤다.

배지에 새겨진 눈 모양이 강렬한 인상이 되어 뇌리에 남았다.

“그건 받아둬.”

“저는 아직…….”

“원치 않으면 버려도 돼. 강제성이 있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버리기 어려워져요.”

“내가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부려먹었지.”

가하란은 배지를 잡았다.

뭐가 뭔지, 정확히 이해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원치 않으면 참가하지 않아도 되는 거죠?”

“정 싫으면 회비라도 내든가.”

“회비도 있어요?”

그때였다. 옆에서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테인이 말했다.

“그런 건 없습니다.”

아르드헨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 얘기는 이걸로 끝. 자세한 건 나중에 찾아올 말 많은 설명꾼한테 들어. 듣고 싶다면 말이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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