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92화 (265/558)

제292화

아르드헨.

흔한 이름은 아니었다.

가하란은 아르드헨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덴스 교수. 유능한 사람이었지.”

손을 놓은 아르드헨이 인파가 몰린 곳을 보며 말했다.

“예. 유능한 분이셨죠.”

“이렇게까지 잘해낼 줄 알았다면 좀 더 가까이 두는 거였는데 말이야. 사람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가까이 둔다. 그 말이 내포한 의미에 가하란은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아저씨가 말이야, 옛날에 잘나가던 사람이었거든. 지금은 볼품없지만.”

아르드헨이 엄지로 타챠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일단 자리를 바꿀까?”

걸음을 떼는 아르드헨을 향해 질문했다.

“자리를 옮기기 전에 무슨 일로 절 찾아오신 건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얘기이긴 한데, 서서 하고 싶지는 않아. 잡아먹거나 납치할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하고 따라와.”

휘적휘적 걸어가는 아르드헨 옆으로 검집을 찬 남자가 따라붙었다.

가하란은 멀리 서 있는 타챠를 바라봤다. 타챠와 함께 온 사람이니 일단 따라가 볼까?

“오랜만이다, 작은 전사 아이야.”

“네,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타챠가 깃대로 땅을 가볍게 찍었다.

“그럭저럭.”

멀찌감치 떨어진 아르드헨이 얼른 오라며 손짓했다.

“저 사람은 누군가요?”

“욕심이 많은 인간. 가까이 두고 싶지 않은 인간.”

“평가가 아주 안 좋네요.”

“내 기준에서는 그렇다는 거다. 하지만 위대한 전사가 아끼는 인간이니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겠지.”

“위대한 전사요?”

누구를 말하는 걸까.

타챠가 성큼성큼 걸어가 검집을 찬 남자 옆에 섰다.

“만나게 해줬으니 약속을 지켜라.”

“성급하기도 해라. 다른 타린족들은 여유가 넘치던데, 그쪽은 너무 서두르는 경향이 있어.”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다. 내가 직접 저 검에 대고 물어보면 될 뿐이니까.”

타챠가 검을 찬 사내를 노려봤다. 아르드헨이 두 손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렸다.

“알겠으니까 살기 좀 거둬. 약속한 건 지킬 테니까 일단 장소를 바꾸자고. 설마 시내 한복판에서, 장례식이 한창인 이곳에서 난동 부릴 생각은 아니겠지?”

“필요하다면.”

“갑갑한 양반 같으니라고. 테인, 저 성난 도마뱀 씨의 소원부터 들어줘야겠다.”

저 남자의 이름이 ‘테인’이구나.

나란히 서서 도시 외곽을 향해 걷는 타챠와 테인이었다.

가하란은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타챠 아저씨의 거래 품목이 저였나 보네요.”

“거래까지는 아니고, 막무가내인 도마뱀 씨를 달래려고 수를 짜낸 거지. 안 그랬으면 우리를 붙잡고 종일 귀찮게 굴었을 테니까.”

“어떤 약속을 하신 건가요?”

“별거 없어. 그냥 한바탕 싸우는 거니까.”

“싸워요?”

아르드헨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도시 바깥이었다.

길게 드리운 도시 방벽 밖, 타챠와 테인이 마주 보고 섰다. 아르드헨은 여기가 특등석이라며 나무 그늘에서 손짓했다.

“근데 너 말이야. 아르드헨과 테인, 이 이름을 듣고도 뭔가 떠오르는 게 없어?”

“글쎄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아니, 이게 현실인가? 정말 개 밥그릇보다 못한 이름이 됐네.”

길게 한숨을 내뿜는 아르드헨이었다. 아르드헨, 아르드헨. 이름을 몇 번이나 입 안에서 굴려봤다.

뭔가 떠오를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슬쩍 아르드헨의 얼굴을 봤다. 기대감에 차 있었다. 정말 모르겠다고 말하면 눈물 한 방울을 찔끔 흘려보낼 것 같았다.

“아! 같은 이름을 한 명 알고 있어요. 세상이 바뀌고 난 뒤에는 언급된 적이 없어서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

영주들이 한 지역의 시장이 되기 전, 모든 영주들을 다스리던 옛 제국의 황제.

이제는 퇴색된 옛 황제의 이름이 분명 아르드헨이었다.

“황제와 이름이 같으시네요.”

“맞아, 똑같지.”

아르드헨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입가에는 장난기가 어려 있지만, 먼 곳을 바라보는 눈은 복잡해 보였다.

그 눈을 보는 순간,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겠지?

“혹시…….”

입을 열 때였다.

콰아앙!

귀를 멍하게 만드는 폭발음이 전방에서 터져 나왔다. 가하란은 놀라서 양팔을 들어 올려 앞을 막았다.

먼지바람이 훅 끼쳐왔다. 눈이 따끔거렸다. 실눈을 뜨며 앞을 바라봤지만, 피어오른 먼지 때문에 구별되는 건 없었다.

고개를 틀어 옆을 보았다.

아르드헨은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먼지의 벽 너머를 보고 있었다.

연이은 굉음이 저 너머로부터 퍼져 나왔다.

거병제철소 한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었다. 쇠를 두드리는 거대한 망치가 저 앞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둘 다 신났네.”

아르드헨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먼지구름이 서서히 걷혔다.

가하란은 손등으로 눈가를 닦아내며 앞을 보았다.

깃발을 뗀 창을 들고 날아오르는 타챠가 보였다. 맞은편에는 얇은 검을 든 테인이 있었다.

창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막아낼 수 없는 위용이 느껴졌다. 경로에 놓인 모든 걸 양단할, 아니, 바스러트릴 창이었다.

거구의 전사가 내리친 일격.

인간이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가하란은 반사적으로 “아저씨”를 외쳤다. 살해 현장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발끝에서부터 솟아올랐다.

하지만.

카앙!

얇은 검신이 창대를 막아냈다. 아니, 흘려보냈다. 검신을 타고 비스듬히 내려온 창이 지면을 강타했다.

땅이 푹 파이며 다시금 먼지가 치솟았다.

잠깐의 경직을 테인은 놓치지 않았다. 오른손에 쥔 검이 군더더기 없는 직선을 그리며 나아갔다.

활짝 열린 타챠의 가슴이 그대로 검에 꿰뚫리기 직전, 땅에 처박혀 있던 창대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들렸다.

가하란은 자신의 팔이 뒤틀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인간이 저런 움직임을 보였다면 근육이 파열되는 건 물론, 어깨뼈가 빠졌을 것이다.

검이 위로 튕겨 나갔다.

수비의 공백이 생겼다. 타챠의 왼손이 빈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테인의 턱에 육중한 손이 닿기 직전, 테인의 몸에서 강렬한 마나 파장이 뿜어져 나왔다.

진격하던 타챠의 손이 우뚝 멈췄다.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위대한 전사에게 배웠다면 이 정도는 해야겠지!”

타챠는 더없이 즐겁다는 듯 외쳤다.

동시에 타챠의 몸에서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산신’을 부르짖는 타챠였다.

마나 파장과는 다른, 정령세계에서 느꼈던 아찔한 감각이 몸을 쓸고 지나갔다.

가하란은 깨달았다. 먼지가 휘날리고 폭음이 나던 방금 전 싸움은 전초전에 불과했다는 걸.

붉은 기운이 타챠의 온몸을 뒤덮었다. 마주 선 테인도 긴장한 얼굴로 검을 고쳐 쥐었다.

격돌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그때였다.

돌멩이 하나가 휙 날아가 둘 사이에 떨어졌다. 한 개, 두 개, 세 개.

하품을 찍 내뱉으며 돌을 던진 아르드헨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밥이나 먹읍시다. 테인, 거기까지 해. 도마뱀 씨도 그만하고.”

절묘하게 맥을 끊었다.

지글지글 끓던 붉은 기운이 서서히 흩어졌다. 테인 몸에서 연이어 흘러나오던 마나 파장도 자취를 감췄다.

“그래, 밥은 중요하지.”

타챠가 깃발을 주워 창대에 맸다. 테인도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무지막지하네요.”

뒤늦은 전율이 몸을 흔들었다. 가하란은 팔뚝을 매만졌다. 오돌오돌 살이 일어나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거병을 동원한다면 저 둘을 저지할 수 있었을까?

“타챠 아저씨는 그렇다 쳐도, 저분은 어떻게 그런 움직임을…….”

타챠의 저돌적인 공격도 인상적이지만, 테인의 매끄러운 반격 역시 놀라웠다.

“뭐야, 너도 봤어?”

“네?”

“방금 그 공방.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 본 거야?”

“네, 봤죠.”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못 보는 게 더 이상하다.

“내 말의 의미는 그걸 ‘제대로’ 봤냐는 거야. 정말로 눈에 보였어?”

연이은 질문에 가하란은 직접 몸으로 보여줬다. 엉성하기 그지없는 동작이지만.

타챠가 이런 식으로 공격하고, 테인이 이렇게 반격하고.

지켜보던 아르드헨이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너는 다른 쪽으로도 재능이 있는 것 같네. 기술직으로 추천받았지만 어쩌면…….”

아르드헨이 말끝을 흐렸다. 타챠와 테인이 다가온 것이다.

“밥값은 네가 내는 거겠지?”

“물론이지. 그 정도 돈은 있어.”

호기롭게 대답하는 아르드헨이었다.

* * *

“저 도마뱀은 적당히라는 걸 모르나?”

아르드헨이 넋 나간 얼굴로 건너편 테이블을 바라봤다. 가하란은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타챠의 먹성을 알고 있었기에, 이런 결말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눈치 볼 것 없이 가져와도 된다. 계산은 저쪽에서 다 할 테니까.”

타챠가 기름기 잔뜩 묻은 손으로 아르드헨을 가리켰다.

“테인, 돈 남은 거 있지?”

“있기야 하죠. 단지, 계산을 마치고 나면 시장님 숙소가 마구간으로 바뀔 겁니다.”

“내가 그렇게까지 가난하진 않은데.”

“아직까진 본토와 이곳 은행이 연동되지 않으니까요.”

테인이 주머니 하나를 툭 내놓았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게 저희가 가진 전재산입니다.”

주머니 안을 확인한 아르드헨이 타챠를 향해 외쳤다.

“작작 먹어! 이 도마뱀 새끼야!”

물론 타챠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싹하게 구워낸 돼지 뒷다리를 한입에 집어삼켰다.

“저기, 정말로 황제 폐하가 맞으신가요?”

가하란은 묻어뒀던 질문을 다시 꺼내 들었다.

“요즘 시대에 황제를 사칭해서 좋은 게 하나라도 있으면 말해줘.”

“없죠, 단 하나도.”

그라운드 제로가 황제의 비밀스러운 연구 때문이라고 설파하는 자들이 꽤 많았다.

음모론을 차치하고도 황제를 달가워할 인간은 몇 없을 것이다.

귀족은 귀족대로, 시민은 시민대로 불만이 있었으니까.

지금이야 다 지나간 옛일이 됐다지만, 앙금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도 황제란 이름을 버린 지 오래야. 구닥다리거든. 냄새나고.”

자신을 황제였다고 칭하는 남자.

희한하게도 믿음이 생긴다.

가하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물었다.

“이제 말씀해 주시죠. 시장님께서 절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인지.”

“빙빙 돌려 말하는 건 득 될 게 없으니…….”

아르드헨이 앞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겼다. 덥수룩한 머리에 살짝 가려져 있던 눈이 훤히 드러났다.

“널 스카우트하려고 왔어. 추천을 받았거든.”

이런 제안은 수도 없이 받아왔다. 루드 팩토리를 인수하겠다는 곳도 있었고, 주요 연구원을 전부 데려가고 싶다는 곳도 있었다.

능력을 인정해주는 거니 제안을 받을 때마다 고맙지만, 승낙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저도 빙빙 돌려 말하는 건 싫으니 바로 대답할게요. 죄송해요. 거절하겠습니다.”

“내용도 안 듣고?”

“예. 전 루드 팩토리에 계속 있고 싶어요.”

아르드헨이 팔짱을 꼈다.

“그런 거라면 상관없어. 너 하고 싶은 거 계속해도 돼.”

“네?”

“스카우트라고 해서 뭐 대단한 건 아니야. 단지 능력 있는 자들을 포섭해두는 거지. 지금 당장은 친목회, 이 정도 느낌이려나?”

아르드헨이 품에 손을 넣었다.

손가락 끝에 들려 나온 건 자그마한 배지였다.

가늘게 뜬 눈을 닮은 배지.

“언젠가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외계인’들을 위해 같이 만찬을 준비해보지 않을래?”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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