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0화
눈꺼풀을 두드리는 햇살에 슬그머니 눈을 떴다. 밀레나는 멀거니 창가를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희뿌옇던 머릿속이 차츰 정리됐다. 가하란을 데려와 민 교수와 만났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듣다가…….
“근데 이 사람은 왜 여기에.”
침대 밑에서 불쌍하게 웅크리고 있는 엘리를 발견했다. 여전히 술병을 껴안고 있었다.
기억을 더듬었다. 가하란과 민 교수가 대화를 이어가는 사이, 눈앞에 놓인 술을 아무 생각 없이 마셨다.
난해한 말을 안주 삼아 마셔서 그런가, 술이 유달리 달았다. 그렇게 연거푸 마시다가 취기가 올라왔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가하란과 민 교수는 할 얘기가 남은 것 같았으니까.
엘리를 옆방에 던져 놓은 것까지는 기억났다. 그런데 왜 내 방에서 이러고 있는 거지?
“추, 추워요.”
엘리가 중얼거렸다. 초여름이지만 이불 하나 없이 바닥에서 뒹굴었으니 춥긴 하겠지.
“일어나요. 아침이에요.”
엘리를 흔들었다. 불에 덴 것처럼 놀라며 눈을 뜬 엘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가 왜 여기 있죠?”
“그건 제가 할 소리죠. 언제 들어온 거예요?”
“아닌데요. 난 침대에 누워서 잤어요.”
밀레나는 살짝 웃었다.
“기억 안 나면 됐어요. 어제 잔뜩 취해서 기억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기도 하고. 그보다 몸은 괜찮아요? 종일 바닥에서 잤으면 배겼을 텐데.”
“두 달간 노숙했더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툭툭 털며 일어서던 엘리가 골반에 손을 올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근데 기억이 하나도 안 나나 봐요”
“뭐가요?”
“어제 저한테 말 놓으셨잖아요.”
“아, 내가 그랬어요?”
“네.”
머쓱하게 웃던 엘리가 목덜미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럼 기왕 이렇게 된 거 편하게 할까?”
“마음대로 해요. 저 그런 거 잘 안 따지니까.”
“역시!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들었다니까.”
가까이 다가와 어깨에 팔을 거는 엘리였다.
“친해진 기념으로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얼마든지!”
“도깨비와 표리영역, 이거에 대해 자세히 알려줄 수 있어요?”
살갑게 웃던 엘리가 슬그머니 팔을 뺐다. 뒤로 한 걸음 물러선 다음 입을 열었다.
“그건 곤란해요.”
장난기 어린 얼굴로 말을 높이는 엘리였다.
“어제 주절주절 말했으면서.”
“내가? 내가 말했다고? 정말로?”
“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가하란한테 얘기하던데요? 가하란도 아는 것 같았고.”
“내가? 그럴 리…….”
엘리가 눈을 잔뜩 찌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 하는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었네. 근데 괜찮아. 관계자니까.”
“저도 이제 반쯤 연관이 있는 거 같은데.”
“그렇긴 하지. 뭐, 딱히 숨겨야 할 것도 아니긴 한데, 알아봤자 좋을 거 없기도 해.”
“위험한 건가요?”
“위험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평범한 사람은 일평생 그것들과 마주치지 않거든. 재수 없게 만나게 된다면…….”
밀레나는 지난번 대화를 떠올리며 말했다.
“‘귀신 들리다, 도깨비에게 속아 넘어가다.’ 그렇게 사라지게 되나요?”
“기억하고 있네. 만나게 되면 높은 확률로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될 거야. 그건 죽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고, 영원한 실종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어.”
죽음과 영원한 실종.
다르지만 결국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도깨비를 볼 수 있어요?”
“작정하고 만나려면 만날 수야 있지. 표리영역 안으로 들어가면 서로 인식할 수 있게 되니까.”
“도깨비. 귀엽게 생겼나요? 축제 때 본 인형들은 귀엽게 생겼던데.”
“도깨비는 제멋대로 생겼어. 징그럽게 생긴 애, 밋밋하게 생긴 애, 수시로 변하는 애.”
“신기하네요.”
모습을 바꾸는 생물이라.
“근데 듣다 보니까 마수랑 비슷하네요? 정형화된 모습이 없고 인간에게 해가 되고.”
“그렇게 볼 수도 있지. 틈새에 사는 마수. 이런 식으로도 표현 가능하니까.”
도깨비란 단어를 마수로 대체하니 경계심과 함께 혐오감이 들었다.
결국 박멸해야 하는 대상이란 건가?
속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엘리가 말했다.
“모든 도깨비가 위험한 건 아니야. 개중에는 장난만 치는 애들도 있어. ‘무형’으로 분류된 애들인데 구전동화로 퍼진 도깨비의 원류야. 친숙한 느낌이지.”
“그렇군요.”
“물론 장난이라고 해도 당하는 사람에 따라 위험할 수도 있지만.”
설명하던 엘리가 코를 킁킁거렸다.
“맛있는 냄새 나지 않아?”
구수한 냄새였다. 볶은 옥수수에서 나는 달면서도 고소한 냄새.
“배고파. 일단 내려가자.”
듣고 싶은 얘기가 더 있었지만, 밀레나도 배가 고팠기에 군말 없이 따라갔다.
“밀레나. 네가 데려온 애 솜씨가 좋더라?”
1층으로 내려가자마자 들은 말이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아저씨들이 히죽 웃으며 주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밀레나는 빵을 뜯고 있는 하우스에게 다가갔다.
“삼촌, 다들 왜 이래요?”
“왜 그러겠어?”
하우스가 턱으로 주방을 가리켰다.
“가봐.”
설마, 밀레나는 서둘러 주방으로 갔다. 여관 주인과 나란히 서서 음식을 만들고 있는 가하란이 보였다.
언제 친해진 건지, 여관 주인과 잡담을 주고받으며 스튜를 푸고 있었다.
“뭐 해?”
“뭐 하긴. 아침 만드는 중이지. 이것도 받아 가세요!”
가하란이 큼지막한 냄비를 밖에 내놓았다. 안을 보니 잘게 찢은 돼지고기가 들어 있었다.
“누가 시켰어?”
밀레나는 우르르 밀려든 용병들 옆을 지나 가하란 앞으로 갔다.
“아니, 내가 돕겠다고 했어.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거든.”
“요리하면서 그게 돼?”
“되더라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 훨씬 나아.”
용병들이 돼지고기를 푸며 가하란에게 한마디씩 던졌다. 아저씨들하고는 또 언제 가까워진 거야?
밀레나는 가하란을 향해 손짓했다. 왁자지껄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전쟁 통 같은 건물을 빠져나와 밖으로 나왔다.
“아침 안 먹었잖아?”
“이따가 먹으면 돼. 그보다 너 어제 집에 간 거 아니었어?”
“교수님하고 얘기가 길어져서. 새벽까지 대화하다가 그냥 여기서 잤어.”
“어디서? 빈방은 없었을 텐데.”
“테이블 붙여놓고 그 위에서 잤어. 이불은 교수님이 가져다줬고.”
“말을 하지. 날 깨웠으면 자리 내줬을 텐데.”
“괜찮아. 평소에 의자에서 자던 거 생각하면 정말 편하게 잤어.”
태평한 대답에 괜히 미소가 나왔다.
“자, 이거라도 마시면서 오붓하게 얘기해.”
문을 열고 불쑥 나온 엘리가 머그잔 두 개를 내밀었다. 안에는 걸쭉한 수프가 담겨 있었다. 고소한 냄새는 여기서 나는 거였구나.
엘리가 문을 닫고 들어갔다.
“무슨 얘기를 해야 오붓하게 얘기하는 걸까?”
가하란이 웃으면서 물었다.
“몰라. 그보다 어제 민 교수님하고는 얘기 다 끝난 거야?”
“어느 정도는.”
“특무대령님 얘기도 나오던데, 해결할 수 있어?”
“지금 당장은 어려울 거 같아. 그래도 해봐야지.”
가하란이 잔에 대고 후, 바람을 불었다. 밀레나도 잔을 기울여 수프를 마셨다. 냄새만큼이나 진한 맛이 올라온다.
“사실 많이 복잡해. 해결된 것들도 있지만, 해결된 것처럼 보였던 게 더 큰 문제를 끌어오기도 했고.”
“더 큰 문제라니?”
가하란을 옭아매던 문제는 이미 해결된 게 아니었나?
“음, 누나한테 말하면 편해질 것 같긴 한데…… 지금은 얘기할 수가 없어.”
“무슨 문젠데?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사양하지 말고 말해. 나 요즘 시간 많아.”
“말만으로도 정말 고마워. 근데, 이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해. 마무리를 짓든, 무시를 하든 내가 결정해야 해.”
흐린 하늘색 눈동자만큼이나 우울한 빛이 가하란 얼굴에 깃들었다.
한동안 말없이 수프만 마셨다.
“저기, 누나.”
“응?”
“만약에 누나와 가까운 사람이 죄를 저질렀다면…… 누나는 어떻게 할 거야?”
“죄?”
이게 가하란이 고민하는 이유인가.
“죄질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눈감아 줄 수 있는 가벼운 죄라면, 난 한 번은 덮어줄 거 같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면?”
“답은 정해져 있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자수를 권해야 해. 법정에 세우고 적법한 절차를 밟아 정당한 대가를 치러야지. 아, 근데 요즘에는 이동판사들을 만나기 힘들지. 몇이나 살아 있으려나?”
제국 시절 법의 심판관이었던 이동판사들은 그라운드 제로 이후 자취를 감췄다.
“아무튼 죄를 저질렀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자명한 규율을 지켜야겠지.”
“이성적이 아닌 감정적인 대답은?”
“그 사람이 나와 얼마나 가까우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상상하기도 싫지만, 만약 내 가족이 끔찍한 죄를 저질렀을 때 나는 냉정하게 법을 수호할 수 있을까? 나라면…….”
밀레나는 찌꺼기만 남은 잔을 내려다봤다.
“도망치진 않고 용서해 달라고 빌었을 거 같아. 추악한 짓이라는 걸 알지만, 내 가족을 한 번만 살려달라고 빌고 또 빌었을 거야. 그럼에도 용서받지 못한다면, 그땐 놓아 줘야겠지.”
밀레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어쩌면 이마저도 거짓말일 수 있어.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도망치도록 돕고, 숨겨줄지도 몰라. 타인의 아픔을 무시하고 내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거지.”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법과 규범은 감정에 좌지우지되라고 탄생한 것이 아니니까.
알면서도 그릇된 생각을 품게 되는 것이 사람인 걸까.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가하란을 바라봤다.
“모르겠어. 하지만 방치할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해. 결정을 내리게 되면 여러 사람이 다치게 될 거야. 그중에 몇몇은 날 미워하게 되겠지.”
“적당히 미움받는 것도 나쁘진 않아. 모두에게 사랑받는 건 좀 끔찍하잖아? 신도 아니고. 아니, 신조차 미움받는 세상이네.”
밀레나는 가하란 곁으로 슬쩍 한 걸음 다가섰다.
“무슨 결정을 하든, 네가 옳다고 믿는 일을 해. 그러다 지치면 내가 푸념을 들어줄게.”
“고마워, 누나.”
“뭘 이 정도 가지고.”
얘기하던 도중 옅은 그림자가 스멀스멀 건물을 훑으며 지나갔다.
밀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석이었다.
“저러다 진짜 떨어지는 거 아니야? 점점 낮아지는 거 같은데.”
“요즘 제멋대로 움직이는 거 같아. 고도도 평상시보다 낮거나 안 보일 정도로 높아지기도 하고.”
“떨어질 거면 부디 사람 없는 곳에 떨어지길.”
하늘석을 따라 시선을 옮길 때였다.
가게 앞을 지나가던 기계인형이 비틀거리더니 레일 옆으로 쓰러졌다.
인형이 등에 이고 있던 물건들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인형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고철덩이가 진짜.”
자빠진 기계인형은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일어서지 못했다. 단순 회로로 제작된 인형은 넘어지면 못 일어난다더니.
그때였다. 허우적거리던 인형이 벌떡 일어서더니 깔끔한 동작으로 물건을 줍기 시작했다.
남자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기계를 바라봤다.
“뭐야, 하면 할 수 있잖아.”
등짐을 진 기계인형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기계인형은 다시 쓰러졌다.
이번에는 일어서지 못했다.
우연이었던 걸까?
대수롭지 않게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옆에 있던 가하란이 눈을 질끈 감으며 비틀거렸다.
“왜 그래?”
걱정돼 물었다. 가하란은 목을 주무르며 대답했다.
“갑자기 어지러워서.”
“빈혈 있는 거 아니야?”
“그런가.”
“들어가 앉아 있어. 그럴 땐 괜히 움직이지 말고 쉬는 게 최고야.”
가하란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기 전 다시금 하늘석을 바라봤다.
둔 시내를 가로지른 하늘석은 저 멀리 산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밀레나! 얘기 다 끝났으면 같이 먹어!”
“네, 그래요.”
엘리의 부름에 밀레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