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89화 (262/558)

제289화

“스파우의 해보다 둔의 해가 더 빨리 지는 거 같아요.”

어느새 땅거미가 숲을 집어삼켰다. 에단은 어둑해진 전경을 훑으며 걸음을 뗐다.

“아저씨. 아까 그거, 정말 내버려 둘 생각이에요?”

“몇 번을 물어도 대답은 똑같다. 그놈이 침범해 오지 않는 이상 내가 나설 일은 없을 거다.”

“위에서 요청이 들어와도요? 다른 사람들이 부탁해도요?”

“인간의 문제는 인간이 해결하면 된다. 산의 문제는 산의 자식이 해결하듯.”

한결같은 대답이었다.

매정하다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종족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모든 게 다르니 판단 근거도 다를 수밖에.

아저씨는 패배를 알기 위해 고행길에 오른 전사였다. 패배를 배우기 위해 전쟁터를 찾고, 대전사를 지명해 전투를 벌이는 무승.

“그 마수도 아저씨 기준에서는 대전사가 될 수 있나요?”

“그놈이 바란다면.”

아저씨 기준에서 인간이나 마수나 별반 다를 바 없는 생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람들이 위험에 빠지면, 아니, 샬롯이 위험에 처하면 구해주실 거죠?”

“그 말괄량이를 내가 돌볼 필요가 있을까? 신성한 바람께서 항상 곁에 계실 텐데.”

“세상에는 만약이란 게 있잖아요. 요즘 산카 님이 자리를 비울 때도 종종 있고. 아저씨도 ‘정’은 안다면서요?”

“안다. 내가 인정한 자들에게는 무한한 존경과 우애를 품지. 그 말광량이는 본받을 구석도, 전사로서의 쓸모도 없지만…… 내 손에 여유가 있다면 챙기긴 하겠지.”

“그거면 됐어요.”

대화를 마친 에단은 품에서 조사서를 꺼냈다. 빠르게 휘갈겨 쓴 글씨가 눈을 찔렀다.

생각하고 소통하는 마수.

도시 사람들은 이 이질적인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앞날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다오가 날개를 활짝 펴며 내려 어깨에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야?”

숲을 빠져나가기 전까지 하늘에 있어야 할 친구가 갑자기 돌아왔다.

이변을 감지한 것이다. 다오가 부리를 치켜들었다. 동쪽이었다. 다오의 눈으로 본 흐릿한 풍경이 머릿속으로 전해졌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 둘이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문제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웅크리고 있는 마수 두 마리였다.

“정신 나간 여행객이 있는데요?”

타챠를 보며 말했다.

해가 자취를 감춘 시간에 마수들이 어슬렁거리는 숲에 들오다니.

흐릿해서 정확히 판별할 수는 없지만, 중무장한 상태가 아니었다. 근처에 거병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알아서 하겠지.”

타챠는 가던 길을 갔다. 멀어져 가는 타챠의 등을 보며 에단은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가세요.”

“넌 뭐 하게?”

“가서 방향이라도 제대로 알려 주려고요. 둔으로 가려면 이쪽으로 가야 한다고.”

손을 들어 도시가 있는 곳을 쓱 가리켰다.

“마음대로 해라. 난 배가 고프니 먼저 간다.”

“예에, 그러세요.”

다오를 앞세운 뒤 뛰었다. 질척거리는 땅을 차며 귀를 활짝 열었다.

다오가 날개를 접으며 왼쪽으로 꺾었다. 에단은 속도를 줄이며 근처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머리맡에서 맴돌던 다오가 하늘로 치솟았다.

저긴가?

기척을 숨기며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평하게 걷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체격으로 보아하니 남자였다.

하늘을 살폈다. 다오가 날개를 곧게 펴며 고도를 낮췄다. 같은 장소에서 원을 그리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 밑에 마수가 있는 것 같았다.

주변에 다른 위험은 없는 것 같고, 에단은 안도하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두 남자를 향해 딱 두 걸음 다가갔을 때였다.

왼쪽에 서 있는 남자가 뒤를 돌아봤다.

에단은 움찔했다. 족히 15미터는 떨어져 있었다. 수풀에 가려져 잘 안 보일 텐데, 저 멀리 서 있는 남자는 이쪽이 훤히 보인다는 듯이 응시했다.

놀란 것도 잠시, 에단은 양손을 들어 올리며 공격 의사가 없음을 표시했다.

좋은 일 하려는 건데 이런 취급 받는 건 좀 섭섭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다가갔다. 은은한 마법등에 의지해 나아가던 두 남자도 에단을 향해 걸어왔다.

“이런 시간에 숲을 탐험하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

오른쪽에 있는 남자가 말했다.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 쓰고 있어서 너저분한 수염만 보인다.

“그건 제가 할 소리죠. 이 시간에 랍파도 없이 이런 곳을 어슬렁거리다니.”

에단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저 앞에 몬스터가 있다는 건 알고 계시죠?”

“그랬어? 나는 몰랐는데.”

넉살 좋게 말하는 남자였다.

“아무튼 두 분 다 운 좋은 줄 아세요. 제가 봐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두 사람 다 저녁밥으로 변했을 테니까.”

“하하, 그래? 내가 운이 좋긴 하지.”

다오가 내려왔다. 수고한 파트너의 턱 밑을 긁어준 후 말했다.

“따라와요.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목적지는 둔이죠?”

“맞아. 둔으로 가는 길이었어. 근데 이쪽으로 쭉 가면 되는 거 아니야?”

“반대예요. 거기로 가면 예전에도 미개척지였던 곳이 나와요. 거긴 진짜 지옥이고요.”

“지옥이라. 끔찍한 곳에 갈 뻔했군.”

그러자 왼쪽에 서 있는 남자가 말했다.

“다음부터는 제 말을 들어주시죠.”

“어쩌다 한번 실수했을 뿐이야. 난 길치가 아니라고.”

“벌써 세 번째입니다.”

“그랬던가?”

유쾌하게 웃는 오른쪽 남자였다.

계약 관계인 건가? 왼쪽 남자가 용병, 오른쪽 남자가 고용주일 것이다.

“근데 그거 아시죠? 숙련된 랍파일수록 일당이 비싸다는 걸.”

“선의로 구해준 거 아니었어?”

“선의죠. 단지 약간의 수고료가 따를 뿐이에요. 목숨값치고는 정말 싼 가격이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설마…… 한 푼도 없는 건 아니죠?”

“돈이야 어느 정도 있지. 근데 목숨값이라. 날강도를 만난 기분인데?”

“쩨쩨하게 굴지 마세요. 제 친구 간식비라도 벌려면 어쩔 수 없으니까.”

간식이라는 말에 다오가 작게 울었다.

“간식은 중요하지.”

오른쪽 남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주변에 위험 요소는 없는 거 같고, 에단이 앞장서며 걸음을 뗄 때였다.

다오가 먼저 날아올랐고, 뒤이어 에단이 눈치챘다. 빠르게 거리를 좁혀오는 정체 모를 대상이 있었다.

신경을 사납게 두드리는 불쾌한 감각.

에단은 뒤따라오는 두 사람을 향해 속삭였다.

“숙여요.”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대피로를 확보하기 전까지 최대한 몸을 숨겨야 했다.

날아오른 다오를 바라볼 때였다. 익숙한 소리가 났다. 에단은 시선을 내렸다.

왼쪽 남자가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숙이라는 말을 못 들은 건가?

“저기요!”

애타게 불러도 소용이 없었다.

손을 뻗어 옷자락을 잡아당기려 했으나, 조금 늦고 말았다.

어둠을 비집고 마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두 마리나.

두 발로 선 쥐를 닮은 마수였다. 문드러진 얼굴에서 진물이 뚝뚝 떨어졌다.

키는 1미터 남짓. 짧은 손에는 엉성하게 만든 창이 들려 있었다. 몸에는 짐승의 가죽을 두르고 있었는데, 옷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었다.

헛구역질을 일으키는 악취가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에단은 손을 들오 코를 막았다.

“천천히 거리를 벌려요. 사냥할 줄 아는 놈이니까, 적당히 위협하면서 빠지면 될 거예요.”

무기를 만들어 들고 있었다. 게다가 자기들만의 전술이 있는지, 만나자마자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다짜고짜 달려드는 몬스터보다는 상대하기 쉬운 편이었다.

“계속 따라올 것 같으니까 여기서 처리하고 가는 게 낫겠네.”

오른쪽 남자가 말했다. 여전히 목소리에 여유가 넘쳤다.

마수를 야생 동물쯤으로 치부하는 것 같았다. 이런 인간을 종종 만나긴 하지.

붙잡고 설명해봤자 입만 아프다.

“헛소리 그만하고 얼른 따라와요!”

두 마리의 마수가 끽끽, 소리를 내며 거리를 벌렸다. 도주로를 차단하는 움직임이었다.

그나마 달빛이 닿는 길목으로 도망쳐야 수월할 텐데.

걱정하며 뒤쪽을 살필 때였다.

“진짜, 빨리 좀 와요.”

긴장감이 탁 풀리며 말이 나왔다. 작은 곤충들을 손으로 휙휙 털어내며 타챠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저씨가 있다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저만치 떨어져 있는 타챠가 걸음을 멈추더니 멀거니 손짓만 했다. 허튼짓 그만하고 이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설마 안 도와주겠다는 건 아니겠지? 걱정이 치솟을 때였다.

“귀찮게 굴지 말고 빨리 와. 더는 식사를 못 미루니까.”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마수를 자극해서 어쩌자는 거야!

에단이 놀라며 인상을 쓸 때였다.

소리가 났다. 물먹은 나무끼리 부딪치는 듯한 둔탁한 소리였다.

연이어 두 번, 아주 짧은 간격으로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에단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 남자는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왼쪽에 있어야 할 남자는…….

“이제 가시죠, 시장님.”

누런 체액이 묻은 검을 툭툭 털며 걸어오고 있었다.

갑자기 모든 게 낯설어졌다.

저 남자는 언제 저기까지 간 거지? 그리고 마수 두 마리는 왜 절단돼 바닥에 꼬꾸라져 있는 거지?

타챠를 바라보며 얘기한 건 불과 몇 초였다. 숨 몇 번 고르면 사라지는 시간.

에단은 검집으로 빨려 들어가는 검을 바라보다가 뒤로 주춤 물러섰다.

실책이었다.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두 남자가 악인이었다면 목숨값을 지불해야 하는 건 나였을 것이다.

“자.”

오른쪽 남자가 은화 한 개를 던졌다. 빙글빙글 돌아 손바닥 안으로 들어온 은화를 멀거니 바라봤다.

“요즘은 랍파들도 변했다고 하는데, 너처럼 먼저 달려오는 랍파도 남아 있긴 하네. 먼저 보고, 먼저 가고, 가장 늦게 떠나는 자. 그래, 랍파는 그런 자들이지.”

곁으로 다가온, 수염이 너저분한 남자가 에단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정도 돈이면 둔까지 안내해줄 수 있지?”

“아, 네. 충분해요.”

“고마워.”

남자가 눌러썼던 모자를 들어 올렸다. 선하면서도 동시에 모사꾼처럼 보이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눈동자가 보였다.

“거기 있는 양반은 구면인 거 같은데, 아닌가?”

남자가 타챠에게 말을 걸었다. 타챠는 콧방귀를 뀌면서 몸을 돌렸다.

“뭐, 친하지는 않으니까. 기억 못 할 수도 있고. 아무튼, 젊은 랍파 친구. 둔까지 잘 안내해 달라고.”

남자가 에단의 등을 툭 밀었다.

에단은 엉겁결에 한 걸음 뗀 후 남자를 돌아봤다. 잠깐만, 아까 분명 시장이라고 했지?

“시장님이세요?”

“왜? 시장이니까 돈 더 내라고? 그건 곤란해. 요즘 주머니 사정이 안 좋거든.”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시장직에 오르실 만한 분이 호위도 없이 이런 곳에 있다는 게…….”

“호위라면 내 옆에 있잖아. 아주 든든한 친구가.”

시장이 하하 웃으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검집을 쥐고 있던 남자는 뒤로 물러서며 그 손길을 피했다.

“예전에는 참 말을 잘 듣는 친구였는데, 요즘은 변했어.”

“시장님께서 그렇게 되길 바라셨습니다. 전 충실하게 따를 뿐이고요.”

“말대꾸하는 것 좀 봐.”

쯧, 혀를 차는 시장이었다.

에단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어디서 오는 길인가요? 둔 주변 도시라면 알케? 소르담? 좀 더 멀리 있는 에자일?”

“근방에서 온 건 아니고, 좀 멀리서 왔지.”

“멀리서요?”

“어. ‘휀’에서 왔어.”

“휀이요?”

“아직 유명세를 못 타서 그런가, 이렇게 말하면 다들 못 알아듣더라고. 음…… 그래. 옛 성도에서 왔어. 내가 거기 시장이거든.”

“……예?”

시장이 활짝 웃었다.

옛 성도의 시장.

그 말이 사실이라면…….

온몸에 찬기가 감도는 걸 느낄 때였다.

“그보다 젊은 친구. 둔에 루드 팩토리란 곳이 있다며? 거기까지 안내해줄 수 있을까?”

시장, 아니, 옛 황제가 살갑게 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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