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7화
마도사 퀼비언.
위대한 마법사라면 엇나가 버린 시간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민은 굳게 다물린 가하란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안 좋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지금 브라인 님을 만난다고 해도 도움을 받을 순 없을 거예요.”
“그게 무슨…….”
“기억을 잃으셨어요. 마도사에 관한 것도 잊으셨겠죠.”
“기억을 잃으셨다고? 바라라족은 망각을 모를 텐데.”
물고기가 익사했다는 말처럼 들렸다. ‘유구한 역사의 목격자는 잊는 법을 잊었다.’ 바라라족을 설명할 때 흔히 쓰이는 문구처럼 그들의 기억은 변하지 않고 영원해야 했다.
“세계가 이렇게 변했다고 한들 특무대령님은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문화권이 사라지는 대재앙은 이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 하나 남기지 않는 파괴의 파도 속에서도 바라라족의 기록은 이어졌다.
어떤 시련도 그들의 펜대를 꺾을 수 없다고 믿었는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민 교수는 미지근한 물을 들이켰다.
“일시적인 기억상실인 거니?”
“아니요. 기억을 잃은 지 5년이 지났어요. 지금 브라인 님은 새로운 기록을 쌓아가고 계세요.”
“곤란하네. 그분이 지닌 정보가 유일한 단서였는데.”
용병단 사람들에게도 물어봤지만, 마도사 퀼비언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추모길에도 나타나지 않는 마도사. 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
예전이었다면 추모길 주변 마을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을 것이다. 뭐라도 건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환경이 바뀐 지금, 발품 팔아 정보를 얻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도시 간 여행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행동이 됐으니까. 마수가 넘쳐나는 세상이라니? 이 얼마나 끔찍한 얘기인가.
길잡이가 되어줄 브라인은 기억을 잃었고, 둔 내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정적이다.
이쯤 되면 하늘에 기도라도 올려야 하는 건가?
제발 눈앞에 퀼비언이 나타나게 해달라고.
“퀼비언.”
생각을 읽은 것처럼 가하란이 작게 말했다. 민 교수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되물었다.
“뭔가 아는 거라도 있어? 사소한 거라도 좋아. 뭐든 기억나는 게 있으면 말해줘.”
“잠깐만요.”
가하란이 팔짱을 끼더니 생각에 잠겼다.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 숨소리도 죽인 채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고정돼 있던 가하란의 눈동자가 왼쪽으로 움직였다.
시선이 닿은 곳에 포크가 두 개 있었다.
가하란이 포크 두 개를 앞으로 당겨왔다. 포크가 한 뼘 정도의 거리를 둔 채 나란히 놓였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추측이지만, 브라인 님은 모든 기억을 잃은 게 아닐 거예요.”
“방금 기억을 잃었다고 했잖아.”
민 교수는 의아함을 담아 말했다.
“교수님은 말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말? 지금 우리가 하는 말?”
“네.”
“어떻게 생각하긴. 말은 말이지.”
추상적인 질문이라 대답도 두루뭉술해졌다.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면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이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은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난해한 물음이었다.
“교수님께선 말이 기억에 의거한다고 여기시나요?”
민 교수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기억은 체험을 통해 얻은 부산물이야. 그러므로 말은 기억에 기대지 않아. 말은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거니까. 내재한 걸 깨닫는 게 말이고, 기억에서 배우는 건 글씨지.”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당연한 이야기였다. 말은 공부를 통해 배우는 게 아니었다. 말은 영혼에 각인된 것이니까.
“저도 그렇게 배우긴 했어요. 하지만 정말 그런 걸까요?”
당돌한 질문에 잠시 말이 막혔다. 의문을 가져서는 안 될 사안이었다. 사람은 죽는다는 자명한 명제에 의구심을 품는 자가 없듯이, 말에 대한 것은 궁리할 가치가 없었다.
가지에서 떨어진 잎이 바닥을 향하는 것, 상류에서 흘러내린 물이 하류로 향하는 것, 해와 달이 번갈아 뜨는 것, 마나의 흐름 안에 삶이 영위되는 것.
이처럼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 과학적 질문을 품는다는 것조차 웃음이 나오는…….
민 교수는 잠시 생각을 멈췄다.
콕 집어내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이 고개를 들었다. 손톱에 난 거스러미처럼, 별거 아닌데 자꾸만 신경을 잡아끈다.
뭐가 별거 아니지?
난 대체 무엇을 신경 쓰고 있는 거지?
의문의 불길이 번져 나갔지만, 진원지가 어디인지 감조차 안 잡힌다.
뿌옇게 솟아난 연기구름이 마음을 뒤덮고 있었다.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자명한 것이 자명하지 않게 되고, 부정해야 마땅한 것에서 이치가 보이는 느낌이었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파고들면 안 된다고 직감이 속삭였다.
낭떠러지다. 헛디디면 돌이킬 수 없는 사고의 낭떠러지. 떨어지게 되면 세상을 인식하는 체계가 송두리째 바뀔 것이다.
미치광이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아른거리는 저 밑바닥을 향해 몸을 던지는 건 정신병자나 할 짓이다.
문제는, 아둔한 발이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생각을 멈춰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앎의 인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기어이 민 교수는 내뱉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왜 우리는 같은 말을 쓰고 있는 거지? 종이 다른데도, 지역이 다른데도, 어째서 모두의 말이 통일된 거지? 영혼에 각인된 거니까?”
하하,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나왔다.
“너무나도 편리한 일이네. 마치 한 사람이 정해놓은 것처럼.”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식의 경계가 무너져 혼란을 가중시키는 소리였다.
펄쩍 뛰며 한탄해야 할 소리이자, 기쁨에 미쳐 환호성을 질러야 할 소리였다.
“말. 그래, 그것도 기억일 뿐이지. 정보일 뿐이고. 그 역시 배워야 마땅한 것일 텐데.”
중얼거리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잊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앞에 누가 있었는지.
가하란은 놀란 얼굴에서 차츰 미소를 띤 얼굴로 바뀌고 있었다.
“민 교수님도 제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아채셨나요?”
“아직 전부 다 이해한 건 아니야. 하지만 섬뜩한 의문은 생겼어. 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너 때문이라고 해야 할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민 교수는 밀레나를 바라보았다.
“넌 우리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어?”
“저요? 글쎄요. 그냥 잡담에 농담 아닌가요?”
이상한 일이었다.
밀레나는 영특한 아이였다. 희대의 천재는 아니더라도 깨우치는 게 빠른 애였다.
하지만 방금 대화에서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했다. 왜일까?
민 교수는 자신을 돌아봤다. 이 유쾌하고도 불쾌한 이질감은 이해력과 관계없이 찾아오는 걸까?
사과를 보지 못한 자에게 사과를 설명할 수 없다.
빨가니, 둥그스름하니, 달콤하니 등등 온갖 형용사를 끌어다 써도 결국 사과란 본질에 도달하지 못한다.
아니, 실제로 사과를 봤다고 해도 결국 개별적으로 인식한 사과에 대한 설명이지 사과 자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머리를 헤집는 아찔한 깨달음, 어쩌면 사고의 붕괴는 설명한다고 해서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아니리라.
갖춰진 순간 깨우치게 되는 것.
그마저도 완전하지 않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상태로.
“일단 하던 얘기를 계속해봐.”
견고한 관념에 금이 가는 일생일대의 사건이었지만, 지금은 구석으로 미뤄둬야 했다.
중요한 건 따로 있으니까.
“말이 기억에 의거한다는 점을 받아들이셨다면…….”
“기억을 잃었는데 언어 능력이 그대로인 건 이상한 일이지.”
가하란이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단숨에 알아챘다.
“브라인 님의 기억은 사라진 게 아닐 거예요. 단지 기억이 저장된 방을 찾지 못할 뿐.”
“심상세계. 그래, 기록보관서는 심상세계의 발현이니까…….”
“그 안에 든 캐비닛이 어디 있는지, 그 위치를 찾을 수 있다면 기억도 돌아오지 않을까요? 지금도 희미하게나마 기억이 연결돼 있을 거예요. 그러니 언어를 잃지 않은 거고.”
가하란이 떨어트려 놓은 포크 사이에 스푼을 얹어 놓았다. 가로로 눕힌 스푼이 포크 사이를 이었다.
“물론 추론이고, 만약 가설이 사실이라고 한들 접근법이 어려워요. 정신 속 세상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니, 말이 안 되죠.”
“하지만 넌 뭔가 생각난 거 같은데.”
두 개의 포크를 잇는 스푼.
가하란이 스푼을 들어 올렸다.
“마도사 퀼비언. 그 이름을 들으니 떠오르는 게 하나 있어요.”
“그게 뭐지?”
“제가 브라인 님의 심상세계 안을 헤맸던 적이 있어요.”
“기록보관서에서 길을 잃었다는 거야?”
“네.”
“용케 돌아왔네. 아니지, 브라인 님이 구해준 건가?”
“아니요. 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어요.”
고개가 절로 삐딱하게 내려갔다.
심상세계 안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다니.
민 교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을 열었다.
“그 다른 사람이란 게…….”
“네, 맞아요. 퀼. 브라인 님의 세계 안에 그분이 있었어요.”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심상세계는 타인이 침범할 수 없는 공간이야. 만약 침범한다면 문제가 생기고.”
“억지로 비집고 들어간 게 아니었어요. 그 형…… 아니, 할아버지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그 형은 브라인 님과 아는 사이였어요. 그다지 친하지는 않다고 했지만.”
가하란이 자빠져 있는 엘리를 바라봤다.
“엘리 씨도 말했죠? 브라인 님은 관계자라고.”
“그래도 다른 이의 심상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건…….”
“그 안에 있는 퀼 형은 본인이 아니었어요.”
“본인이 아니다?”
“마법적인 어떤 상태라고 했어요. 저도 자세한 건 알지 못해요. 설명을 듣고 싶었지만, 브라인 님이 알려주지 않았거든요.”
“그렇다는 건 특무대령님은 자신의 심상세계 안에 퀼이 있다는 걸 인지한 상태였네? 그럼에도 별 대응을 안했고.”
“네, 그런 거죠.”
민 교수는 탁자를 툭툭 건드렸다.
“만약 심상세계 어딘가에 있는 그 마도사가 도움을 준다면…….”
“옛 기억에 도달할 길잡이가 되는 거죠.”
“말도 안 되는 얘기 같지만, 시도하지 않을 이유는 없겠지?”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어처구니없는 문제점을 깨달았다.
“심상세계 안에 있는 ‘마법적으로 만들어낸 마도사’에게 연락을 취하려면…….”
가하란도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본인을 찾아가서 부탁해야겠죠. 분신한테 신호를 달라고.”
“돌고 돌아 결국 마도사를 찾아야 한다는 거네? 하지만 찾을 방법은 없고.”
“그러니까요.”
한숨이 깊게 나왔다.
방법을 찾긴 찾았는데, 방법을 위한 방법이 또 필요했다.
제자리걸음도 정도가 있는 건데.
“저기, 저만 이해 못 한 거 아니죠?”
밀레나가 뚱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리고.
“으하아! 이 많은 돈을 봐라! 내가 너희들을 위해 잔뜩 뿌려주는 돈을! 퀼! 나 그만 무시하고 얼른 청소하라고! 하르멘! 빨리 날 칭찬해! 으하아!”
술병을 껴안은 채 헛소리하는 엘리였다.
“일단 저것부터 치우자. 정신 사나워지기 전에.”
민 교수는 작게 혀를 찬 뒤 말했다.
* * *
“아저씨.”
에단은 마른침을 삼키며 건너편을 보았다. 다닥다닥 붙어서 자라난 수풀 너머로 징그러운 검은 살결이 보였다.
“저건 건들기 힘들겠어.”
전투가 있는 곳이면 불 속이라도 뛰어드는 타챠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에단은 생각했다. 아저씨가 몸을 사릴 정도면, 저건 얼마나 끔찍한 생물이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