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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286화 (259/558)

제286화

민 교수.

아득하면서도 반가운 이름이었다.

“교수님의 얘기가 믿기 어려울지도 몰라. 아니, 너라면 오히려 쉽게 받아들이려나?”

교수와 만나러 가는 길목에서 밀레나가 한 말이었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사연이라는 게 뭘까. 가하란은 슬며시 질문을 던졌지만, 밀레나는 본인에게 들어야 이해하기 편할 거라며 답변을 미뤘다.

“여기야.”

시내 서쪽에 있는 숙소였다. 만실인지 숙소 앞에는 방이 없다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아저씨들이 하는 말은 무시해. 그리고 엄마가 하는 말도.”

밀레나의 표정을 보아하니 농담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밀레나의 어머니, 필렌 경의 소문은 익히 들어왔다.

그라운드 제로 이전에는 위대한 거병기사로, 이후에는 뛰어난 마수사냥꾼으로 이름을 날렸으니까.

“무시하는 건 어려울 거 같은데.”

“그러면 적당히 웃어넘겨. 다들 장난치는 거니까 진지하게 듣지 말고. 알겠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밀레나의 말과는 달리 1층은 텅 비어 있었다. 줄 맞춰 놓인 테이블과 그 위에 올려진 의자.

“이제 그만 마시지?”

구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구에서는 시야가 닿지 않는 모퉁이에 사람이 있었다. 걸음을 떼니 그제야 얼굴이 보인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여자 셋.

좌측에 둘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고, 우측에 앉은 사람은…….

“민 교수님.”

밀레나가 먼저 입을 뗐다.

낄낄 웃던 좌측의 두 명이 입을 닫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따끔거릴 정도로 집요한 시선이었다.

“……가하란이구나.”

민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경 너머에 자리한 눈빛이 복잡해 보였다.

가하란은 민 교수가 내민 손을 가볍게 쥐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교수님.”

“오랜만…… 그래, 오랜만이네.”

민 교수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니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던 찰나, 시야를 침범하는 손이 있었다.

“너구나!”

벌떡 일어난 여자가 어깨를 붙잡았다. 독한 주향이 코를 찔렀다. 냄새만으로도 취기가 오를 정도였다.

“엄마.”

밀레나가 여자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엄마. 이분이 필렌 경이구나.

실례가 되는 말이라 차마 내뱉지는 못했지만, 어린 시절 ‘툴’이 떠올랐다.

활달함이란 단어로는 정의할 수 없는, 엄청난 에너지로 똘똘 뭉쳐 종일 뛰어다니고도 또 놀아달라고 보채던 시절의 툴이.

‘저희 집 강아지가 생각나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니 예의차림용 미소를 지었다.

“너, 뭔가 재미난 생각을 한 거 같은데.”

필렌의 말에 속이 뜨끔했다.

“적당히 마시라니까 아주 날 잡았네. 얼른 들어가 쉬어.”

“왜? 난 가하란하고 얘기하고 싶은데.”

“오늘은 민 교수님 보러 온 거니까 제삼자는 빠져야 한다고.”

“싫은데?”

필렌이 밉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밀레나를 놀렸다.

머릿속에 자리 잡은 ‘근엄한 기사’의 모습은 그 순간 잘게 쪼개져 사라졌다.

왜 밀레나가 그토록 당부했는지 알 것 같은 대목이었다.

“피는 못 속인다고…… 닮았네, 올란트하고.”

툭 튀어나온 이름에 잠시 멍해졌다.

“아버지를 아시나요?”

“알지. 아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에 쏙 드는 친구였어. 난 덴스가 다 말해놓은 줄 알았는데, 아직 자세한 얘길 안 했나 보네?”

덴스 교수까지 언급됐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장소가 있었다.

“혹시 볼로스에 계셨나요?”

“뭐야, 대충은 알고 있네.”

“네. 자세한 건 알지 못하지만 그곳에서 어떤 연구를 진행하셨다는 건 알고 있어요.”

“제국 시절이었다면 입 다물어야 할 기밀이지만, 지금은 말해도 상관없는 일이 됐지. 너희 아버지는 그곳에서 거병 소형화를 연구 중이었어. 나도 그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그러고 보니 벌써 6년 전이네. 아니, 7년 전인가? 어제 일 같은데 말이야.”

빙긋 웃던 필렌이 재차 가하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잘 컸네. 올란트가 봤으면 분명 나한테 자랑했을 거야. 우리 아들이 이렇게나 잘 컸다고.”

이런 느낌이 들었다. 술에 취하지 않았어도 필렌은 똑같은 말을 해주지 않았을까.

처음 보는 사람.

낯선 사람에게서 들은 아버지의 말이 그토록 반갑고, 또 뭉클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를 기억해 주셔서.”

필렌이 민 교수를 쓱 바라봤다.

“당분간 둔에 있을 테니 오늘 말고도 얘기할 날이 또 오겠지. 오늘은 선약 잡은 사람하고 실컷 얘기해. 아주 재미있을 거야. 민이 겪은 일은 돈 주고 들어야 할 정도거든.”

킥킥 웃던 필렌이 옆에 앉아 있는 여자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엘리, 우리는 이만 빠지자.”

“아니요, 아니요. 저는 이 자리를 지켜야 해요. 민을 입단속 시켜야 하거든요! 그으쵸, 민?”

‘엘리’라 불린 여자는 혀가 반쯤 풀려 있었다. 술을 대체 얼마나 마신 걸까.

“그래? 그러면 알아서들 해. 난 이대로 올라가서 잘 테니까.”

손을 휘적휘적 저으며 자리를 떠나던 필렌이 돌연 멈춰 섰다.

“가하란.”

“네.”

“밀레나가 못살게 굴면 말해. 치부 몇 개 알려줄 테니까.”

말을 끝낸 필렌이 헛구역질을 하며 계단 난간을 잡았다.

치부?

가하란은 밀레나를 바라봤다.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지? 무시해. 우리 엄마, 항상 저러니까.”

대수롭지도 않다는 얼굴이었다.

“자자, 앉아! 앉아! 얼른 앉아! 술자리에 사람 빠지면 얼른얼른 채워야 도깨비가 안 찾아와. 으응? 빨리.”

흐느적거리며 다가온 엘리가 가하란의 왼팔을 잡고 늘어졌다.

“이분 괜찮은 건가요?”

민 교수에게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옆으로 치워놔. 술병 하나 쥐여 주고.”

조언을 받은 대로 실행했다. 엘리에게 빈 술병을 쥐여 주니 해맑게 웃으며 주저앉았다. 병에 대고 뭐라고 혼자 떠드는데, 내용이 궁금하지는 않았다.

“많이 컸네.”

자리에 앉자마자 민 교수가 한 말이었다.

“예, 컸죠. 시간이 시간인 만큼. 근데 민 교수님은…… 정말 그대로시네요.”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객관적인 시선에서 봐도 변화가 없었다. 시간의 시침이 민 교수만 빗겨간 것처럼.

“그래. 이 몰골을 이해하려면 제대로 된 설명이 필요하겠지.”

민 교수가 운을 떼자마자 “안 돼요!”라고 엘리가 외쳤다. 병은 껴안은 채라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비밀으은, 아는 사람이 저어억을수록 좋다고요오! 퀼한테 혼날 거야아!”

내버려 두면 목 놓아 울 것 같았다.

“엘리. 얘는 알아도 괜찮아. 무엇보다 내가 말하고 싶어. 한때였고, 또 무책임했지만 그래도 보호자였으니까.”

“……안 되는데.”

시무룩한 얼굴로 바닥만 보던 엘 리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가하란은 부담스러운 눈빛을 받으며 어설프게 웃었다.

밉보인 건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엘리가 엉거주춤 기어 오더니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 뭐야?”

“네?”

“희미하지만 ‘차단의 역술’이 걸려 있잖아. 이걸 아는 분은…….”

엘리가 주섬주섬 종이 더미를 꺼냈다. 노끈에 엮인 종이 한 장을 찢어내더니 얼굴 앞에서 흔들었다.

종이가 빛을 발하더니 중간 부분이 검게 타들어 갔다.

“너, 브라인 님하고 무슨 관계야?”

엘리가 또박또박 말했다. 주향은 남아 있지만 흐트러진 모습은 사라졌다.

“제가 생각하는 그분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어릴 때 절 돌봐주신 분이에요. 저한테 많은 걸 알려주셨죠.”

“그 말에 거짓은 없지?”

“네.”

대답하자마자, 엘리가 푸핫 웃었다.

“당연히 거짓말이 아니겠지! 브라인 님이 아무 인간에게나 술을 걸지는 않으니까. 그래, 그렇단 말이지. 넌 관계자구나. 그러면 상관없어!”

“관계자요?”

“역술이 걸려 있다는 건 딱 하나를 의미해. 너, 도깨비를 만난 적 있지?”

도깨비.

그 옛날 엔엔의 공방에서 마주친 이형의 생물.

“잭 오 랜턴, 표리영역. 이것과 연관된 도깨비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네, 알고 있어요.”

“역시나. 됐네, 됐어! 마음껏 들어도 돼. 근데 너 청소꾼에 관심 있니? 할래? 응? 해라. 인력 부족이야. 살려줘.”

또렷했던 눈동자가 또다시 술기운에 잠식됐다. 신기한 여자였다.

엘리는 다시 자빠져 빈 병을 품에 안았다.

“해선 안 될 말을 자기가 다 하는 거 같은데.”

민 교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말이 나온 김에 브라인 님은 잘 지내고 계시겠지?”

가하란은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분께도 여러 일이 있었나 보네. 그래, 세상이 이 꼴이 됐으니.”

씁쓸하게 웃는 민 교수였다.

“일단 내 얘기부터 해야겠네. 경험한 나조차도 얼떨떨한 이야기야. 맨정신에 들으면 미쳤다는 소리가 먼저 나올 텐데, 술 한잔할래?”

“아니요. 전 그냥 들을게요.”

엎어진 엘리를 슬쩍 보며 말했다.

“그래, 그게 좋겠다.”

* * *

“그래서 두 달간 방황하다가 그 지겨운 곳을 벗어났더니, 세상이 이렇게 변해 있었어. 어이없게도 말이야.”

민 교수의 긴 이야기가 끝났다.

“안 믿기지?”

“아니요, 믿어요.”

“그래? 희한하네. 난 다른 사람이 이런 말 했으면 개소리 말라고 못 박은 뒤에 쫓아냈을 텐데. 다들 대체 무슨 일은 경험한 건지, 쉽게 납득하네.”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세상이 이 꼴이 됐잖아요. 이렇게 변해 버렸는데 시간의 틈새에서 헤맸다고 한들 이상할 건 없죠.”

민 교수가 소리 내며 웃었다.

“침착하게 받아들여 주니까 오히려 민망하네. 난 지금도 이게 꿈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내가 모르는 동안 5년, 아니 6년이란 시간이 흘렀다니.”

술로 입을 적신 민 교수가 목소리를 낮췄다.

“널 맡겠다고 얘기한 주제에 널 두고 도시를 떠나서 항상 미안했어.”

“한동안 돌봐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저처럼 귀찮게 구는 애, 저라면 절대 안 맡아요.”

농담과 진심을 절반씩 섞어 말했다.

“……몸 상태는 어때?”

단순히 건강을 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민 교수는 말을 마치고 나서 슬쩍 밀레나를 보고 있었다.

“마나를 말씀하시는 거면, 여전해요. 전 여전히 마나를 감각하지 못해요. 하지만, 각종 툴은 쓸 수 있죠.”

그렇게 말한 후 밀레나를 바라봤다.

“누나한테 많은 걸 털어놨어요. 그러니 마나와 관련된 얘기는 편하게 하셔도 돼요.”

“생각한 것보다 둘이 많은 걸 공유했구나.”

민 교수가 미소를 지었다.

“무슨 얘기야?”

밀레나가 조용히 질문해왔다.

“이따가 얘기해줄게. 근데 대단한 건 아니야.”

“교수님 표정을 보면 평범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럴지도 모르지. 근데 난 크게 신경 안 써서.”

어깨를 으쓱인 다음 민 교수에게 시선을 던졌다.

“교수님 얘기는 잘 들었어요. 제가 걱정돼 보고 싶었다는 것도 이해하고요.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죠?”

“맞아. 하지만 이게 주목적은 아니야. 난 네가 건강하게 지내는지, 그걸 가장 먼저 확인하고 싶었어. 올란트 씨에게 약속했던 거니까.”

가하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사정도 설명했고, 엘리의 말대로라면 브라인 님도 관련이 있는 것 같으니 바로 말할게. 브라인 님을 최대한 빨리 뵙고 싶어. 네가 다리를 놓아줬으면 해.”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민 교수가 술잔에 시선을 줬다.

“퀼, 그러니까 마도사 퀼비언을 찾아야 해. 이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그의 도움이 필요하거든. 모든 걸 기록하는 브라인 님이라면 그의 행방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지 않을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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