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85화 (258/558)

제285화

“가하란이라면 집, 아니면 루드 팩토리에 있을 거예요. 지금 찾아가 보시게요?”

“지금 당장은…….”

민 교수가 옆을 바라봤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엄마가 있었다.

“얘 때문에 좀.”

밀레나는 손을 뻗어 완자를 집었다.

“쉬고 계세요. 가하란은 제가 찾아가 볼 테니.”

“귀찮게 해서 미안하네.”

“아니에요. 어차피 얼굴 보러 가려고 했어요. 그리고 가하란도 민 교수님을 만나고 싶어 할 거예요.”

완자를 입에 쏙 넣고 돌아섰다.

“딸, 어디 가?”

“누구 좀 만나러 가. 그리고 술 적당히 마시고. 건수 잡았다고 아주 살판났어.”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하네. 이 엄마는 술을 좋아하는 게 아니야. 사람을 좋아하는 거지.”

“네네, 그러시겠죠.”

밀레나는 눈웃음으로 인사한 후 거리로 나섰다. 이런저런 일 때문에 며칠 동안 가하란을 보지 못했다.

사실 여유가 있었다고 해도 만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법 잘 안다고 생각했던 애였는데……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감정을 아는 기계 카트시, 그리고 카트시를 이해한 가하란.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간략하게 들었지만 그 짧은 이야기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수백 년 전 기계가 멀쩡히 작동하는 것도 놀라운데, 현시대의 마법공학을 가볍게 뛰어넘는 성능이라니.

게다가 카트시가 끝이 아니라 비슷한 성능을 지닌 유사 정령이 더 존재할 수도 있다고 했다.

겉핥기식 이야기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세간에 알려지면 한바탕 난리가 날 정보였다. 그런 위험한 비밀을 가하란은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에게 말해준 거고.

그뿐인가?

엄마의 말대로라면 가하란은 세나티아 가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귀족은 아니지만 귀족에 가까운 위치.

혹시 첼 총집사의 핏줄인 걸까?

다른 가설보다 이쪽이 신빙성이 높았다. 총집사가 개인적인 용무로 올란트를 찾은 것도, 따로 편지까지 써서 입단속 시킨 것도 이런 이유라면 이해가 된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론.

당사자를 통해 전해 듣지 않는 한 무엇 하나 확신할 수가 없었다.

“또 어떤 대단한 비밀을 갖고 있을까.”

실소가 나왔다. 자그마한, 아니, 이제는 자그맣지는 않지만…… 어쨌든 꼬맹이인 걔가 별의별 일에 휩싸여 있었다.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짐을 덜어낼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루드 팩토리 앞이었다. 이곳에 없으면 집에 있을 것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건물 그림자가 꿈틀댔다.

뭔가 싶어서 고개를 들었다.

저 높이, 지붕 위에 휘적휘적 움직이는 발이 보였다.

발?

보수 공사라도 하는 건가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인부들이 신는 두툼한 신발이 아니었다.

사이즈도 작았고.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제야 지붕에 걸터앉아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한쪽은 가하란이고, 다른 한쪽은 샬롯이었다. 맞다, 샬롯은 가하란을 보기 위해 둔을 찾았다고 했지.

초여름의 열기를 품은 바람이 맞은편에서 불어왔다. 바람에는 은은한 웃음소리가 담겨 있었다.

밀레나는 물끄러미 두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티 없이 맑다. 우울함을 걷어낸 가하란의 얼굴은 보기가 좋았다.

왠지 방해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급한 일도 아니고, 당장 민 교수와 만날 것도 아니니 오늘은 돌아가도 될 것이다.

말 몇 알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밀레나는 입술을 붙였다. 입 안쪽에서 구르던 말들이 사탕처럼 녹아 사라졌다.

돌아서서 왔던 길을 되돌아갈 때였다.

“누나!”

머리 위를 가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지붕 끝, 아슬아슬한 위치에 서 있는 가하란이 두 팔을 위로 올려 흔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장터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장난감을 떠올리게 했다.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어디 가?”

거리가 꽤 되는데도 가하란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희한한 일이었다. 주변 소음 때문에 뭉개질 법도 한데.

밀레나는 주변을 돌아봤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지붕 쪽을 쓱 바라본 후 걸음을 떼고 있었다.

여기서 고래고래 소리 질러 대답하면 시선이 쏠릴 것이다.

그건 피하고 싶었다.

밀레나는 대답 대신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다음에 봐, 입을 벙긋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이 정도면 대충 알아들었을 것이다.

인사를 끝내고 돌아서려 할 때였다. 가하란이 옆에 있는 샬롯한테 뭐라 속삭였다.

샬롯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손바닥을 바닥을 향해 내리깔았다.

뭐 하는 거지? 설마?

의문은 금방 풀렸다. 가하란과 샬롯이 둥실 떠오르더니 부드럽게 낙하했다.

밀레나는 입을 살짝 벌린 채 지면으로 내려온 두 사람을 바라봤다.

둘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옷을 툭툭 털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저 둘의 기행을 보지 못했다. 봤다면 분명 소란이 일었을 것이다.

도시 내 허가받지 않은 마법 사용은 불법이니까. 당연히 정령술이라고 해도 예외 대상이 되는 건 아니다.

밀레나는 눈치를 살핀 후 재빠르게 두 사람에게 걸어갔다.

“뭐 하는 거야! 위험하게.”

“누나 목소리가 안 들려서, 그래서 내려왔지.”

“계단으로 내려오면 되는걸.”

그러자 옆에 있는 여자애가 대답했다.

“계단은 느린걸요? 이게 훨씬 편하고요.”

“……불법이야.”

“괜찮아요. 안 걸렸으니까. 그리고 이 정도는 뭐라고 안 해요. 언니도 알면서.”

한마디 더 하려다가 참았다. 사실 둔의 법규를 모두 아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도시보다 엄격하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

모르는 상태에서 잔소리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계단으로 다녀. 사람들 이목 끌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

“으, 언니도 율 언니랑 똑같은 말을 하네요. 조금 다를 줄 알았는데.”

“걱정하는 건 비슷하니까 그래. 알겠지?”

“알겠어요. 전 언니가 좋으니까 말 들을게요.”

선한 눈웃음을 짓고 있는데, 왜 이렇게 믿음이 안 가지?

율이 샬롯을 보며 항상 걱정하는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강력한 힘을 지녔는데 제대로 통제가 안 된다. 그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누구 보러 온 거야?”

가하란이 끼어들었다.

“음, 보러 오긴 했는데.”

“했는데?”

“아니야, 오늘은 괜찮은 거 같아. 그보다 둘이 친해 보이더라. 샬롯, 어때? 직접 본 소감은?”

샬롯이 방긋 웃었다.

“생각했던 거랑 똑같아서 신기했어요. 근데, 알고 보니까 꿈이 아니었어요. 진짜로 만난 거였거든요.”

“만났다고? 꿈이 아니라?”

“네! 음…… 자세한 건 비밀로 할래요. 나중에 말할 기회가 생기면 그때 알려줄게요.”

몸을 살랑살랑 흔들며 말하는 샬롯이었다.

“섭섭한데. 난 샬롯이랑 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많이 궁금해요? 그러면 알려줄까요?”

“아니, 그냥 해본 소리야.”

밀레나는 가하란과 샬롯을 번갈아 본 후 말했다.

“아무튼 난 볼일 끝났으니까 둘이 마저 얘기해.”

“벌써 가게?”

가하란이 한 걸음 다가오며 물었다.

“어, 음, 딱히 할 일도 없으니 가려고.”

민 교수님 건은 내일 해결하면 된다. 밀레나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하란이 또 다가왔다.

“이 뒤에 약속이 없다는 거네?”

“……아마도?”

“그러면 나한테 시간 내줘. 아직 누나랑 할 얘기가 많아. 친구에 관한 것도 다 말 안 했고.”

친구. 분명 카트시를 뜻하는 것이리라.

초대가 반갑기는 하지만, 샬롯과 약속이 있는 게 아닌가?

그때였다.

샬롯이 잰걸음으로 접근하더니 밀레나의 팔목을 잡아챘다.

“언니, 잠깐만요.”

샬롯이 건물 외벽으로 끌고 갔다. 가하란은 저만치 떨어진 채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언니. 가하란 만나러 온 거죠?”

“어, 맞아.”

“근데 왜 그냥 가요?”

“급한 일은 아니니까.”

민 교수와 만나게 된다면 여러 이야기가 오갈 것이다. 그중에는 올란트에 관한 것도 있을 테고.

만남이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꼭 오늘이 아니더라도 괜찮으니까 둘이 놀아.”

조금 전 봤던 가하란의 표정이 떠오른다. 지붕 위에서 말갛게 웃던 가하란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오늘만큼은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니요. 가하란 데려가요. 궁금한 것도 대부분 풀었고, 또 다음에 얘기하면 되니까요.”

샬롯이 얼른요, 라고 말하며 가하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갑자기?”

“빨리요. 전 다 알아요.”

“뭘?”

“뭉글뭉글한 바람을 봤어요. 가하란하고 똑같은 느낌이었다고요. 전 다 알아요.”

“그러니까 뭘?”

“에이, 더 묻지 말고 얼른 가요. 저 촉 되게 좋아요. 칼리고 아저씨가 인정한 촉이에요.”

“칼리고? 설마 그 칼리고 님을 말하는 건 아니지?”

“몰라요.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몸을 떠밀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다리가 움직였다.

또다시 가하란 앞에 섰다.

“내일 봐!”

샬롯이 손을 휘휘 흔들더니 사냥을 마친 매처럼 날아올랐다. 계단으로 가라니까!

눈에 힘을 잔뜩 주고 공중으로 사라진 샬롯을 바라볼 때였다. 가하란이 풋, 작게 웃었다.

“만나서 얘기하는 건 이번이 두 번째인데, 그것만으로도 샬롯이 어떤 애인지 알 것 같아.”

“나도. 율이 고생이지.”

“근데, 시간 괜찮은 거 맞지?”

“……어.”

가하란의 하늘색 눈동자를 보자마자, 샬롯이 한 말이 떠올랐다. 뭉글뭉글한 바람? 똑같았다고?

굉장히 신경 쓰이는 말이었다.

짚이는 게 없는 건 아니지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뜨끈해지니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잡념을 털어내려 하는데, 이번엔 엄마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 그래서 가하란하고는 잘 돼 가고 있고?

“아니라니까.”

생각이 입을 뚫고 나와버렸다.

“뭐가?”

가하란이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무슨 일이냐고 되물어 볼 법도 한데, 가하란은 눈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역으로 질문이 나왔다.

“안 궁금해?”

“뭐가?”

“내가 방금 혼잣말한 이유.”

“내가 알아도 되는 거야?”

“아니, 별로 말해주고 싶지는 않아.”

가하란이 귀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래서 안 물어봤어.”

속마음을 읽힌 거 같아 살짝 민망하다.

“카트시가 누나를 보고 싶어 해. 블루아이에 대해서도 궁금해하고.”

“난 카트시를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가 아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 편견이 이리도 견고할 줄 몰랐어.”

“워낙 특이한 경우니까. 나도 아무것도 모를 때라 그렇지, 지금처럼 지식을 쌓은 후에 카트시를 만났다면 의심부터 했을 거야.”

“그런가?”

걷다 보니 가하란의 집으로 가는 길목으로 들어섰다.

가만있어 봐, 민 교수님 얘기를 지금 꺼내야 하나?

슬쩍 옆을 보았다. 온화하게 웃고 있는 가하란이 보인다. 보폭을 맞춰 걷고 있는데, 왠지 모르게 몇 초간 멀거니 옆얼굴을 바라봤다.

“왜?”

가하란이 고개를 틀었다.

“그게! 민 교수님하고 만났어.”

눈이 마주치자마자 사고가 잠깐 정지했다. 그 바람에 망설이던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민 교수님? 정말이야?”

저 멀리 가하란의 집이 보였다. 하지만 이미 말을 꺼낸 상황. 미묘한 아쉬움을 느끼며, 밀레나는 말을 이었다.

“널 만나고 싶어 하셔. 말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일을 경험하고 오셨거든.”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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