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4화
수백 마리의 작은 벌레가 살갗을 기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혐오감에 가하란은 눈을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곳을 보는 것도, 심지어 눈을 감는 것도 불가능했다. 산카가 집요할 정도로 붉게 변한 직시의 가지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보고 싶지 않아요.”
-왜?
“그때가 떠오르니까요.”
문득 오른쪽 다리에서 시큰한 압통이 올라왔다. 마음으로 만들어낸 세상인데, 오른쪽 다리에 의족이 달려 있었다.
붉은 실.
모든 걸 앗아간 재앙의 형상.
붉은 가지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과거의 참상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냄새와 소리마저 되살아날 정도다.
-외면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어. 결국은 마주해야 해. 물론 네가 원한다면 여기서 그만둘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할까?
하얗게 타오르는 붉은 가지.
가하란은 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을 다독였다.
무너지던 하늘도, 갈라지던 땅도, 사람들의 비명도 의식 저편으로 사라졌다.
“아까 붉은 가지를 보며 그러셨죠. 저 가지가 한때는 존재했던 운명, 그리고 창조주의 규율과 닮았다고.”
-그랬지.
“저는 붉게 물든 가지를 보자마자 그라운드 제로 때가 떠올랐어요. 하늘이 붉게 물들고, 붉게 물든 하늘이 새빨간 실을 토해냈죠. 땅에서도 똑같은 색의 실, 마나의 덩어리들이 튀어나왔고요.”
-분명 그랬었지. 끔찍한 몰골이었어.
“그라운드 제로가 왜 일어난 건지, 정확하게 알려진 건 없어요. 신의 분노다, 자연재해다, 인간이 일으킨 사고다 등등. 소문만 무성했죠.”
눈에 가해지는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아픔에 비례해 가지는 더욱 붉어지고, 하얀 불꽃은 눈이 시릴 정도로 빛을 냈다.
“눈앞에 있는 가지와 그날 내려온 붉은 실이 비슷한 것이라면, 그라운드 제로는 신의 뜻이었던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 신에게 기도하지 않으려고요.”
-넌 애초에 신을 안 믿는 거 같은데?
“어느 정도는 믿었어요. 하지만 신이 우릴 벌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면, 기댈 이유가 없죠.”
-인간이 편의주의는 언제 봐도 대단해. 그 누구보다 신을 잘 이용하는 게 인간이란 말이지. 필요할 땐 섬기고, 필요 없으면 내치고. 신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도 인간, 신을 내친 것도 인간.
하얀 불길이 점차 줄어들었다.
가하란은 정보의 세계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주변을 날아다니던 선이 사라지고, 동시에 붉게 물들었던 직시의 가지가 하얗게 변했다.
-그렇기에 너희가 주도하는 걸지도 모르겠네.
검은 장막이 눈앞에 드리워졌다가 사라졌다. 가하란은 눈앞에 있는 산카를 바라봤다.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슬쩍 손을 들어 왼쪽 눈을 매만졌다. 꽂혀 있던 깃털이 사라져 있었다.
-재미난 걸 보여준 대가로 몇 가지 말해주고 싶지만, 귀찮은 인간하고 약속한 게 몇 개 있거든.
산카가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미 말해버린 건 어쩔 수 없겠지?
말해버린 것.
“신에 관한 얘기인가요?”
-그래. 신. 내가 말했지? 한때는 운명이라 불렸지만…….
“지금은 사라진 창조주의 규율.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죠?”
-내가 말한 것에 거짓은 없어. 거짓말은 유용하지만 너한테 쓸 필요는 없겠지.
짧은 문장이 내포한 의미는 입 밖으로 내뱉기 꺼려질 정도였다.
산카가 했던 말들을 되짚어 봤다. 신을 위대하게 만든 것도 인간, 신을 내친 것도 인간.
“신은 사라진 건가요?”
-우리의 창조주는 모든 걸 손에서 놓았어. 한때 존재했던 운명도 그 순간 사라졌지. 너나 나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줄 달린 인형이었단 소리야. 지금은 굴레에서 벗어났지만.
“……차라리 농담이라고 해주세요.”
신, 운명, 그리고 인형.
듣기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단어들의 조합이었다. 지식을 곱씹는 걸 좋아하지만, 신과 운명을 포함한 범우주적 논제는 쉽게 소화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아니, 이 주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모든 게 진실이라 가정해 봤다.
신의 부재는 무엇을 낳게 되지?
사라진 운명이 의미하는 건?
운명이 없어지고 인형에서 인간이 됐다는 건 거짓 없는 자유의지를 획득했다는 건가?
문득 카트시가 떠올랐다.
동시에 연구원을 죽인 로키도 떠올랐다.
거짓말을 발견하고, 감정을 얻고, 자유의지를 갖춘 기계. 나아가 어머니인 줄리어스를 이해하고자 인간이 되려 했던 기계.
기계는 인간을, 인간은 신을.
먼 미래에 벌어질 일을 코앞에서 본 느낌이 들었다.
“신은 왜 사라진 건가요?”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믿을 수 있게 됐거든.
“네?”
-복잡한 이야기야. 귀찮은 인간을 만나게 된다면 직접 물어봐. 너라면 아마 만나게 되겠지. 미래에 사는 아이와 연결돼 있으니까.
다양한 빛으로 물든 세계에 균열이 생겨났다. 산카가 한쪽뿐인 날개를 가볍게 펼쳤다.
-내 귀여운 딸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만 돌아가자.
“잠깐만요! 궁금한 게 너무 많아요. 그라운드 제로가 신의 의지였다는 건 거짓말인 거죠? 자신의 아이들을 믿게 됐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래. 그 업화는 신의 뜻이 아니야. 한 인간의 집념이었을 뿐.
“인간의 집념이요? 사람이 그 악몽을 일으켰다는 건가요? 어째서요?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제법 머리를 쓸 줄 알면서 영양가 없는 질문을 하네. 왜 그랬겠어?
산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눈앞에 빛무리가 휘몰아쳤다. 눈이 부셔서 앞을 볼 수가 없었다.
눈꺼풀을 덮었다. 일렁이는 눈꺼풀을 두드리다가, 빛은 한순간 사라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하늘이었다. 뒤이어 건물들이 시야에 잡혔다.
은은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둔 특유의 냄새가 실려 있었다.
-자신에게 득이 되니까 그랬지. 너무 당연한 거 아니야?
산카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뒤에서 쨍한 목소리가 났다. 뒤를 보려고 몸을 틀다가 뒤늦게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여기가 지붕이었고, 완만하다고는 하나 경사진 곳이라는 걸.
아, 하는 사이 몸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목부터 떨어지면 진짜 위험한데,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손을 허우적거리며 뭐라도 잡아보려 했지만 허무하게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
떨어진다. 아찔한 부유감이 등에서 시작되고, 지붕을 바라보던 시야가 휙 들려 하늘을 향할 때였다.
몸이 공중에서 멈췄다.
가하란은 살며시 뜬 눈으로 양옆을 봤다. 창문이 보였다. 안쪽에서 회의 중인 사람들도 보였다.
마침 창가에 있던 테리와 눈이 마주쳤다. 테리가 창문을 열며 말했다.
“뭐 하냐?”
“그,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샬롯한테 밉보인 거라도 있어?”
“아니. 아마 없을…….”
말을 끝내지 못했다. 몸이 쑤욱 위로 들렸다. 의도치 않게 억, 하고 소리가 났다.
보이지 않는 끈에 묶인 것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지붕 위로 끌려갔다.
지붕에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샬롯과 눈이 맞았다.
“와, 된다! 다시 되네.”
샬롯이 왼손 손목을 툭 껐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고, 가하란은 거꾸로 매달린 채 좌우로 흔들려야 했다.
“샬롯. 저기, 잠깐, 자, 잠깐만!”
낚싯바늘에 꿰인 생선의 기분이 어떨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까르르 웃던 샬롯이 아차 싶은 얼굴로 오른손을 움직였다.
시계추처럼 움직이던 몸이 그제야 멈췄다. 속이 살짝 울렁거린다. 아니, 살짝이 아닌가?
몸이 뒤집히며 지붕을 향해 있던 머리가 다시 하늘을 향했다. 머리에 쏠렸던 피 때문인지 시야가 잠깐 흐릿해졌다.
“괜찮아?”
지붕에 발을 내딛자마자 샬롯이 다가와 물었다. 악의는 없었다는 얼굴이다.
“아, 응. 괜찮아.”
구해준 사람한테 투덜댈 수는 없지.
가하란은 샬롯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산카 님은?”
작은 새가 보이지 않았다.
“피곤하다고 돌아갔어. 예전과 달리 여기에 오는 것만으로도 힘들다고 했으니까.”
샬롯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담겼다.
“둘이 무슨 얘기를 한 거야?”
“뭐, 이런저런 얘기.”
“알려주면 안 돼?”
“아마도?”
샬롯이 눈을 씰룩거리다가 픽 웃었다.
“됐어. 내가 알아도 되는 일이라면 나중에 산카가 말해줄 테니까.”
미소를 유지한 채 가하란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는 샬롯이었다.
“근데 의외야. 산카가 사람한테 관심을 보이다니. 산카는 말이지, 사람을 싫어하거든. 아니지. 싫어한다기보다 귀찮아해.”
“말씀하는 걸 들어보면 사람에게 관심이 많아 보이던데.”
“그렇지도 않아. 이렇게 따로 불러내서 말을 거는 것도 오랜만이거든.”
샬롯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래, 이 색깔이었지. 꿈이 아니라 진짜로 만난 거였어. 넌 기억하고 있는 거지? 날 만날 걸.”
“기억하고 있어.”
“어떤 상황이었어? 난 사진처럼 장면 몇 개만 떠올라. 나중에 산카한테 말해서 뒤덮은 기억을 되살리면 되겠지만, 지금은 너한테 듣고 싶어.”
이걸 말해줘도 되는 걸까.
고민하던 때였다.
-지금은 말해줘도 괜찮아.
산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락이 떨어졌으니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정령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
“내가 본 건 불의 구름과 얼음이 깔린 땅이었어. 아니, 얼음으로 된 하늘이었나?”
“제대로 봤네. 정령 세계는 뒤죽박죽인 곳이야. 갈 때마다 풍경이 달라져 있었거든. 불꽃을 두르고 하늘을 나는 뱀도 있고, 얼음 안을 헤엄치는 사자도 있었어. 그리고 멋진 날개를 지닌 사슴도 있지.”
“사슴?”
턱을 당기고 곰곰이 생각하던 샬롯이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을 활짝 폈다.
“기억나! 사슴! 내가 끌어안고 있었던 거 같아. 맞지?”
“맞아.”
“그래, 그랬어. 근데 어쩌다 날 만나게 된 거야?”
“내가 널 처음 봤을 때 넌 굉장히 위험한 곳에 서 있었어. 커다란 바위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곳이었지.”
“바위…… 그런 걸 본 것 같기도 해. 아, 정말! 산카는 이런 멋진 기억을 왜 덮어버린 걸까?”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샬롯이었다.
“그래서? 그다음에 어떻게 된 건데?”
재촉하는 샬롯을 보며 가하란은 작게 웃었다.
“어떻게 된 거냐면…….”
* * *
“이제는 언니라고 부를 필요도 없겠네?”
“언니라고 부른 적은 있고?”
“같이 늙어가는 사이에 쩨쩨하게 따지긴. 민은 그래서 안 돼.”
“저기요, 두 분 그만 떠들고 술이나 받으시죠? 으헤!”
진중한 대화가 오갈 줄 알았는데, 만나자마자 술판이 벌어졌다.
밀레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엄마와 민 교수, 엘들리아를 바라봤다.
“엘리! 너 뭘 좀 아는구나. 그래, 잡담이 뭐가 필요해. 진한 술이면 다 되는걸!”
“맞아요, 필렌 언니. 그런 점에서 민은 앞뒤가 꽉 막혔다니까요. 제가 두 달 동안 같이 다니면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지, 말로 설명하기도 어려워요.”
“그래그래, 내 동생. 그럴 줄 알았어. 민은 다 좋은데 사람이 답답해.”
“그러니까요! 에휴.”
짝짜꿍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가운데 낀 민 교수는 조소를 지으며 연거푸 술을 마시고 있었다.
‘5년의 공백’이란 무시무시한 화젯거리도, 엄마 앞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이야기가 됐다.
그래? 5년? 그럴 수도 있지. 세상이 이 꼴이 됐는데 뭐 어때?
엄마는 그렇게 일축해 버렸다.
민 교수 말을 들으며 심각하게 고민한 자신이 바보가 된 느낌이다.
“딸! 겉돌지 말고 얼른 와.”
“맞아요, 밀레나! 얼른 와요!”
밀레나는 열렬히 손을 흔드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술고래도 저 자리만큼은 사양할 것이다.
야유를 퍼붓는 엘리를 바라보다가 민 교수에게 시선을 줬다. 민 교수가 손짓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귀를 가져다 댔다.
“계속 부탁만 해서 미안한데, 가하란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