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3화
거대했던 산카가 한순간 작은 새로 변했다. 어둠이 물러난 자리에 다양한 색을 띤 빛이 자리했다.
-여러 인간의 속을 들여다봤지만, 이렇게 유치하게 반짝이는 놈은 처음이야.
“예쁘지 않나요? 전 제 안이 이렇게 빛나는 게 마음에 들어요.”
가하란은 저 멀리 구석을 바라봤다. 어둠도 없고 빛도 없는, 텅 빈 곳이 있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기가 어떤 감정을 다루는 곳인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울음이 목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눈을 돌리지는 않았다.
이제는 직면해도 괜찮으니까.
사실과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네 안쪽 탐방은 나중에 혼자 하고.
산카가 코앞으로 날아왔다.
-그 기괴한 눈으로 날 해석해 봐.
“제 눈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네가 가장 잘 알 텐데. 종족을 불문하고 동시대에 그런 눈을 지닌 개체는 네가 유일할 거야.
가하란은 왼손을 들어 눈가를 매만졌다.
“산페르 아저씨도 그렇고, 산카 님도 제 눈이 다르다는 걸 바로 알아보시네요.”
-표면을 뚫고 그 안에 숨어 있는 걸 볼 수 있는 놈은 몇 없을 거야. 그러니 괜한 걱정은 그만두고 그 눈을 사용해 봐. 확인해 둬야 하니까.
“무엇을 위한 확인이죠?”
-너, 말이 참 많네.
산카가 부풀어 올랐다. 순식간에 주변 모든 걸 덮어버릴 정도로 커졌다.
-잔소리 그만하고 얼른 사용해 봐. 강제로 그 눈을 뜨게 하고 싶지만, 딸이 슬퍼할 것 같으니 참을게.
“샬롯을 아끼시네요.”
가하란은 눈을 감았다. 안구에 피어오르는 열기를 느끼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까마득한 산카의 하얀 눈이 앞에 있었다. 정신을 집중했다. 눈알이 지글지글 끓는 것처럼 아려왔다.
드러난 모습을 가닥가닥 해체해 정보로 바꿔버리는 눈.
하지만 앞에 놓인 거대한 눈동자는 변화가 없었다. 심상 세계의 공간조차 서서히 선으로 변해갔지만, 산카의 몸은 약간의 흔들림만 있을 뿐 형태를 유지했다.
눈에 가해지는 압력이 한계치에 달했다. 가하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불길을 참아내는 인간이라. 너도 정상은 아니구나?
“불길이요?”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어. 모든 걸 태우고도 남을 불길이 널 삼켰지. 인간족의 자그마한 세계로는 그 불을 감당하기 힘들 텐데, 넌 아주 섬세하게 통제하더라. 내가 놀랄 정도로.
열감이 서서히 사라졌다. 쓰라린 눈을 슬쩍 비비며 눈을 떴다.
작게 변한 산카가 눈앞에 있었다.
-현상도 놀랍지만 그보다 심상 세계를 지켜낸 네 의지가 놀랍네.
“감사합니다.”
-정상이 아니란 뜻이니까 칭찬으로 듣지 마. 일반적인 사고 체계를 갖춘 인간족이었다면 방금 정신이 우그러져 사라졌을 거야. 그런 게 평범하다는 거고.
“저도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아요. 아프고 울고, 좋으면 웃고. 다른 사람하고 비슷해요.”
-미친놈들은 항상 자기가 안 미쳤다고 해.
산카가 눈앞으로 날아왔다. 부리가 망막에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제 눈에 대해 알려주실 수 있나요?”
-봤으니 구경한 값을 치러야겠지만, 아쉽게도 나도 이 현상을 정의하기가 어렵네.
왼쪽 눈이 따끔거렸다. 손을 올려 눈가를 만지려 하자 산카가 저지했다.
-그대로 있어. 살펴보는 중이니까.
“왼쪽 눈이 너무 아픈데요.”
-아프겠지. 깃털을 박아 놨으니까.
잘못 들었나?
“네?”
-말로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잠깐 내 시야를 공유해 줄게.
어지럼증이 머리를 후려쳤다. 눈앞이 잠시 검게 변했다가, 빛을 찾았다.
시선을 가득 채운 건…….
왼쪽 눈에 흰 깃털이 박혀 있는 ‘내 모습’이었다. 당혹감과 놀라움이 차례대로 지나갔다.
“거울 같아요.”
당연하게도 눈앞에 보이는 내가 입을 움직여 말했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내친김에 손과 발도 움직이며 모습을 관찰할 때였다.
-봐봐. 정상은 아니라니까. 시야를 빼앗기고 상이 반전됐는데, 거기서 흥미를 느끼고 있잖아?
“……위험한 상황이 아니니 최대한 즐기려고요.”
-왜 그렇게 판단해? 내가 살며시 널 누르면 넌 이 세계에서 존재의 티끌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네 자그마한 세계가 부서지면, 밖에 있는 육체는 껍데기만 남게 되는 거고. 두렵지 않아?
나른한 목소리였다. 금방이라도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을 끄고 앞에 널브러진 잡동사니들을 치워버릴 목소리였다.
그 잡동사니 중 하나가 나일 테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겁은 나요. 산페르 아저씨도 그렇고, 산카 님도 그렇고 전신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잖아요. 그 거대함 앞에서 전 먼지보다도 못한 존재겠죠.”
가하란은 왼쪽 눈에 꽂혀 있는 깃털을 살폈다. 깃털이 조금씩 커지고 있는데, 하늘을 향해 뿌리를 내리는 나무처럼 변해갔다.
“그래서일까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비대하니까 오히려 담담해져요.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안달할 필요도 없고, 조급할 이유도 없고, 두려움에 떨 가치도 없죠. 결정권은 여기서 산카 님과 마주했을 때 이미 제 손을 떠났으니까요.”
깃털에서 돋아난 하얀 가지가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뻗어나갔다.
가하란은 작은 화분처럼 변한 자신의 몸을 바라봤다.
“무엇보다 샬롯을 아낀다는 말에 안심이 됐어요.”
말을 끝내며 방긋 웃었다.
-샬롯에게 해가 된다면 벌레 치우듯 치워버릴 테니 안심하긴 일러.
“당장은 안 그러실 거죠? 그러면 됐어요. 그보다 저 깃털은 뭘 위한 건가요?”
끝 모르고 자라던 가지들이 성장을 멈췄다. 앙상한 흰색 가지에는 잎도, 꽃도 맺혀 있지 않았다.
-말 섞는 게 피곤한 인간족은 오랜만이네. 네 말대로 당장 널 치울 생각은 없으니, 일단 이것부터 끝내자.
몸이 날아올랐다. 아니, 정확히는 산카의 몸이 공중으로 뜬 거겠지.
시야만 공유하고 다른 감각은 그대로인 기이한 체험. 하늘에서 내려다본 몸은 작은 점이 되었다.
-눈은 세계를 잇는 창이지.
“시적인 표현인가요?”
-아니. 명백한 사실로서 말한 거야. 본다는 행위는 세계를 잇는 첫걸음이니까.
촘촘히 뻗어나간 흰색 가지가 한순간 산카가 있는 방향으로 꺾였다. 시선을 형상화한 것처럼.
징그러우면서도 흥미로운 모습이었다.
-모든 개체의 눈은 사실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설계돼 있어.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 받아들인 걸 해석할 능력이 필요해.
산카의 움직임을 따라 휙휙 움직이는 나뭇가지를 살피던 중이었다.
꼼짝하지 않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휘는 가지를 발견했다.
“다른 쪽으로 휜 가지들도 있어요.”
-다른 걸 보는 중이야. 넌 감지하지 못하겠지만. 그보다 다른 인간이라면 ‘직시의 가지’가 이렇게 크지 않아. 반의반, 아니 더 작겠지. 그 작은 가지들조차 대부분 멈춰 있고.
“크면…… 그러니까 많이 본다는 건 좋은 건가요?”
-좋고 나쁨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보면 안 되는 걸 보는 바람에 죽고 마는 애들도 있고, 봐야 할 걸 못 보는 바람에 비참해지는 것들도 있으니. 그러니 본다는 행위 자체에는 선도 악도, 옳고 그름도 없어.
산카가 고도를 낮췄다.
직시의 가지라 부른 나무 중간에 멈춰 섰다.
파르르 움직이는 가지 사이에 빙글빙글 꼬여 있는 붉은 가지가 보였다.
보자마자 이질감이 들었다.
“색이 달라요.”
꺼림칙했다. 흔히 볼 수 있는 붉은색이 아니었다. 기억 저편에 밀어둔 악몽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저 붉은색.
익숙했다.
그라운드 제로가 벌어지던 그날.
하늘에서 내려오고, 땅에서 튀어 오르던 붉은 실과 똑같은 색이었다.
우연 같은 게 아니었다. 무시하면 안 될 직감이, 저 붉은 가지와 붉은 실은 동류라고 속삭였다.
-너도 느꼈겠지. 저게 무엇인지.
“……저게 대체 뭐죠?”
-한때는 운명이라 불렸지만, 지금은 사라진 창조주의 규율. 저건 그것과 흡사해 보여. 이러니 산페르 그놈도 알아보지 못했겠지.
운명? 규율?
“다른 사람도 다 지니고 있는 건가요?”
-적어도 내가 아는 인간들 중에 저걸 가진 놈은 없어. 딱 하나, 저것과 비슷하게 생긴 걸 품은 아이가 있긴 했지. 물론 그 아이가 품었던 건 저 새빨간 놈보다는 덜 위험해 보였어.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말에 다급히 되물었다.
“그게 누구죠?”
-알아봤자 쓸모없어. 지금은 만날 수 없게 됐으니까.
“……죽은 건가요?”
-죽었겠지. 오래전에. 내가 확인한 건 아니지만 인간이라면 죽어 마땅한 시간이 흘렀어. 인간족의 시간으로 따지면 몇백 년 정도일 테니.
“이름이라도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저도 이 눈에 대해 알고 싶어요. 아는 사람이 없으니 직접 찾아봐야 하고요.”
-이름? 그래, 이름 정도야 구경값으로 치를 수 있지. 그 아이의 이름은 줄리어스. 재미난 아이였지.
줄리어스.
확신이 들었다. 카트시를 만들어낸 그 줄리어스가 맞을 거라고.
줄리어스도 비슷한 눈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줄리어스의 이야기를 쫓아가다 보면 이 눈에 대해 알 수 있는 걸까?
하지만 산카의 말대로 몇백 년 전의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라운드 제로로 역사적 자료도 소실됐다.
몇백 년 전 실존했던 사람의 흔적을 단서도 없이 찾아내는 건…….
가하란은 숨을 짧게 내쉬고 마음을 다잡았다.
“제가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생겼네요.”
-그 아이의 뒤를 쫓아보게? 힘들 텐데. 나도 한때 심심해서 찾아보려 했지만, 뭐 하나 남은 게 없었어. 영혼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면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겠지만, 그마저도 시간에 묻혀 이제는 어려울 테지.
“길목에 들어선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끝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헤매지 않고 가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죠.”
-쓸데없이 긍정적이구나.
“요 몇 년간 쓸데없이 부정적이었거든요. 이제는 털어내야죠.”
-……인간족은 역시 껍데기로 재단하면 안 되는 거야. 너 같은 아이가 툭툭 튀어나오니까.
산카가 붉은 가지에 시선을 집중했다.
-눈을 떠봐.
앞뒤를 자른 말이었지만 설명은 필요 없었다. 가하란은 정보의 세계로 한 걸음 내디뎠다.
하얀 가지들이 한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대신 돌돌 말려 있던 붉은 가지가 기지개를 켜듯 서서히 펴졌다.
통증이 시작됐다.
그와 동시에 붉은 가지에서 하얀 불꽃이 일어났다. 순백의 가지가 하얀 불꽃에 휩싸였다.
-불에 휘감겼다는 게 어떤 의미였는지, 이제는 알겠지?
“네.”
가지가 불에 잠겼지만 타들어 가거나 재가 돼 떨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융성하게 가지를 뻗어 하늘을 가리기 시작했다.
-탐욕스럽네. 모든 걸 보려 하고 있어. 과욕은 화를 부르지만, 넌 그걸 받아들일 수 있지. 만약 이 눈이 다른 인간족에게 갔다면 둘 중 하나였을 거야.
불길을 두른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심상 세계의 모든 것을 보고 말겠다는 의지가 뾰족하게 퍼져나가는 가지를 통해 느껴진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거나, 보고 만 나머지 미쳤거나.
안구의 통증이 커졌다.
불에 타들어 가는 고통이 정점에 달했을 때였다.
순백의 가지가 점차 붉게 물들어갔다.
사물이 형태를 잃고 정보로 변하는 시점이었다.
선들이 주변에서 꿈틀댔다.
하지만 직시의 가지는 본래의 모습을 유지했다. 산카의 영향력을 받는 터라 피상을 유지하는 것 같았다.
가하란은 넋을 놓고 붉은 가지를 바라봤다.
그 모습은…….
“아.”
그라운드 제로 때 땅을 뚫고 튀어나왔던 마나의 뿌리와 비슷하게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